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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셋이 다 한통속/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2.10.12|조회수172 목록 댓글 5

◼루카 16,1-13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여러분들, 오늘 복음에 집사라고 나오죠?

예전 성서에는 ‘청지기’라 나오고, 새 성경에는 집사예요.

집사나 청지기나 사실은 같아요.

우리는 청지기가 머리에 와 닿으니까 청지기라 이야기하겠습니다.

청지기의 출신이 뭘 거 같아요?

청지기는 노예예요.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노예 제도가 있었지 않습니까?

노예가 한둘이 아니었겠죠.

그런데 그중에서 청지기 자리에 오르려고 하면 최고의 노예여야 하겠죠.

청지기 자리에 오르기까지 이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는 생각을 해요.

일단 주인한테 성실함을 인정받아야 하고, 둘째, 잡혀 온 그날부터 진실성을 인정받아야 했죠.

그리고 세 번째 순명성을 인정받았어야 했죠.

 

주인은 이 노예 가운데서 내가 어디를 갔다 오더라도 집안 살림을 다 할 수 있는 내가 정말 믿을 수 있는 놈이 누굴까를

아이 노예 때부터 지켜보다가 집사 자리를 딱 임명을 할 겁니다.

아무튼 청지기는 주인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공식화된 등식이죠.

그런데 오늘 청지기가 무엇인가 주인 눈 밖에 났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쫓아내려고 한다는 걸 알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해요.

그리고 어떻게 하는지 오늘 복음에 나오죠.

난 신학생 때부터 이 내용이 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주인도 그렇게 사기를 친 청지기에게 ‘너 참 정말 끝내준다. 세상살이에 이렇게 살아야 해.’하고 칭찬해요.

그래서 이게 이 청지기를 닮으라는 얘긴가 좀 헷갈렸어요.

그런데 읽다 보면 주인 놈, 청지기, 빚진 놈, 세 놈들이 다 나쁜 놈이죠.

빚 깎아준다니 신나서 문서 내밀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묵상해보니까 그런 뜻이 아닌 거예요.

 

자, 청지기는 주인이 가진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죠.

그 때문에 경영권만 있어요.

주인이 청지기한테 재산을 맡기는 것은 소유권을 주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청지기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다시 말하면 높은 자리에 있다 보면 사람이라는 게 초심을 잃어버려요.

주제 파악을 못 해요.

처음 청지기로 임명받을 때 ‘주인님 감사합니다. 저를 이렇게 인정해 주셨으니 주인님의 재산 목숨 바쳐 늘려드리겠습니다.’

하고 살았겠죠.

하지만 청지기가 나이를 먹으면서 이제 능구렁이가 되기 시작했어요.

주인의 약점도 알게 됐고, 주인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 마누라 몰래 바람피우는 것까지 다 알고 있는 거야.

또 어디다 땅을 몰래 사놓은 것도 알고 있고, 뭐 다 알고 있어.

그러다 보니 이 청지기가 기차가 궤도를 벗어나서 탈선하듯 탈선하기 시작하죠.

소유권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인류의 역사라는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는 줄 아는 것에서부터 모든 불행이 시작됩니다.

청지기에는 소유권이 없었어요. 그런데 자기 것으로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까 욕심이 생겨나고 교만이 생겨나고 죄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비참한 사람으로 전락 됩니다.

주인은 청지기가 횡령을 눈치채자마자 교활한 꾀를 부립니다.

해고당하리라는 것을 안 후 장부 조작에 들어가죠.

기름 백오십 항아리를 백 항아리로, 밀 백 섬을 팔십 섬으로.

명백한 장부 조작이에요.

이렇게 주인 허락도 안 받고 자기 마음대로 빚을 탕감해준 것은 자기가 해고당한 후 자기한테 돌아올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죠.

첫 번째 아마 자기 집으로 초대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일단 빚진 자들이 청지기를 고맙게 생각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당연히 생각하죠. 빚을 탕감해주는데.

하지만 빚 탕감해주는 이유는 모를 거예요.

아마 대부분 빚진 자들은 ‘주인의 명령대로 탕감해주는군.’ 하며 사실은 청지기에게 고마워하는 것이라 주인에게 고마워했겠죠.

왜냐하면 빚진 채무자들도 청지기가 마음대로 빚을 탕감해 줄 권한이 없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이 청지기는 다른 생각을 한 거예요.

