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간 화요일 강론
송영진 모세 신부 ・ 23시간 전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강론>(2026. 6. 16. 화)(마태 5,43-48)
<나 자신이 지금 누군가에게 원수일 수도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1)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기 전에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습니다(창세 3,21).
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카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려고 그에게 표를 찍어 주셨습니다(창세 4,15).
그 일들은 하느님께서 죄인들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좋은 예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죄인들도 사랑하시는 것은, 죄인들도 당신의
자녀들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이 모두
구원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1-23)”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에제 18,32).”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도 당신의 사랑을 주시는 것은,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이미 받고 있으니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반했음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그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요한 13,1-20).
배반자 유다도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의 이름을 끝까지 밝히지 않으신 채
똑같이 사랑하셨습니다.
배반자가 스스로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도 아버지의 사랑과 ‘같은 사랑’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왜 회개하지 않고 떠나버렸을까?
마음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사랑 자체가 완전히
식어버리고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렇게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하면,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사랑하는 것도 거부하고 사랑받는 것도 거부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인데, 그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선택한 것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2)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묵상할 때,
사랑을 실천하는 입장에서만 묵상할 때가 많은데,
우리는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도 묵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인 나’를 여전히 똑같이 사랑하신다.
이웃들은 ‘원수 같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답은, 회개와 보속, 그리고 사랑 실천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나는 죄인이 아니다. 또 나는 다른
사람에게 원수 같은 존재가 된 적이 없다.” 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모르는 것’과 ‘아닌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성인 성녀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회개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실제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든지 안 했든지 간에,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원수처럼 생각하는 이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또 그 이웃이 원수 같은 나에게 사랑을 주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 실천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을 때 시작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는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일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 일이기도 하고,
원수인 유대인을 사랑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마리아인이 베풀어 준 사랑을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그 사랑을 고마워한다면, 자기에게 사랑을 준
사마리아인에게만 보답하는 것으로 그쳐야 하는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을 해야 옳지 않은가?>
3)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여라.”입니다.
친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
즉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을 쌓아 놓고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심’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지금 우리 현실 속에
존재하는 그 높은 벽들을 없애라는 계명이기도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