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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당신 누구요? 난 무속인이요. 당신은 누구요? 난 신부요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3.06.05|조회수142 목록 댓글 2


◼요한 20.19-23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제가 이 집으로 들어온 이래 가장 많은 신자분과 미사를 같이하고 있는 날입니다.

경북방이 원래 오는 날이고, 거기에 오는 경사가 있죠?

오늘 79세이신 자매님 세례가 미사 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미사에 첫영성체, 예수님의 몸을 처음으로 영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대모님이 제 모친이시어, 참 이상한 족보가 되었습니다.

그냥 레지나 자매님이 내 누님이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족보가 됐습니다.

대모님이야 대녀를 위해서 매일 기도하겠지만 나도 우리 엄마의 대녀이시니 미사 중에 항상 기도를 안 할 수가 없게 된

그런 좋은 관계가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제가 늘 신자들 이곳에 와서 미사 하실 때 그런 얘기로 서두를 꺼내죠.

‘여러분들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러면은 어떤 분들은 ‘차 타고 왔습니다.’ 하시는데, 제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죠.

차 타고 온 줄 모르고 내가 물었겠습니까?

내가 듣고 싶은 답은 뭐예요? 뭐라고 대답하셔야 한다고요?

‘주님께서 불러주셔서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 집은 또 지금 꾸미고 있는 정원까지 전체가 힐링랜드입니다.

여기는 은퇴한 사제가 사는 개인 사가가 아니다 이거죠.

왜냐? 이 집 안에는 성인들의 유해가 80여 분이 모셔져 있어요.

나중에 미사 끝나고 2층에 올라가서 성인들께 큰절하고 내려오세요.

2층 경당에만 63분의 성인 유해와 십자가 보목이 모셔져 있죠.

2천 년 전 예수님이 지셨던 그 십자가 나무 조각 세 점을 제가 모시고 사는데 두 점이 2층 경당에 있어요.

그리고 서재에는 23분의 유해와 가장 큰 십자가 보목이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어느 때는 사제관에서 방귀도 잘 못 뀌어요.

다 쳐다보시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여기는 은퇴한 사제의 원로 사목자의 개인 사저라기보다 여긴 성지예요.

맞죠? 아마 전 세계에서 이렇게 여든다섯 분이 넘는 성인 유해를 모시고 있고

십자가 보목 세 점을 모시고 있는 데는 전 세계 유일하게 여기밖에 없습니다.

많은 교우가 ‘신부님 뼈 모으는 게 취미세요?’ 물어요.

아이고! 40년 사제 생활 동안 정말 소설처럼 저한테 오신 거예요.

해외에 피정 갔다가 다 쓰러져가는 어느 수도원에 들어갔더니 원장이 이제 수사 수녀들도 다 죽고 혼자 남았대요.

그러면 모시고 있는 성인 유해를 어떻게 할지 고민이었는데 마침 우리 동네 한인 성당에 한국 신부님 오신다는 말을 듣고

‘한국은 순교자의 나라다. 모시고 가면 좋겠다.’ 생각했대요.

이렇게 해서 하나하나가 전부 다 소설로 책을 써도 여러 권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사연과 함께 저한테 오신 거예요.

조금 여유가 되면은 성인 유해를 모시게 된 것에 대한 것을 책으로 만들려고 그래요.

소화 데레사 성녀는 어떻게 오셨고, 또 성녀의 뼈뿐 아니라 그분이 입으셨던 수녀복 조각(성의라 하죠)은 어떻게 왔고,

요한 비안네 신부님의 발꿈치뼈가 온 이야기 등등.

그래서 여기는 성지에요.

나 혼자 산다면 이렇게 집이 클 필요가 없고 많은 돈 들여 정원을 꾸밀 이유도 없어요,

치유의 장소, 신자들, 아니 신자 아니라도 누구라도 와서 머물다 가면 치유되는 장소로 만들기 위함이죠.

또 그렇다고 해서 은퇴 사제이기에 이 지역에 있는 성당과 충돌이 되면 안 돼요.

