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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사제 인사 불문율/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2.02.22|조회수243 목록 댓글 5


  ◼루카 4,21-30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안녕하셨지요?
저도 여러분들 기도 덕분에 열심히 운동하며 지내 요즘 살도 많이 빠졌습니다.
나중에 너무 날씬해져서 저를 몰라보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지만, 열심히 운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신부님 인사 발령할 때 불문율 하나가 있는 것 아시나요?
‘절대 출신 본당 쪽으로는 보내지 않는다.’입니다.
가톨릭 전통으로 이런 불문율이 생긴 근원이 바로 오늘 성경 말씀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예수님의 고향이 어디입니까?
나자렛이죠.
오늘 회당에서 가르쳤다 하셨는데, 이 회당이 고향 나자렛에 있는 회당이었죠.
그런데 그때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왔을까요?
첫 번째는 궁금해서 모였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많은 사람이 모였던 것입니다.
뭐가 궁금하고 뭐를 확인하고 싶었을까요?
‘정말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인가? 한동네 어릴 때부터 같이 컸던 그 친구인가?’
이것 확인하고 싶어서 많이 모인 거예요.
그리고 이야기 들어보니 말을 또 그렇게 잘한다는 거예요.
그 소문이 다른 마을에서도 들려왔죠.
그러니 매번 들어 싫증 나고 지겨웠던 회당장의 설교가 아니라, 요즘 식으로 하면
새로운 피정 강사가 온다는 말에 동네 사람들 뿐 아니라 다른 동네 사람들까지 몰려온 거예요.
그래서 고향에 왔으니 예수님은 다른 어느 때보다 지극정성으로 설교하셨을 겁니다.
짐작 가시죠?
그래서 처음에는 거기 모여 있던 동네 사람이나 다른 동네 사람들이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뒤에 또 어떤 말이 나옵니까?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그 한마디로 어둠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은총이 내리는 곳에는 반드시 마귀의 시샘이 있어요.
은총을 못 받게 막는 어둠의 세력이 반드시 따라오지요.
처음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이제껏 회장당 설교와는 차원이 다르고,
그래서 성서에 나오는 대로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는데,
그냥 그 은총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갔으면 되는데, 즉시 마귀가 들어와요.
어둠이 그들을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은총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경멸의 분위기로 바뀝니다.
존경의 눈길이 멸시의 눈길로 바뀌어요.
누군가를 영적으로 죽이고 매장하는 도구가 무엇이죠?
혓바닥, 혀입니다.
마귀라는 놈은 그 짧은 혓바닥을 통해 선입견이라는 어둠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내 앞에서 말하는 은총의 말을 하는 저 사람의 많은 장점을 그 사람의 배경, 스펙이라는 것에 묻히게 했죠.
오늘 회당에 몰려왔던 동네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첫 번째 스펙은 요셉이라는 목수의 아들이었어요.
그 당시 유대 땅에 천한 직업 순으로 하면 목수는 몇째 안가는 직업이었죠.
그리고 요셉은 큰 집을 짓는 대목수가 아니라,
집집이 다니며 부서진 가구 고쳐주는, 간신히 먹고 살아가는 목수였죠.
그렇기에 은총의 말이 ‘요셉의 아들이 아냐?’라는 말에 순식간에 경멸과 조롱의 분위기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아마 제가 예전에 박서양이라는 분의 이야기를 해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이분은 한국의 첫 번째 양의사였는데, 아버지가 백정이었어요.
한국에서 가장 천한 직업이었죠.
이분은 한국 최초의 서양 의술을 갖춘 제중원 의사로 재직하시면서 독립운동가도 많이 도우십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조선사람이 서양 의술을 배워 의사가 되었다고 박서양을 얼마나 많이 존경했겠어요?
마치 예수님이 회당에서 하신 설교를 듣고 은총의 말씀이라고 느끼면서 존경했던 것처럼요.
그런데 한동안 박서양의 아버지가 백정인 것을 알고 그 병원을 찾아가지 않은 환자들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에게 가면 병이 나을 것을 알면서도 박서양의 실력은 두 번째 문제요,
아비가 백정이라는 백그라운드가 먼저였죠.
 
저는 오늘 예수님이 나자렛 고향에서 천대와 멸시를 받는 것을 보고 박서양이 생각이 났어요.
이 사람들도 그랬겠다.
‘목수 요셉의 아들 아냐?’, ‘백정의 아들 아냐?’
똑같은 거죠.
물론 그 사람의 출생, 가문, 재산 등이 그 사람 인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평가할 때 지극히 외부적인 것, 우발적인 것, 겉으로 보이는 그 집안의 어떤 스펙,
이런 것에만 의존해서 평가하는 유혹에 우리 믿는 자들은 절대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참 빠지기 쉬운 유혹입니다.
사제인 저도 무던히 노력하지만, 저녁 기도하다 보면
‘아, 오늘도 아무 근거 없이 함부로 판단했구나.’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영혼의 병, 시기, 질투가 밑에 깔려 있을 때가 있지요.
그것 때문에 함부로 판단하게 되는데, 참 고치기 힘든 것 같아요.
 