‘내가 이게 내 재산이니까 내가 탕감해주면 이놈이 나를 고마워할 거다.’

천만에! 고마워하지 않아요.

뭐가 이렇게 눈에 뭐가 씌기 시작하면 안 보이는 거예요.

영특함도 분별력도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장부 조작을 통해서 빚을 갚아주면 공범자를 만든다고 생각했어요.

‘나 혼자 안 들어가, 네 놈들도 같이 공모했잖아,’

나중에 죄가 밝혀져서 어디에 끌려가더라도 누구 붙들고 늘어지는 심정, 

임 전가공범 의식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원죄죠.

여러분들 아담과 하와 얘기하시잖아요.

먹은 것이 다 들통났어요.

빨가벗은 것이 들통나니까 하느님 아담에게 물었잖아요.

‘네가 벗었다고 누가 얘기하더냐? ’

‘그 과일 먹으니까 눈이 밝아졌는데 저 여자가 먹으라고 줬어요.’ 아담이 대답하죠.

저 여자가 누구예요? 자기 마누라.

또 마누라한테 또 물었죠. ‘너는 왜 아담한테 줬느냐?’

그랬더니 뱀이 먹으라고 줬대요.

책임질 놈이 하나 없고 뱀한테 물었어요.

‘이놈아 너는 왜 저거를 사람한테 먹으라고 그랬냐?’ 물으니,

‘아니요.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는 진리만 알려줬지 내가 까서 준 적 없어요.’ 합니다.

맞죠?

뱀은 까서 준 적 없고 그거 먹으면 눈이 밝아진 건 맞아요.

그래서 인류 원죄 내용을 보면 책임 전가예요.

그러니까 이 청지기도 만일에 자기가 범죄가 들통나면 같이 끌고 들어갈 사람들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내가 이거 전부 주인 몰래 이렇게 탕감해주고 있는 것 다 알고 있으면서 니들 왜 딴소리야?’

청지기는 이런 두 가지의 효과를 기대하면서 장부 조작을 한 겁니다.

 

자, 청지기는 경영권만 있지소유권은 없다고 그랬어요.

 

그럼 우리 쪽으로 한 번 얘기해봅시다

신자들을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이 사람은 신앙인이구나, 이 사람은 아직도 종교인이구나.’

하는 사제로서의 제 나름의 어떤 분별 기준이 조금 있어요.

주일 미사 안 빠지고 나가는 것, 당연히 그것은 신앙인의 한 요소 중에 하나죠.

그런데 ‘정말 이 양반은 이런 마인드를 갖고 있구나.’ 하는 감탄이 나오는 분이 있어요.

자식 얘기를 할 때도 우리 아이들 다 성모님의 것이에요.

재산도 자기 것이 아니래요.

‘아유 재산이 제 것이 어딨습니까? 신부님. 하느님이 주셨으니 잘 경영하고 또 힘든 사람한테 도와주는 게 일이죠.’.

다시 말하면은 신앙인들은 양보 대명사사랑의 대명사를 많이 써요.

그런데 겉모습만 신앙인들은 실제로는 그냥 종교인들은 뭐냐면 이기적인 대명사를 많이 써요.

뭐든지 앞에다가 ‘나의 것, 내 것, 내 새끼’

여러분들 성경에서 부자가 농사 잘되어 창고가 모자라니까 큰 창고를 지었죠.

거기에 잔뜩 곡식을 싸놓고 흐뭇해서 창고를 쳐다보면서 뭐라 해요?

‘내 영혼에 말하리라. 이제부터 실컷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자!’

건방진 놈이지, 영혼까지도 자기 것이라고 그래요.

공동 번역에 ‘내 영혼’이라고 나왔는데, 지금은 ‘나’로 바뀌었어요.

저는 공동 번역이 더 정확한 것 같아요.

이렇게 종교인들은 항상 이기적인 대명사를 써요.

다 자기 거래요,

 

목숨이 내 거 아니죠.

자기 거 아니죠. 하느님 거잖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잘 주무셨어요?’라고 묻는데, 밤에 죽는 사람도 많아서 그런 거예요.

이 조그마한 대한민국에서도 신문에만 안 났지, 500명 이상이 죽는대요.

심장마비로 죽든, 교통사고로 죽든, 중환자실에 실려 오는 사람이 천 명이 넘는대요.

그 일이 내 일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하겠어요?

