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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고백/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2.02.27|조회수245 목록 댓글 4


 



■ 루카 5,1-11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강론의 주제를 저는 ‘고백’이라고 잡았습니다.

복음에 베드로의 고백이 나왔죠?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의사 표시하는 것을 우리는 말씀이라 부릅니다.

또, 인간 쪽에서 하느님에게 뜻을 전하는 것을 고백이라 부릅니다.

고백 가운데 제일 상징적인 것은 기도겠죠.

그래서 우리 가톨릭 주요 기도문 가운데는 고백하는 기도문이 의외로 많아요.

혼자 중얼중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고백하는 거예요.

또 그 고백하는 내용에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기도문이 많죠.

우리 가톨릭 주요 기도문에 죄인임을 고백하는 기도문이 몇 개일까요?

세 개가 있지요.

첫 번째는 미사 시작하면서 하는 ‘고백의 기도’, 두 번째는 ‘통회의 기도’, 세 번째가 ‘반성의 기도’입니다.

 

고백의 기도는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하면서 가슴을 세 번을 두드리죠.

 

통회의 기도는

‘하느님,

제가 죄를 지어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기에

악을 저지르고 선을 멀리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다짐하오니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아멘.’

내용을 들어보면 참 눈물 나는 기도입니다.

사랑받으셔야 할 하느님의 마음을 내가 아프게 했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 신자들이 통회의 기도는 잘 안 해요.

 

마지막 반성의 기도는

‘주님, 오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자세히 살피고

그 가운데 버릇이 된 죄를 깨닫게 하소서. 아멘’

저녁 기도하시는 분들은 반드시 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고백의 기도, 통회의 기도, 반성의 기도.

이 세 기도는 우리 가톨릭에 오랫동안 내려온 죄인임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활자화되어 뭉쳐있는 이 기도문을 읽으면서 아무 생각도 안 나죠.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얼마나 아름답게 하느님께 드리는 고백의 기도입니까?

얼마나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기도입니까?

통회의 기도도 내용을 보면 눈물이 펑펑 나는 기도죠.

한줄 한줄 읽어 가보면 다른 기도가 필요 없어요.

하느님이 인간에게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고백은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병을 낫게 해주세요, 부자 되게 해주세요, 일 해결해 주세요.’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가장 흔들리게 하는 기도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세 기도 중 유일하게 고백의 기도는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하면서 ‘형제들에게도 고백’을 하죠.

왜 ‘형제들에게 고백’한다고 그랬을까요?

어떤 학자들은 이 형제가 사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해요.

하지만 제가 볼 때 형제라는 것이 사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 자매님들, 이 기도 보면 성질 안 나세요?

형제에게만 고백하고 자매에게는 안 해요.

저는 ‘전능하신 하느님과 교우들에게 고백하오니’가 옳다고 생각해요.

우리 전례에 보면 형제는 들어가고 자매라는 말 안 들어가는 것 많아요.

저는 이제 고백의 기도가 조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형제’ 하면 자매도 들어가는 것 아니냐 하면서 도매금에 자매를 묻어 넘기려는 것이 아직도 많죠.

 

저도 이 세 기도를 분석하면서 기도의 아름다움을 많이 느꼈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저녁기도에 반성의 기도 운을 띄워주시면 자식들은 뒤를 받아서 했어요.

만일 졸다 다음 말이 안 나오면 바로 꿀밤이 날아와 불이 번쩍 났죠.

아직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가 하루는 약주를 하시고 들어오시어 통회의 기도를 하시면서 우시는 거였어요.

어머니가 무슨 일이냐 물으시니,

‘이 사람아, 이 기도를 하면서 울음이 안 나올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시는 거예요.

그때부터 저는 혼자 통회의 기도를 많이 합니다.

다시 한번 읽어드릴게요.

‘하느님,

제가 죄를 지어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기에

악을 저지르고 선을 멀리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다짐하오니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아멘.’

 

방송을 통해서 강론을 듣고 계시는 전국의 또 해외의 교우 여러분.

우리 가톨릭 주요 기도문 가운데에 죄인임을 고백하는 기도가 세 가지 있다고 하는 것은

저는 39년 만에 처음 하는 강론입니다.

며칠 동안 계속 고민했습니다.

왜 베드로 사도에게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렇다. 하느님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이 말이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드리는 기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기도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기도다.

인간이 하느님께 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 바로 ‘저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기도를 늘 하다 보니, 또 자주 하지 않다 보니,

아주 옛날에 들었던 메아리로 사라져 버린 거죠.

 

여러분, 죄짓고 정말 주님 앞에 너무 부끄럽고 창피할 때, 말을 억지로 만들려고 하지 마시고,

이 3개의 기도를 천천히 한 줄씩 하시면서 베드로 사도의 말을 고백하세요.

‘주님, 저는 주님을 가까이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떠나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떠나시겠어요?

예수님은 달려와 끌어안으실 거예요.

