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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 강론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자비보다 정의를 먼저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작성자숲꽃향기|작성시간26.06.15|조회수56 목록 댓글 3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강론

 송영진 모세 신부 ・ 2026. 6. 14. 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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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1주간 월요일 강론>(2026. 6. 15. 월)(마태 5,38-42)

 

<자비보다 정의를 먼저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1) 이 말씀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과 사랑으로

악을 굴복시켜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라는 말에 대해서, “악인에게 천벌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아니면 최후의 심판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배자는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악을 행할 경우에는

두려워하십시오. 그들은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는 자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그분의 일꾼입니다(로마 13,4).”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어떤 악행과 범죄를 당했을 때,

그 일의 심판과 처벌을 사법제도에 맡기는 것은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경찰과 사법부와 교도소는 선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이고, 하느님의 뜻을 집행하는 제도입니다.

 

2) 그런데 권력이 부패하고 타락할 때

사법제도가 제 기능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침 제1독서에 왕비 이제벨의 악행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벨은 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단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의 첫 자리에 앉히시오. 그런 다음, 불량배 두 사람을

그 맞은쪽에 앉히고 나봇에게, ′너는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하였다.‵ 하며 그를 고발하게 하시오. 그러고 나서 그를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이시오.’ 그 성읍 사람들, 곧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은 이제벨이 보낸 전갈 그대로,

그 여자가 편지에 써 보낸 그대로 하였다(1열왕 21,9-11).”

바로 그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나봇에게 가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왕비 이제벨과 원로들과 귀족들과 불량배들이 모두

한 통속이 되어서, 아무 잘못도 없고 힘도 없는

나봇을 죽인 그 일은, 사랑과 자비보다

‘선과 정의’를 먼저 말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서,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셔서

심판과 처벌을 예고하셨습니다.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1열왕 21,23).”

나중에 왕비 이제벨은 하느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2열왕 9,30-37).

착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나봇처럼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는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는데, 가해자의 힘이 너무 커서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공동체가 함께 나서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2-23)”

그 일과 비슷한 일이 바오로 사도에게도 있었습니다.

“바오로가 최고의회 의원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이날까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바른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니아스

대사제가 그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바오로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때에 바오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회칠한 벽 같은 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하려고 앉아 있으면서, 도리어 율법을

거슬러 나를 치라고 명령한단 말이오?’(사도 23,1-3)”

만일에 악행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다면?

그 침묵 때문에 더 큰 악행이 계속 저질러진다면?

과연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겉옷까지 내주고, 이천 걸음을

가 주는 것은, 선과 사랑으로 악을 굴복시키는 일,

즉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회개시키기는커녕 악을 더 큰 악으로 키우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악행에 동조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루카 17,3ㄴ).

꾸짖어야 할 때 꾸짖는 것도 선과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뺨을 친 경비병을 꾸짖으신 일에

대해서, “가르침과 행동이 다르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자체가 다른 뺨마저 돌려대신 일이고,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따라서 경비병을 꾸짖으신 일은,

그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한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대사제를 꾸짖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가 제대로 실현될 때에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기쁨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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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6.06.16 아멘 신부님 숲꽃향기 님 고맙습니다 🙏
  • 작성자하람이 | 작성시간 26.06.16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6.06.16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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