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김웅열 신부 강론

당신은 치유 받은 10인 중 누구랑 닮았습니까?/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2.11.03|조회수148 목록 댓글 2
◼루카 17,11-19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강원방 그리고 충청방 그리고 계획에는 없었지만 해외방 신자분들이 오셨습니다.

이 집은 분명히 은퇴 사제가 사는 사가입니다. 성당은 아니죠.

그렇지만 이 사제관, 특히 이 다락방에는 61분의 성인 유해가 벽에 계시고,

두 점의 십자가 보목(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지셨던 십자가 나무 조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밑 사제관 서재에는 23분의 성인 유해가 또 따로 모셔져 계시고, 또 한 점의 십자가 보목이 있죠.

글쎄요, 여러분들 이제껏 성지 순례 다니시면서 유해를 제대 쪽에 모셔놓은 몇 분까지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인 유해를 모시고 있을 겁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까스러진 신자들은 ‘신부님 취미가 뼈다귀 모으시는 거예요?’ 합니다.

아이고, 그걸 말이라고!

이 83분 한 분 한 분, 십자가 보목 하나하나 모두 저한테 소설처럼 오셨어요.

그래서 여기는 은퇴한 원로 사제가 사는 사가라기보다는 성지입니다.

제 몸 혼자 살려면 이렇게 큰 집이 필요 없죠.

사제단 숙소 17평짜리 들어가서 신부님이랑 같이 살면 돼요.

워낙 사람을 많이 만나고 살아서 조용히 그렇게 살고도 싶었어요.

그런데 또 하느님이 그걸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예전에 내가 평화방송에서 했던 얘기, ‘나중에 은퇴하면 치유센터를 하고 싶습니다.’.

그때 머릿속에 있는 치유센터는 방이 사오십 개 있고 여러 가지 은사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모여있는 큰 빌딩이었어요.

현대인들은 점점 상처가 더 커지지만 어디 가서 해결할 데가 없어요.

많은 교우분이 ‘어디 가면 이 상처 해결할까요?’ 묻지만, 마땅히 안내해 줄 곳이 없었어요.

그러니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개신교 기도원에 가서 며칠 머물고 오기도 했죠.

또 상담하려면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와 사제는 하는 일이 다르지요.

어떤 영적인 것을 관리하기 때문에 정신병원에서 해결 안 된 일에는 사제가 해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다녀봐도, 아름다운 경관에 피정센터는 있어도 그냥 빌려주는 대관하는 역할만 하지

그 자체가 치유센터인 곳은 안타깝게도 한 군데도 못 봤어요.

그리고 카리스마를 받은 평신도도 많고 사제들도 많죠.

그런데 그분들이 각자 활동하다 보니까 오해를 많이 받아요.

그분들을 모아서 하느님께 받은 좋은 카리스마를 성장시키는 치유센터가 필요하다는 것이 한평생 생각했던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죠.

말 그대로 은퇴 사제가 아니라 원로 사목자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사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은퇴 신부님들은 그냥 늙어만 갑니다.

아파트에서 혼자서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쓸쓸하게, 그러다가 혼자 돌아가시는 분들도 있죠.

원래 은퇴하면 은퇴 발이 딱 1년밖에 안 가요.

1년 동안은 여기저기서 그전 본당 신자들 찾아오지만, 1년 지나면 대부분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고 그래요.

다행히 저는 맺은 인연이 있기에 이렇게 주일에도 한 달에 두 번 미사를 할 수가 있어요.

물론 평일에도 내가 ‘평일 몇 시에 미사 합니다.’ 하면 오시겠지만, 그땐 내가 감당을 못할 거예요.

그래서 평일에는 그냥 혼자서 미사 합니다.

평일에는 그냥 봉쇄 수도원처럼 거의 침묵 속에 살아요.

그냥 자연과 같이 기도하고 묵상하고 너무 저는 행복합니다.

처음에는 매주 만났는데 주일에는 본당보다 더 바쁜 것 같아, 지금은 2주 4주만 하자고 딱 못을 박았죠.

이곳은 작기에 20명 이내로 한정이 되지만, 이제 정원이 조성되고 야외 미사를 드릴 수 있으면

더 많은 분이 미사를 함께 하시게 될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빌딩 개념의 치유센터는 아니라 하더라도

다른 모습으로 하나하나 만들어져 갈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이 김웅열 신부가 생각하고 있던 것에 동의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의 기도도 필요하고 여러분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제가 늘 자주 묻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 여기 형제님 처음이신데 어떻게 오시게 됐습니까?’

