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카 1,1-4; 4,14-21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하고 시작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읽는 분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제일 마지막 절인 4장 21절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강론의 키워드가 되는 말씀입니다.
‘성서 말씀이 너희 가운데 이루어졌다.’라고 과거형으로 나오는데, 무엇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까?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원의 내용을 조금 더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치유가 이루어졌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축복이 이루어졌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회개하는 마음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핵심입니다.
아마 그때 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무엇이 이루어진 것인지 궁금했을 거예요.
예수님의 입장에서 가장 힘주어 말한 부분이 어디일까 생각하면서 읽으면, 묵상하기도 쉬워집니다.
예수님은 강조하신 말씀이나 단어를 찾아내어 묵상하는 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대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말씀 선포이셨죠.
먼저 제자들을 끌어모으신 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사제의 의무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철저하게 준비된 강론을 통해
신자들을 성체께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좋은 강론은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요.
5분을 해도 지겨울 수 있고, 1시간을 해도 짧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정말 사제가 말씀 선포를 위해 고민하고, 관상하고, 진심 어린 강론을 했을 때,
짧아도 영향력이 클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치유와 구마와 축복과 회개가 이루어진 것처럼,
사제도 이런 마음을 갖고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제만 말씀 선포의 의무를 가질까요?
아니지요. 세례받은 모든 크리스천은 말씀 선포의 의무가 있습니다.
세례받을 때, 그리스도의 예언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직 외에 우리는 사제직과 왕직을 더 받았죠?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은 봉사하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왕처럼 떠받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봉사해야 합니다.
예언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또, 왕직에 참여한다는 의미는 왕은 종이나 노예가 아니기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언직 참여를 위한 말씀 선포, 제가 백번쯤 말씀드린 것 같은데, 말과 말씀은 다릅니다.
말씀은 영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영적 변화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말씀을 듣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사실 제가 신자들에게 하는 말씀도 결국은 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였죠.
‘겸손해라.’라고 하면, ‘김웅열 신부, 너도 겸손해라.’ 하는 말이었습니다.
‘포기해라.’라고 하면, 결국은 나에게 하는 말이죠.
묵상하면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은 듣는 사람뿐 아니라 본인이 변화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말씀의 힘입니다.
또, 두 번째 말씀의 특징은 수많이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치유가 됩니다.
강론 듣고 하느님께 받은 은혜 표현하고 싶어도 못 하시는 분도 많으실 거예요.
말씀 듣고 혼자 눈물 흘리고, 회개하고, 상처치유 받고, 부족하지만
종교인에서 신앙인으로 조금씩 바뀌는 자신을 본다.
또는 1년 전보다 조금은 더 인내심이 생기고 담대해졌다.
이것이 치유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삶을 변화시킵니다.
말씀 자체에 아주 밝은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우주를 변화시킵니다.
창세기에 ‘빛이 생겨라’ 하자 빛이 생겼다고 나옵니다.
무엇으로 생기라 했나요? 말씀입니다.
우주가 너무 광대하다고 생각되면, 세상이, 내 가정이 변화됩니다.
내가 말씀을 듣고 이쁘게 변하니, 남편도 이쁘게 변해요.
내가 말씀 듣고 인내심이 생기니, 그전에는 식구끼리 조금도 참지 못해 싸우던 것이,
일단 내가 변하니 가족들이 바뀝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그러면 말은 무엇입니까?
가서 빵 사 오라 말하면 빵은 사 옵니다.
결과는 있지만, 영적 변화가 없고, 치유가 생기지 않고, 삶의 변화가 없고, 세상이 안 바뀌고,
가정이 안 변해요.
말은 사전적인 의미로 지식 전달이나 상황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미사 끝나고 뭐 먹을까?’ 이것은 말이죠?
그런데 이런 말씀을 통해 열매를 맺으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라고 복음은 가르칩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라고 나옵니다.
예전에 신학생들에게 설교에 대해 가르칠 때, 또 다른 신부들이 많이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부님처럼 쉽게 강론하고, 지치지 않고 길게 강론하실 수 있습니까?
사제들이 다른 사제에게 제일 부러워하는 것이 강론 잘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사제의 첫 번째 의무는 말씀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주교님은 모르지만, 우리 주교님도 사제들에게 늘 그렇게 강조하시죠.
또 유튜브로 제 강론도 들으신다고 하니, 참 고맙죠.
사제의 강론이 명강론이 되어 영적 변화를 가져오게 하고, 치유하고,
가정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해요.
기억을 못 하실 뿐이지, 이것도 언제가 이야기했을 겁니다.
가장 영향을 덜 주는 것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네 번째 조건은 선천적인 조건입니다.
말을 잘하는 집안이 있고, 또 모두 벙어리처럼 말을 못 하는 집안도 있죠.
또 목소리가 나쁜 것보다는 좋은 것이 낫겠죠.
날카로운 목소리보다는 부드러운 목소리, 때로는 힘이 있는 목소리가 낫겠지요.
하지만 요즘에는 기계의 도움을 받아 얼마든지 자기 목소리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후천적인 노력입니다.
후천적인 노력이라는 것은 준비해야죠.
저는 신학생 때부터 지금까지도 나중에 필요할 것 같은 기사를 스크랩해서 모아 둡니다.
책을 읽다가도 신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은 따로 적어둡니다.
또 예를 들어서, 발음. 아나운서들은 마지막 ‘했습니다’ 까지 정확히 전달합니다.
제 강론에도 말꼬리를 흐리는 것 없죠?
저도 태어나면서 이런 것이 아니라, 신학교 때부터 연습했어요.
잘 안 되는 발음은 입에 볼펜 물고 정확한 발음 나올 때까지 반복했어요.