‘힘내라, 힘내라.’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죄 많은 인간을 성화시키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주님 앞에서 죄 많은 부끄러운 존재요.

그래서 다시 강조하거니와, 인간이 하느님 앞에 바칠 수 있는 고백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우리 하느님을 알고 싶어 해요.

그런데 하느님을 알기 위한 첫 번째 단추는 자신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꼬락서니를 똑바로 모르고는 절대 하느님 앞에 다가갈 수 없어요.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비참하고 하찮은 존재인가를 아는 것이죠.

그래서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공포스러운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거룩한 두려움, timor Dei(라틴어, 띠모르 데이)’라 합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모두 느끼고 살 듯 얼마나 자신을 진실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고백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갈 구멍, 합리화할 구멍, 구실을 찾죠.

 

이 세상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죄인입니다.

만일 본인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새빨간 거짓말이고 하느님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죄인을 세 부류로 분류합니다.

첫 번째 죄인은 자신은 티끌만큼도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죄인입니다.

수많은 죄를 쌓고 살면서도 너무 태연하게 의인으로 자처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이 걸려 있는 병을 죄의 불감증이라 했죠?

지금은 코로나가 무섭습니다만 19세기에는 흑사병이, 20세기에는 에이즈(AIDS)가 가장 무서웠죠.

물론 이제는 약이 나왔지만, 그전에는 에이즈 걸리면 다 죽었죠.

오죽하면 AIDS가 ‘아(A), 이제(I) 다(D) 살았다.(S)’의 약자라고 우스갯소리 했겠습니까?

그만큼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이 에이즈인데, 이것보다 더 무서운 병이 죄인임을 못 느끼는 죄의 불감증입니다.

그런데 모든 병에는 원인이 있듯 죄의 불감증에 걸리는 사람도 원인이 있겠죠?

죄의 불감증에 걸리는 원인은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살아서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자기의 비교 대상으로 삼을 때, 교만의 바벨탑을 쌓으며 저절로 죄의 불감증 환자가 됩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으니 바벨탑이 쌓아지지 않을 수 없어요.

바벨((Babel)이라는 말은 혼란이라는 뜻입니다.

성당 열심히 나가는 나보다 냉담 중인 남편을 보면 내가 의인이라 생각되겠죠?

입만 열면 성당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말쟁이 자매보다는 말 한마디 안 하면서 입 꽉 다무는 본인을

분명히 의인이라 생각해요.

이렇게 눈에 보이는 사람과 비교하다 보면 자기는 죄인이 아닌 의인 쪽에 서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가슴에 두고 비교하면 죄인이죠.

 

나는 예수님만큼 깨끗한가?

나는 예수님만큼 기도하는가?

나는 예수님만큼 입이 무거운가?

나는 예수님만큼 봉사하는가?

나는 예수님만큼 나 자신을 내어주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만큼 봉헌의 삶을 사는가?

나는 예수님만큼 순명하는가?

예수님만 갖다 대면 오매 기죽어!

시원찮게 사는 인간을 들이대면 내가 좀 올라가는 것 같고 열심히 사는 사람 축에 끼는 것으로 보이죠.

이 김웅열 신부가 긴 세월 동안 그래도 나름대로 건방지게 안 살았던 이유는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했어요.

그러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한 대로 ‘예수님, 김 신부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죠.

강론 못 하는 신부랑 비교하면 우쭐할 수 있죠.

그것을 정화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바로 ‘죄인이라는 사실인지’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유명세를 탈수록 죄인이 아닌 것처럼 마귀는 만들어요.

‘너 없으면 세상이 흔들린다. 너 대단한 사람이야, 네가 가톨릭의 중심이야.’

이런 이야기가 들어오면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 하는 독이 들어오죠.

독도 그렇게 무서운 독이 없어요.

그런데 기초가 안 되어있는 사람들은 그 말에 넘어가요.

순식간에 교주가 되는 거죠.

 

두 번째 죄인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있지만 감추고 있는 죄인입니다.

분명히 죄인인 것은 알지만 창피하니 드러내지 못해요.

우선 숨깁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워서 선뜻 고백을 못 해요.

고백의 기도에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한다고 했죠?

어떤 때 우리는 정말 용감해져야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해요.

심리학이나 정신치료에서도 단체 모임에서 한 사람씩 ‘나는 이런 일을 해서 힘듭니다.’라고

고백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효과가 큽니다.

우리의 고백의 기도가 2~3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죠?

그리고 다른 두 기도는 하느님에게만 고백하는데 고백의 기도는 형제들에게도 고백한다 했죠.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고백의 기도는 세 부류의 죄인 중 두 번째 사람에게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죄인임을 아는데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면, 가슴을 치며 이 기도하면서

앞에 있는 형제들에게 고백하는 것처럼 생각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용기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죄를 갖고 달팽이처럼 자꾸 안으로, 안으로 숨어들지 말고,

겉으로 입으로는 ‘내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소리를 지르지 않더라도,

고백의 기도하면서 형제자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 같아요.