여러분들, 병 낫기를 거부한다면 어떤 명의도 고쳐줄 수 없는 것 아시죠?
왕진을 거부하는 환자를 의사가 찾아갈 수는 없어요.
나자렛 사람들은 중병을 앓고 있었지만, 본인들이 병이 든 줄조차 모르고 있었고.
또 병든 고향 사람들을 낫게 하려고 명의가 찾아왔는데도 무시하죠.
오늘 복음에는 심지어 절벽으로 떨어뜨리려고 한다고 나와요.
이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목수의 아들이 죄도 아닌데, 그 백그라운드로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한다며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거죠.
 
군중은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살인 당할 뻔했던 거예요.
아마 누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던가, 밀치기 시작했다면 아마도 걷잡을 수 없이 우르르 따라 했을 거예요.
그 당시 유대인의 마을은 대개 산 중턱이나 꼭대기에 있었죠.
지금도 평지가 없고, 나무도 없는 야산 위에 집들이 있죠.
 
치유하려 예수님이 찾아갔는데,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으니 예수님은 고쳐줄 재간이 없으셨죠.
그래서 오늘 성경에는 ‘다시는 나자렛에 가지 않았다.’라고 나오죠.
여기에서 처음에 말을 했던 가톨릭이 사제들을 이동시킬 때의 불문율이 나온 거죠.
 
지금은 우리 외가, 친가 모두 천주교 신자가 되었지만, 대대로 고리타분한 유교 집안이었죠.
부모님 대부터 신자가 되었죠.
제가 신부 되어 어른들에게 명절에 인사를 가면, 십여 년까지도
‘자네, 이제 신부 생활은 할 만큼 했으니, 장가가야 하지 않나? 사내로 태어나 씨를 남겨야지.’ 하셨어요.
그러니 저도 고향에 가면 말발이 안 섰어요.
예수님 마음이 이해돼요.
 
사실, 사제나 예수님의 고향 사람이나 친척이라는 사실로는 구원 안 되죠.
성경에 예수님을 어머니와 친척들이 찾으러 온 적이 있죠.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확인하고 예수님을 끌고 오려 한 것이었죠.
그러니, 예수님과 친척이라는 만으로 절대 구원 못 받죠.
더 풀이하면 사제의 부모라는 것, 신학생의 부모라는 것, 구교 신자라는 것만으로
절대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사제, 수도자들이 많이 나온 곳에서는 본당 신부 하기 어려워요.
우리 교구에 감곡은 전국에서 사제 수도자가 제일 많이 나온 본당이죠.
제가 부임하기 전까지 청주교구 신부들이 제일 발령 안 났으면 한 곳이었죠.
자식 가운데 신부 수녀가 있으면 자식 생각해서 사제를 더 존중해야죠.
아무튼 제가 처음 부임한 날 부탁드렸어요.
‘감곡은 100년 된 고목입니다. 고목에 꽃이 피면 사람들이 지나면서 쳐다보지만,
그렇지 못하면 잘려 나가 불쏘시개가 됩니다. 제 말을 따라주세요.’
저는 감곡을 너무너무 사랑해요.
절대 잊지 못할 정도로 깊은 사랑을 갖고 살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부임 후 무언가 변화를 주어 후임들이 오고 싶어서 기도하는 본당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이제 그렇게 되었죠?
 
선입견에 사로잡혀 경멸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평화를 만들 수 없어요.
저는 한평생 많은 피정 지도를 했죠.
본당마다, 모임마다 다 달라요.
은총이 쭉 사제를 통해 내려가는 본당도 있고. 벽이 있어 냉랭하고 차가운 본당도 있죠.
또, 철야 미사, 2시간짜리 강의 다르고, 교도소 강의할 때 분위기가 다 다르죠.
 
사도행전 13장 16절의 말씀으로 강론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은총의 불감증, 말씀의 불감증, 죄의 불감증, 이 3가지 불치병에 걸리면 사제도 천국에 못 가요.
나자렛 사람들은 이 세 가지 불치병에 걸려 있었어요.
말씀을 거부하는 말씀의 불감증,
저분이 바로 은총 덩어리라는 것을 몰랐던 은총의 불감증,
목수의 아들이라 하면서 멸시한 죄의 불감증.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후 고향을 떠나서 다시 가지 않으셨고,
그래서 예수님의 위대한 업적을 본 것은 고향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더라도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겸손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자렛 사람들처럼 하루에도 수도 없이 선입견이라는 어둠의 노예가 되어
이제껏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근거 없이 판단했었나를 반성하면서,
남아있는 인생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잘 분별할 수 있는 축복을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여러분,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2022년 연중 제4주일 (1/30)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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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요셉-막내165 | 작성시간 22.02.22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아름다운 | 작성시간 22.02.22 감사하며 영원한도움 페루와 3회로~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2.02.22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2.02.22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qkrdudal | 작성시간 22.03.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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