아내가 웃는 것 보니, 내가 듣고 싶은 답을 안 하신 것 같아요.

아까 얘기했죠? 이곳은 거룩한 땅입니다.

거룩한 땅은 하느님이 선택받은 사람만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부르실 때는 분명히 이유가 있기에 부르신다고 저는 믿어요.

부르시고 나서도 아무 얘기도 안 하시다든지 줄 게 없다든지 하면 사람 멍 때리는 거죠.

여러분들은 선택받아 오신 분들이 분명해요.

겉으로 보면 오늘 이 자리의 선택권이 여러분들한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은혜를 받는 제일 첫 번째 단추는 뭐냐?

‘이 거룩한 자리에 감히 올 수도 없는 저를 주님께서 오늘 불러주셨다’라는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은 여러분들은 그냥 호기심에 있던 것을 보고 가는 것밖에 안 돼요.

시편 81장 11절, 내가 많이 얘기하죠.

‘너희들은 다만 입을 벌려라. 내가 채워주리라,’

적어도 우리 쪽에서는 입을 벌리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채워주고 싶어도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들어올 재간이 없는 거예요.

파이프와 파이프를 연결할 때는 파이프 크기가 맞아야죠.

하나는 굵은데 하나는 얇다면, 아무리 굵은 데서 맑은 물이 나와 넣고 싶어도 못 들어가요. 딱 맞아야 해요.

그리고 그냥 놔두면 안 되죠.

물이 새지 않게 벨트로 꼭 조여야 해요.

‘다만 너희들은 입만 벌려라. 내가 폭포수 같은 은혜를 채워주리라.’

 

오늘 복음은 많은 얘기가 들어가 있는 복음 중의 복음인 것 같아요.

오늘 주인공이 누구예요?

물론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또 다른 주인공으로 나병 환자 10명이에요.

지금도 ‘나병’ 하면 무서운 생각이 들죠.

6.25 직후, 60년대 70년대는 참 많이 다녔어요.

그런데 그 후에 소록도나 안양의 성라자로마을 등에 모아서 약도 먹이고 했죠.

지금은 거의 많이 다 돌아가셨고 자식들은 이제 전염이 안 돼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나병 환자였다는 것은 자식들에게는 주홍색처럼 쫓아다닙니다.

그렇지만 전혀 표시를 내지 않죠. 멀리 떠나서 살아요.

그 자식들은 특별히 예수님 시대 때 나병이라고 하는 건 천형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때는 사람이 병을 앓으면 어떻게 생각했느냐?

‘저놈은 반드시 병을 앓을 정도로 죄를 지은 놈이야.’ 이렇게 생각했어요.

병이 깊으면 깊을수록 ‘저놈이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했지요.

그런데 본인이 살아오는 걸 보면 죄짓는 것 같지도 않은데 아파.

그러면 ‘조상들 가운데 큰 죄 지은 놈들이 있어 자손들이 저렇게 벌을 받는구나.’ 했어요.

이것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죄의 관념 그리고 고통의 관념이었어요.

‘고통을 반드시 받을 만한 놈이기 때문에 받는다.’ 생각했기에 동정 같은 것 안 했어요.

그러니 아버지가 나병에 걸리면 자식들이 똘똘 말아 산에 있는 굴속에다 집어넣은 거예요.

가끔 빵이나 던져주고.

그래서 나병에 걸리면 썩어 문드러지는 육신적인 아픔보다도 정신적인 아픔 버림받은 것, 배신당한 것에 더 괴로웠겠죠.

 

문둥이들이 모여 사는 굴 앞에 누군가 빵을 갖다 놓으면서 한마디를 던집니다.

‘거기들 살아 계세요? 우리 동네에 예수님이라는 용한 분이 오신대요.’

이렇게 한마디 툭 던지자 굴속에 수십 명의 나병 환자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죠.

그중에 한사람이 ‘우리 한번 가볼까?’ 하니,

다른 나병 환자가 ‘미쳤냐? 내려가다 돌에 맞아 죽어.’

왜? 나병 환자들은 일반 사람들이 사는 동네 내려올 수가 없었죠.

그리고 나병 환자를 돌로 때려죽여도 그땐 살인죄 성립이 안 됐어요.

또 다른 사람이 ‘우리 이렇게 비참하게 여기서 죽으나 그분 만나러 내려가다가 돌에 맞아 죽으나 죽는 건 매 한 가지야.