세 개의 기도 중 유일하게 미사 전례에 올라온 기도가 고백의 기도이죠.

전례학 박사가 들으면 이상하게 해석한다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일리가 있다고 봐요.

아니면, 왜 다른 기도는 하느님과 일 대 일인 데, 이 기도만 ‘형제에게 고백’이라는 말이 들어갔겠어요?

 

이 두 번째 부류 죄인의 가장 큰 위험은 고백 성사 볼 때 거짓 고해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부류의 죄인은 고해소 들어와서도 고백할 것이 없어 당당해요.

가끔 고해소에 앉아있으면 누가 들어온 것 같은데 말이 없어요.

제가 ‘고백하세요.’라고 하면 ‘죄 없는대요?’ 해요.

왜 들어오셨는지 물으면 일 년에 한두 번은 들어와야지 아니면 찝찝하대요.

두 번째 부류의 죄인은 고백하러 들어오죠.

하지만 어둠이 또 들어와요.

‘너, 그거 고백할 거야? 신부님이 너 목소리 알아. 나중에 쳐다보는 눈빛이 달라지면 어떻게 해?.’

이러한 두 번째 죄인은 모고해의 죄에 빠지기가 쉽고, 그것은 모령성체로 연결되기 쉽죠.

그러나 이 부류의 죄인은 희망이 있어요.

양심의 불안과 뉘우침 때문에, 언젠가는 회개할 여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뉘우침과 고백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죠.

때를 놓치면 영원히 불행해지고, 첫 번째 부류로 넘어가 버려요.

 

세 번째 부류의 죄인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죄인입니다.

‘제가 이렇게 부족하네요. 제가 죄를 지어서 마음 아프게 해 드렸습니다.’

부끄러운 줄을 알지만 숨기지 않고, 죄인으로 판단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이사야 예언자, 바오로 사도와 베드로 사도처럼 누가 뭐라 해도 죄를 감추지 않아요.

 

오늘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가 소명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사야는 자기도 모르게 뜻밖에 하느님을 뵙자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입이 더러운 사람이고 죄가 많기에 하느님을 본 순간 죽었다고 스스로 판단하죠.

그러나 이사야는 죽지 않고 천사의 도움으로 입이 깨끗하게 됩니다.

그 깨끗해진 입을 가지고 하느님의 일꾼으로 용기 있게 나서서 위대한 예언가로 바뀌죠.

 

제2독서에서도 사도 바오로는 자신을 칠삭둥이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은 사람이요,

사도로 불릴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 이야기합니다.

사실 그는 신자들을 박해했던 전과가 있던 사람이었죠.

그러나 주님의 사도로 뽑힌 뒤에는 오히려 그 약점 때문에 어느 사람보다도 강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는 정말 인간적으로 보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배운 것도 없고, 성격도 거칠었죠.

용기는 있었지만 무슨 일을 성사시킬 지혜와 능력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죽하면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소리를 들었고, 12 사도 중 정말 예수님에게 혓바닥 맞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많은 무능력이 있었음에도 베드로 사도는 솔직했어요.

그리고 절대 감추려 들지 않았어요.

어느 날 주님을 만나 뜻밖에도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을 때, 그는 서슴지 않고 고백하지요.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은 그 못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죄인에게 세상을 맡기십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3부류의 죄인이 등장합니다.

 

어떤 왕이 교도소를 방문했대요.

그런데 만나는 죄수마다 본인은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들어왔으니 내보내달라 했대요.

한 사람도 자기 잘못으로 교도소에 들어온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거죠.

그런데 복도 맨 끝에 있던 한 사람이 고개도 못 들고 훌쩍거리고 있더랍니다.

왕이 왜 우는지 물었죠.

그 죄수가 ‘저는 너무 큰 죄를 지은 죄인이기에 임금님을 감히 쳐다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천한 죄인을 찾아주신 임금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울고 있습니다.’라고 하더래요.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합니다.

‘이 교도소는 죄가 없는 사람들만 머무는 곳인데, 죄인이 딱 하나 있다. 그를 석방하여라.’

 

성서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참 많죠?

잘못을 인정하면 창녀도 나병 환자도 모두 용서받고 은혜받았습니다.

그러나 감추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감추면 추하고 비겁하고 치사한 인생으로 전락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러나 누가 더 큰 죄를 지었고, 누가 더 많은 죄를 지었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아무리 큰 죄라도 인정하고 뉘우쳐서 고백하면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죄라도 숨기면 치사하고 비열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정직하고 솔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나에게 불이익이 왔다 해도 떳떳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은총이 여러분을 축복으로 채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2022년 연중 제5주일 (2/06)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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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pine1215 | 작성시간 22.02.27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아름다운 | 작성시간 22.02.28 감사하며 영원한도움 페루와 3회로~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2.02.28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베드로 문 | 작성시간 22.03.19
    + 찬미 예수님!

    고맙습니다.

    +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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