은퇴 사제들은 되게 조심스러워요.

여기 사목권자는 감곡 본당 신부예요.

그래서 저는 이 근처에 있는 신자들은 아예 얼씬도 하지 말라고 그래요.

감곡 성당 가서 미사 드리라 해요.

잘못하면 많은 신자가 뺏기는 걸로 착각하거든.

그래서 ‘신부님, 감곡 성지에서처럼 첫 토요일 기도 찬미의 밤 하시면 안 좋아요?’ 하시는데, 안 돼요.

거기서 첫 토요일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또 해봐요. 문제가 커집니다.

은퇴한 분들은 그 지역 사목권자가 사목하는데 방해가 안 되는 선에서 지혜롭게 해야 해요.

무슨 얘기인지 이해되시죠?

이렇게 많은 성인을 모시고 있는 이곳에서 저는 성지에서 사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 여러분이 오신 것은 휘발유 태우면서 차로 온 것은 분명하지만, 그 너머에는 하느님의 초대가 있었다는 거죠.

불러주셨으니 각자 각자에게 뭔가 하실 말이 있고, 하실 일이 있고, 또 뭔가 시작하실 게 있었을 거예요.

괜히 ‘신부님 계신 곳이 성지가 되었대?’ 하지 마세요. 저 바로 바티칸 끌려가요.

또 유튜브 들으시는 분들도 엉뚱한 생각 하지들 마세요.

하도 별의별 것을 다 겪다 보니까는 어느 때는 말을 못 해.

 

여기 바로 뒤에 금불사라는 절이 있어요.

조계종인데 카페에 올라간 사진을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어제 절밥 먹고 왔어요.

원래는 카페 운영자들과 함께 가려 했는데, 다음 주에 바로 운영자 라틴어 미사가 있어서 오지 말라 하고,

대신 충주에 있는 성인 주일학교 교사분들과 같이 갔어요.

요즘은 젊은 사람들 주일학교 교사에 없는 거 아시죠? 다 엄마 아빠들이 해요.

그분들이 마침 청소하러 온다고 하시길래 케이크 사서 같이 가자 했어요.

열두 시 반 즈음에 가니 열댓 분 불자들, 처사도 계셨고 보살도 계셨죠.

우리의 형제님이 불교식으로 처사님이고, 자매님을 보살이라 해요.

들어가니 밥상이 차려져 있고 불자들이 이제 밥을 하고 막 그래요.

그런데 까만 로만칼라 사제복 입고 케이크 하나 갖고 들어가니 박수가 터졌죠.

신부님 멋쟁이, 불자님들도 멋쟁이 하면서, 사 간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노래했죠.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부처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하니, 거기 있던 불자들이 당황하면서도 너무 기뻐했죠.

스님은 더 놀라 쌍꺼풀진 눈이 더 커졌죠.

카페 가면 9초짜리 동영상도 올라가 있어요.

또 올 때 바나나랑 배랑 한 보따리씩 받아왔어요.

저녁 즈음 함께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스님에게 보내서 애쓰셨다 하니 30분 후에 전화가 왔어요.

마지막 손님이 가시고 이제 신부님 카톡 보았는데, 너무너무 감사하고 어떻게 말로 표현을 못 하겠대요.

그래서 우리 전 세계적으로 뜬 거 아시죠? 카페를 전 세계에서 보니, 이제 스님은 세계적인 스님이 됐다고 하니,

성탄 때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시어, 밥 한 끼 드시러 내려오시라 했어요.

그래서 종교 대통합을 하는 거죠.

사실, 저는 본당 신부 할 때도 석가탄신일에 길거리에 현수막 걸어주었어요.

‘부처님 오신 것을 축하합니다. OO 천주교회 신자 일동’

그런데 그 모습을 외인들이 보고 감동하는 거예요.

워낙 개신교 가려 했는데, 그 현수막을 보고 뭔가 큰 집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입교했다는 분도 있었어요.