나 이렇게 여기서 못 살아. 나 밖으로 나가고 싶어.’ .

그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냄새나는 헝겊 때기를 똘똘 말고 햇빛을 보고 굴속에서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절뚝거리며, 어떤 사람은 다리를 질질 끌며 내려가요.

 

예수님계신 마을 이름이 정확히 나와 있지 않지만,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면서 어느 마을에 들어가셨다고 그랬어요.

이미 예수님은 그 당시에 슈퍼스타였죠.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인산인해를 이루었죠.

그 많은 사람이 왜 왔겠어요?

다 아픈 사람이고 마귀 들린 사람이었죠.

저 양반이 메시아이기 때문에 몰려든 게 아니에요.

메시아든 뭐든 상관없어 당장 내 아픈 거 낫게 해주는 분! 99.9%가 다 기복이에요.

그래도 예수님은 탓하지 않으셨어요.

 

열 명의 나환자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계신 마을에 들어왔으나 약한 몸뚱이로 예수님계신 저 앞에까지 갈 재간이 없었죠.

동네 사람들도 예수님을 향하여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뒤쪽에 나병 환자들이 있는 걸 처음엔 몰랐어요.

그런데 한 사람이 ‘이게 무슨 냄새야?’ 하더니, 놀라서 문둥이들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순식간에 그냥 길이 쫙 열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해요.

오늘 성경에 보면 ‘나병 환자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라 나옵니다.

나병 환자들은 소리도 못 내요. 말소리도 제대로 안 나와요.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합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 예수님의 행동이 그전 같지 않아요.

예수님은 특별히 나병 환자 보면, 나병 환자가 오기 전에 먼저 쫓아가서 상처에 손을 대고 치유해주셨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아주 냉랭해, 쌀쌀함마저 느껴져요.

‘그래, 내가 거기로 갈게. 오지 마.’ 이것도 아니에요.

‘천천히 나 있는 데까지 오렴.’ 이것도 아니에요.

뭐라고 그럽니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딱 한 마디만 하는 거예요.

열 명은 그 얘기를 듣고 절망감에 빠졌어요.

‘왜 우리도 직접 고쳐주면 될 것이지 왜 사제한테 가서 몸을 보이라고 그러지?’

사제는 동네 한가운데 살아요.

그러니까 동네 한가운데를 지나가라는 얘기고, 그러면 지나가다가 돌에 맞아 죽어.

그 10명은 서로 쳐다보면서

‘거봐, 우리 괜히 왔잖아. 또 산에 언제 또 올라가냐? 사제 있는 데를 우리가 갈 수가 없잖아?’ 했어요.

그래도 그중에 리더 격이 이끌었겠죠.

‘가자! 여기까지 왔는데. 가다 사제를 못 만나고 죽더라도 우리 끝까지 가자.’

예수님께 등을 돌리면서 10명은 사제한테 갑니다.

뭐, 10m를 갔을지 20m를 갔을지 모르죠.

예수님의 말에 순명하며 가요

아, 그런데 드라마틱하죠?

그들이 가는 동안에 어떻게 됐다고요?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대요.

세상에! 여러분들은 집에서 떠나서 이 사제에게 오는 동안에 이미 다 치유가 된 거예요.

신부님 만나러 가야겠다고 결심을 한 그 순간부터 이미 치유는 시작이 됐어요.

예수님이 사제에게 가라고 여러분들 시켜서 오셨잖아요? 맞죠?

우리도 영적으로 나병 환자보다 더 심한 나병 환자죠.

여기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가거라 했을 때부터 이미 치유와 구마는 시작이 된 거예요.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참 기가 막힌 거죠.

그런데 분명히 열 명이 치유됐는데, 큰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돌아오는 건 몇 사람?

한 사람. 그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었어요. 사마리아 사람이에요.

 

자,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요.

어떻게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이 굴속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을까?

그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게 한 것이 무엇일 것 같아요?

고통이에요. 고통.

열 명의 나병 환자 가운데 이상하게도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가 끼어 있었죠.

유대인들은 우리들이 알다시피 사마리아 사람을 가까이하지도 않고 천시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에 공통적인 불운에 처해 있을 때는 인종이나 민족적인 장벽 따위는 무너집니다.

맞죠. 문둥병이라는 공통된 비극 속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모두 그냥 ‘고통에 빠져있는 인간’으로 바뀐 거예요.

고통은 인간을 평등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고통은 인간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요.