내가 한 말을 녹음해서 들어보고 고쳐나갔어요.
두 번째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제가 모든 체험을 할 수는 없죠.
저는 산전수전, 지상전, 공중전, 화생방전까지 많은 체험을 했죠.
그래서 다른 신부님이나 신자들의 간접 체험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간접 체험을 전달할 때는 반드시 인용 부호를 붙여야 합니다.
마치 자기 것인 양 이야기하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죠.
지금까지 세 가지 조건을 말했죠?
선천적인 것, 후천적인 노력, 체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다 갖추었다 해도 남은 하나가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그 하나는 무엇일까요?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아무리 유전인자가 좋고, 노력도 하고, 체험이 많아도 소용없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성령의 능력을 가득 받고 나서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저도 뒤돌아보면, 부제 때부터 피정 지도를 했으니 40년 다 되어 가는데,
제일 두려운 것이 ‘말씀이 아니라, 말을 지껄일까 봐’ 입니다.
피정 지도하고 돌아오면서 혹시 말을 하고 온 것은 아닌지, 그날 했던 말씀을 되짚어 봅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한 것이 그런 적이 거의 없었어요.
피정 받으러 온 사람들도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고, 이런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그야말로 말장난이 되고 영적 변화를 못 시킵니다.
그래서 저는 늘 말씀 선포하기 전에 항상 기도합니다.
‘성령이시여, 제 입술을 가지소서. 저는 입만 벌려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지켜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사 전에 심한 몸살이 나거나 피정 전날 아무리 컨디션이 안 좋아도 강론을 하고 피정 지도를 하는 거예요.
혹시 기억나세요?
2015년에 제가 갈빗대 8대가 부러졌는데, 다음 날 휠체어 타고 은총의 밤 했잖아요?
그날도 한 시간가량 치유 성가 불렀어요.
그리고 다음 날 일요일도 이천여 명 온 신자들과 미사 다하고, 오후 성모병원에 입원했죠.
돌아보면 사람의 힘이 아니지요.
거룩한 예수님조차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을 선포했다면,
약점이 많은 사제가 성령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어찌 좋은 강론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성서를 가까이해야 좋은 강론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자는 새빨간 거짓말쟁이다.’라고 이냐시오 성인은 말씀하십니다.
만일 여러분도 일년내내 유일하게 읽은 성경이 매일미사 책뿐이라면,
그러고도 하느님에 대해 안다고 하면, 거짓말쟁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밥 먹듯이 매일 읽어야 합니다.
매일미사 책은 잡지입니다.
제가 서운동성당에서만 못했지, 그전 모든 성당에서는 모두 성경을 들고 다녔어요.
그리고 제 강론을 바로 깨알처럼 적어 놓으라고 했어요.
여러분들 매일미사 책에 적어 놓는다면, 매일미사 책 모으세요?
버리잖아요. 낭비입니다.
저는 긴 세월 동안 매일미사 책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던 사람이에요.
지금 나무가 없고 지구가 말라가는 상황이잖아요.
사람이 죽으면 관에 넣어갈 것이 3가지 있어요.
‘십자고상, 묵주, 성경’
성물방에서 사서 넣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겠죠.
이사 다닐 때마다 제일 먼저 벽 닦고 모셨던 십자가, 혹은 아꼈던 손십자가 놓고,
손때가 묻어 몇 번 수리했던 묵주 손에 감아야지요.
그리고 세 번째가 성서인데, 이것이 문제죠.
매일미사 책 넣으실 거예요?
집에 먼지만 뽀얗게 쌓여있는 성서는 자기 것이 아니라, 그냥 진열된 책일 뿐이죠.
천주교 냉담자가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성서를 잘 읽지 않기 때문이라 해요.
개신교 신자들은 성경을 옆에 두고 읽고 쓰고 외웁니다.
그러니 초등학교도 못 나온 할머니가 장사하면서 박사들을 데려다가 입교시키죠.
여호와 증인들은 개신교 문패 붙어있는 곳은 얼씬도 안 해요.
여호와 증인들이 간식처럼 좋아하는 문패는 ‘천주교 교우의 집’이래요.
천주교 신자들은 성경을 몰라요.
그 사람들은 정말 철저하게 교육받고 나와요.
6개월간 합숙 훈련을 하고 장로 다섯 명 앞에서 시험에 통과되어야 봉고차 탈 자격이 생겨요.
두 사람씩 동네마다 나갈 자격이 생기는 거죠.
만일 여기서 불합격이면 다시 6개월 훈련을 받아요.
그 사람들은 성경 딱 펴면 필요한 구절이 나와요.
그런 사람들과 성경으로 싸우겠다고요? 매일미사 책으로 싸우겠다고요?
어림도 없죠.
또 그 양반들 얼마나 친절하고 싹싹한지, 장사하는 천주교 집에 가서 일 도와주고
아기 업어주고 청소까지 해주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어딨어요.
입에 있는 혀처럼 구는데요.
반면 천주교 신자들은 차갑죠.
자, 이제 정리합시다.
루카 복음 4장 21절의 말씀이 중요한 말씀으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구원이 이루어졌고, 치유가 이루어졌고, 축복이 이루어졌고, 회개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아야만 말씀을 전할 수 있지,
성령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는 그냥 지식 전달이다.
지식 전달은 절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람은 사제만이 아니라 평신도도 전해야 한다.
평신도도 예언직을 받았기 때문에, 사제와 똑같은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나 말씀을 선포할 때 성령님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 명심하도록 합시다.
여러분들, 감곡에 오랫동안 계셨던 가밀로 신부님의 말을 대신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아멘
♣2022년 연중 제3주일 (1/23)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