이렇게 생명부터 우리의 모든 것의 소유권은 하느님에게 있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도 잘 경영해야 해요.

 

그런데 이 청지기처럼 소유권이 자기한테 있는 줄 알고 살 때는 어떻게 된다고요?

장부 조작을 하게 돼요.

시간 조작을 하게 돼요.

시간 조작을 통해서 시간을 횡령하게 돼요.

시간은 내 것이 아니거든요. 귀한 시간이에요.

 

예전에 몇 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 어느 통계학자가 조사했다고 해요.

사람을 칠십 평생으로 봤을 때 70년 동안 도대체 시간을 어떻게 쓰고 살아가느냐를 조사했대요

그랬더니 하루에 7시간 자는 사람은 70년 동안에 24년 동안을 잠을 잔대요.

밤잠뿐 아니라 낮잠도 자는 사람은 24년이 넘겠죠.

거의 3분의 1을 ‘잠’으로 소비하는 거예요.

그다음 화장실에 앉아 있는 시간은 5년 8개월, 남자들이 그건 더 많아요.

또 목욕하는 데 7년, 뭐 하는 데는 몇 면.

그런데 이 통계학자가 알고 싶었던 것은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데 많은 시간을 쓰면서

과연 하느님께 기도하는 시간은 몇 년이나 되는지를 알고 싶었던 거예요.

몇 년 나왔을 것 같아요? 일 년도 안 나왔어요.

매일같이 15분씩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돼야 70년 동안 모으면 6개월이 나와요.

나는 처음에 그 통계를 듣고 충격받고 계산기로 두드려 보았더니 맞아요.

매일 15분 기도해야 70년 모아놓으면 6개월이에요.

 

우리는 이 세상 것 얻기 위해서 시간과 돈과 모든 걸 다 투자하죠.

그런데 영원한 세상을 얻기 위하여 하느님과 기도하는 시간이 내 인생의 70분의 1도 아닌 140분의 1이에요.

그리고 솔직히 얘기해 봅시다.

우리 하루에 15분씩 온전히 깨어서 기도하는 날이 몇 날이나 돼요?

분심 잡념 속에 다른 생각만 하죠.

그렇다면 실제로는 6개월도 안 된다는 얘기야.

우리 속담에 ‘벼룩도 낯짝이 있다’이 있죠.

저는 피정 때도 그걸 강조를 많이 해요.

‘하루에 삼십 분은 우리 기도하자.’

적어도 내 생에 일 년은 하느님께 봉헌하고, 그분 심판대 앞에 갔을 때 반갑다고 하시지 않을까요?

‘너 나랑 대화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 줄 아니?’

‘아 모르긴 몰라도 꽤 돼요. 저는 사는 것이 다 기도인데요?’

그런데 그게 안 통해.

‘아니, 촛불 켜놓고 정말 서로 얼굴 마주 보면서 너랑 나랑 대화한 시간이 얼마나 되니?’

‘그래도 몇 년은 될 걸 요?’

‘요즘은 천국도 다 컴퓨터화가 되어 한 인간 한 인간 자료가 이렇게 다 쌓여 있단다.’

하며 딱 키 하나 누르니 자료가 쫙 나오는데,

‘이거 봐라. 너 칠십 년 살면서 2개월 3일 했네. 자, 이러고도 천국 갈 자신이 있니?’ 하실 수 있죠.

그러니까 내가 기도하는 것에 적어도 배는 늘리자.’

그래야 하느님 앞에 갔을 때 얼굴을 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도 1년을 못 넘겼네요.’ 하면,

‘그래 조사해 보니 1년 이상은 했구나, 그래 애썼다.’ 하는 소리를 들어야지요.

‘어떻게 너는 먹고 놀고 마시고 여행 다니고 자는데 이렇게 많은 시간을 썼으면서 어떻게 나랑 대화한 시간은 이렇게 없니?’

하시면 안 되겠죠.

우리는 시간마저도 횡령할 때가 많아요.

하느님의 것인데 시간을 자기 거라고 생각을 해요.

하느님의 것이잖아요이게 시간 조작이고 시간 횡령이에요.

 

물질도 마찬가지죠.

재산을 다 자기 것이라고 해요.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내 것이라면, 재벌들이 죽을 때 주머니에 돈 넣고 가요? 땡전 한 푼도 못 넣고 가요.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에요.

그래서 내가 조금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같이 공유해야죠.

내 것이 아니에요.