도저히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됐던 사람도 같은 고통을 당하면 가까워져요.

 

내셔널 지오그래피를 보면 그런 것을 볼 수 있어요.

홍수가 났어요. 그러면 사람이고 짐승이고 높은 데로 올라가죠.

그런데 나중에 올라가 보면, 그곳에 맹수도 있고 토끼도 있어요.

다시 말하면 평상시에는 서로 잡아먹고 먹혀야 할 상황인데도 홍수를 피해 올라간 산꼭대기에서는 해치지 않아요.

왜? 죽음이라고 하는 절박한 고통 앞에 있을 때는 적이고 뭐고 없는 거예요.

평상시에는 내 먹잇감인데 고통 앞에서는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죠.

그냥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불쌍한 처지에 동료예요.

홍수가 지나갈 때까지 함께 싸우지 않고 모여 있다고 그래요

홍수가 지나고 나면 토끼는 죽을까 냅다 내빼겠죠.

 

이렇게 이 고통이라고 하는 건 참 신비스러워요.

그래서 그 굴속에서 평소 같으면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끼어 있을 수 있다는 거 이해되십니까?

그런데 이 열 명의 나병 환자가 다 나았어요.

아홉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인데, 그 사람은 예수님 앞에 와서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했죠.

그냥 고개만 까딱하면서 ‘땡큐’가 아니라 발 앞에 엎드렸다 했어요.

감사드릴 때 우리의 행동은 굉장히 여러 가지예요.

그냥 ‘감사해, 고마워’ 이런 감사도 있고, 고개 숙이며 하는 감사도 있죠.

감사의 최고의 행위는 엎드리는 거예요.

사제들이 사제서품 때, 수도자들이 종신 서원 받을 때 바닥에 엎드린 이유도 그거예요.

‘하느님께 내 모든 것을 다 봉헌하겠습니다. 당신은 내 주인이십니다. 이제부터는 당신만을 섬기겠습니다’라는 뜻이에요.

 

10명 가운데 사마리아 한 사람만이 돌아와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참 희한하네. 내가 분명히 열 놈을 치유했는데, 어찌 너 혼자만 돌아왔냐? 도대체 아홉은 어디 갔어?’ 물으셨어요.

병이 낫고 나니까 물과 기름 갈라지듯이 이제 사마리아인이 그때 보인 거죠.

그래서 치유되자마자 사마리아 사람은 팽 당했어. 왕따를 당한 거예요.

 

아홉 사람은 다시 똘똘 뭉쳤어.

그리고 어디로 갔느냐 하는 얘긴 내 피정 때 말씀드렸죠?

내가 그거 연구하느라고 38년 걸렸다고.

아홉 사람이 세 명씩 나뉘어 갔어요.

첫 번째 세 명은 마누라 두들겨 패러 갔어요.

나병 걸려 있는 사이에 딴 놈이랑 정분이 났어.

세상에! 나를 배신하고.

다시 말하면 아팠던 사람이 치유되면 분노의 마귀가 찾아와요.

아팠을 때는 ‘아 그래. 뭘 하든 말든 내 몸도 괴로워. 차라리 팔자 고치고 살아.’

이렇게 마음이 너그러웠는데, 몸이 낫고 나니 ‘세상에! 나를 배반하고 딴 남자랑 살아? 내 가만 안 둬.’

이건 내가 주변에 주민들을 통해 확인한 일입니다. (웃음)

또 세 사람은 어디 갔다 했죠?

몸이 낫자마자 술집 찾아갔어.

‘몇 년 동안 못 먹었던 술 아주 밤새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취해 보자’.

다시 말하면은 치유 받으면 두 번째 술 마귀가 찾아와요.

몸이 아프면 술이 안 받아요.

마지막 세 번째 세 사람은 어디 갔느냐?

창녀촌으로 갔어.

‘그동안 여자 맛을 못 봤으니 실컷 맛보자.’

치유되면 세 번째 찾아오는 마귀가 음란 마귀가 찾아와요.

분노의 마귀, 술 마귀, 음란 마귀는 샴쌍둥이처럼 한 몸이야.

항상 셋이 같이 돌아다녀.

이 셋한테 걸리면 배겨날 자가 없어요.

 

그러면서 예수님이 그러셨죠.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래서 성경에 치유 받고 예수님에게 축복을 못 받은 사람 그 아홉 명이에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아팠던 몸이 낫는 것이 아니죠.

아팠던 몸덩이가 나아도 몇십 년 후엔 또 죽어요.

내가 가끔 치유는 영의 치유가 있고 육의 치유가 있다고 말씀드리죠?

그리고 육신의 치유는 한계가 있고 불확실하다.

병이 나았다 하더라도 몇 년 후에 또 다른 병에 걸릴 수가 있고 언젠간 죽어.

이천 년 전에 부활했던 라자로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오늘 이 사마리아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습니까?

그러나 영의 치유는 영생을 보장하기 때문에 아픈 몸뚱아리 낳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죠.

그런데 이 아홉 인간은 육신의 치유가 다라고 생각하고 그냥 가버린 거예요.

‘고맙긴 고맙지. 나중에 내가 삼겹살이나 한번 사드리면 돼.’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게 아니었죠.

사마리아 사람으로 살면서 받았던 그 수모, 그리고 또 아까 얘기했던 가족들에 대한 배신감, 절망감, 분노,

이런 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어요.

진물 흘러내리는 몸뚱아리는 나았어도 영의 치유는 아직 안 됐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앞에 온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 순간에 이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의 치유만이 아니라 영의 치유까지 같이 이루어졌죠.

 

우리를 살아가면서 너무 감각적인 것을 하느님께 청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내가 뭐라고 그럽니까?

‘먼저 영의 치유를 청해라. 그러면 육신의 치유는 하느님이 보너스로 주는 거다.’

영이 치유되니 아픈 몸뚱아리가 나아!

그런 경우 너무너무 많죠.

그래서 사제들의 강론은 영을 치유하는 강론이 돼야 해요.

신부님 얘기 들으면서 내가 회개하고 ‘그래, 열심히 살자.’ 결심한 날, 그냥 고추장 하나로 밥을 비벼 먹어도 밥맛이 좋아져요.

 

오늘 여기 계신 여러분들, 그리고 전 세계 이 미사를 듣고 계신

여러분들은 아홉 명에 속하신 분입니까, 아니면 사마리아 사람 중 한 명에 속하신 분들입니까?

비대면으로 미사를 하시더라도 제가 볼 때는 분명히 예수님의 얘기처럼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여라’ 했던 말을 들으셨던 분들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사제를 만나기도 전에 치유가 됐어요.

하지만 오늘 여러분들은 사제까지 만났죠.

그리고 사제가 오늘 여러분들을 위해서 이 사제에게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어요.

미사를 같이 드리고 있어요.

여러분들에게도 소중하면 저한테도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에요.

최선을 다해서 저는 미사 드리고 있고, 예수님을 만나게 하려고 정성을 다해서 강론 준비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병 환자가 있던 굴속에 들어가 있어서는 안 되죠?

우울증이라고 하는 굴속, 분노라고 하는 굴속, 자존심이라고 하는 굴속, 나의 질병이라고 하는 굴속에 들어가서,

우울증에 빠져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가선 안 되죠.

열 명의 나병 환자는 굴속에서 일단 나오는 것은 칭찬받을 만해요.

아홉 명의 나병 환자는 치유되고 난 다음에 육신의 치유가 구원이라고 착각했던 거예요.

영의 치유까지 같이 받아야 하는데.

그래서 우리도 몸이 아플 때 먼저 ‘아픈 데 낫게 해주세요.’라는 말보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제 영을 치유시켜 주십시오.’ 하십시오.

영의 치유를 먼저 청하면 육신의 치유는 그냥 덤으로 옵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선택해서 부른 이유가 확실해졌죠.

그냥 온 게 아니에요.

나도 오늘 여러분들을 만나기 위해서 며칠 전부터 기도했어요.

혹시라도 여러분들한테 해치우는 식으로 미사를 절대 해서는 안 되겠다.

여러분 중에는 유튜브로만 저를 보고 듣다가 오늘 처음 만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감곡성당에 가면 임가밀로 신부님 동상 밑에 뭐라 적혀있나요?

임가밀로 신부님은 감곡성당에서 50년 동안을 본당 신부 하면서 엄격하고 무서운 신부님이었지만,

항상 어떤 말로 신자들을 풀어줬느냐?

‘나는 여러분들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이 말보다 아름다운 말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저도 여러분들이 오늘 이 자리에 오기 전부터 사랑했어요.

오늘 남편한테 가서 그 얘기 해주세요.

‘자기야, 난 자기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어요.’

 

오늘 여러분들 구원받으셨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2022년 연중 제28주일 (10/09)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2.11.03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2.11.04 아멘~감사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