물질 횡령, 우리가 얼마나 많이 하고 삽니까?

 

또 하느님께서 권위라고 하는 직책을 주셨어요.

주교, 신부, 수사, 등 여러 많은 교회의 직책은 100% 봉사하라고 주신 자리예요.

참다운 권위는 하느님처럼 밥이 되는 거죠.

그런데 그 자리에 앉다 보면 그야말로 폼만 잡을 수가 있거든요.

겸손을 횡령하는 거예요.

권위를 조작해서 겸손을 횡령, 또 순명을 해야 할 순간에 순명을 조작해 불순명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청지기는 이천 년 전에 한 개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얘기입니다.

청지기가 초심으로만 끝까지 살았다면,

사제가 사제 서품받는 날 하느님께 했던 순결하고 아름다웠던 약속을 죽을 때까지만 지킬 수 있다면, 수

도자들이 서원할 때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면, 평신도들이 세례받을 때의 초심으로만 살 수 있다면!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어둠이 들어오기 때문에 이렇게 청지기처럼 하느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알게 되죠.

우리 기도할 때도 하느님의 뜻대로 해달라는 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실제로 우리 기도 내용 보면 하느님의 뜻은 관계가 없어요.

‘지금 내가 급하니까 이거 빨리 해결해 주시오. 하느님 뜻대로 마시고 내 뜻대로 지금 내 상황대로 빨리 해 주시오.’

이런 기도 할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 이야기했듯 주인이나 청지기나 빚진 사람이나 전부 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분명히 건강한 사람은 아니에요.

다 문제가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알쏭달쏭한 비유를 들어서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싶으신가?

이 세 등장인물 주인, 청지기, 빚진 자들의 어떤 윤리적인 기준을 평가하기보다는

이들이 세속적인 삶을 위해서 얼마나 교묘한 방법과 수단을 짜내고 살아가고 있는가,

다시 말하면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는 이처럼 가진 재주와 가진 꾀를 다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기회가 되라는 뜻입니다.

아까 이야기했죠?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시간을 쓰지만,

하느님께 기도하는 시간은 평생 매일 15분 기도해야 6개월밖에 안 나온다 했어요.

자신의 영혼 구령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살아가는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크나큰 변화를 분명히 가져와야 한다는 얘기일 겁니다.

세속의 인간들은 영의 인간들보다 더 교활하고 얕고 셈에 훨씬 더 앞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주인을 칭찬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청지기가 잘했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탕감을 받아 좋아하는 그들이 그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죠.

세속의 인간들도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이만큼 열심히 사는데,

영원한 천국을 가기 위해서 너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고 살아가는가,

하늘에다 보화를 쌓고 살아가는가를 깜짝 놀랄 만큼 우리에게 호되게 훈계하고 계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하루 나와 연결이 되어 있는 시간이 몇 분이나 되어 있느냐 뒤돌아보라는 얘기죠.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재산을 맡겼는데 왜 그것을 네 것처럼 착각하니?

내가 미사 때마다 사제 입을 통하여 나누라고 얘기했고 가난한 사람 도우라고 얘기했는데,

왜 네 것처럼 착각하니? 너 왜 내 것 횡령하고 있니?

 

우리는 다시 한번 하느님이 주신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청지기처럼 소유권이 자기한테 있는 줄 알고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늘 제가 얘기하죠.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잡소리가 들리기 전에 그냥 침대에 누운 채로 내가 내 몸에 십자가를 그으며 축성을 하고,

제일 먼저 나오는 기도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하느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오늘 하루를 마지막으로 알고 살겠습니다.’

그 기도가 바로 겸손한 청지기의 기도요, 순명하는 집사의 기도입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생각을 하면 쉽게 내려놓을 수가 있어요.

우리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뭐라고요?

아직 내가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기에 우리가 영적인 행복을 못 느껴요.

그래서 오늘 이 집사처럼 되어서는 안 되고요, 또 이렇게 이런 집사를 칭찬하는 주인처럼 살아서도 안 되고요,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겸손한 청지기가 되도록 애씁시다.

아멘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2022년 연중 제25주일 (9/18)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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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2.10.13 아멘~감사합니다.
  • 작성자요셉-막내165 | 작성시간 22.10.13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가을비 | 작성시간 22.10.13 아멘~감사합니다
  • 작성자무지개 | 작성시간 22.10.13 아멘~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2.10.27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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