 

나팔을 불며 ‘예수 천국 불신 지옥’

그렇게 피곤하게 전교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하나 보여줌으로써 선한 영향을 우리 신자들이 줘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거기에 앞장서 사제들이 모범을 보여야죠.

이렇게 본당마다 축하해주면, 불자들도 그것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고 사람들도 천주교는 통이 크다 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뭐예요?

예수님이 돌아가실 마지막 기도가 뭐라고 그랬어요?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 하나는 천주교 신자들끼리만 똘똘 뭉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이 세상 사람들이라고 하셨고, 그 안에는 모든 종교가 다 포함이 돼 있는 거죠.

 

여러분들 세례받기 전에 한국은 토속 신앙이 있어 점집도 가보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천주교 신자가 되고 난 다음에 친구가 가자고 해서 점집 가면 점괘가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안 나와요)

아니, 이분들 다녀오신 분들이네, 내 유도 신문에 걸렸어.

안 다녀오신 분들이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죠.(웃음)

안 나와요. 그것은 뭐냐?

세례받기 전과 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례받은 바로 그때부터 성령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강론 중에 이야기한 적 있어요.

청주에서 서울 가는 고속버스를 탔는데 맨 뒷좌석 말고는 빈자리가 하나뿐이었어요.

그 자리에 딱 앉는 순간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어요.

옆에 앉은 여자에게 차가운 느낌이 났죠.

속으로 이 여자 무당 아니면 뭔가 이상한 짓 하는 여자구나 하는 느낌이 왔죠.

그 여자도 뭔가 느낌이 왔는지 안절부절못하고 막 식은땀을 흘리는 거야.

십 분이나 됐을까, 아저씨 뭐 하시는 분이시냐 하길래 댁은 뭐 하는 분이냐 물었죠.

자기는 무속인이래, 그래서 난 천주교 신부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우리 둘은 한자리에 앉아서 못 가는 처지니 나한테 남자니까 뒤로 가래요.

그래서 싫다, 자매님이 뒤로 가라 했는데 결국 어떻게 된 줄 아세요?

휴게소 있잖아요, 거기서 그냥 내려버렸어.

기사한테 자기가 알아서 갈 테니 그냥 가라고.

그 차 안에 성령이 가득 찬 사제가 같이 있는 것이 숨이 막히고 죽을 지경으로 힘든 거지요.

 

개나 고양이와는 다르게 인간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요.

그 능력은 뭐냐 ‘신접의 능력’이 있어요.

신을 접하는 능력을 신접 능력이라고 그래요.

신접은 두 종류예요.

마귀를 접하는 것도 신접이고, 또 성령을 접하는 것도 신접이에요.

무당이 굿할 때 가장 큰 것이 내림굿인데 그때 마귀가 무당에게 내려와요.

마귀도 능력이 있어요. 기가 막히게 알아맞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거기 빠지는 거예요.

우리는 세례 때 뭘 받는다고요? 성령을 받아요.

성령이 이제껏 살면서 지었던 모든 죄뿐 아니라 받아야 할 그 벌까지도 다 사해 주신 거죠.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은 마귀도 분명히 알아봐요.

 

그래서 내가 피정 끝날 때는 항상 어떤 말로 끝나요?

쪼림이 말해보세요. ‘침묵하라.’

그 이유는 뭐예요? ‘어둠이 침범 못 하게 하려고.’

피정하고 얼마나 기쁘게 변화됩니까? 눈물 흘리며 완전 천국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동네 마귀들은 여기서 피정하는 줄 알고 몇 달 전부터 비상 대책 회의하죠.

그리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피정하고 나오는 인간들 어떻게 하면 고꾸라뜨릴까 수단 방법 안 가립니다.

남편을 통해서도 공격할 수 있고 자식을 통해 공격할 수도 있고 믿었던 대녀를 통해서 공격할 수도 있다.

그러니 피정 끝나고 나가서 일주일 동안은 누가 시비를 걸더라도 침묵하라 했죠.

그리고 성경을 읽든지 말씀을 계속 들으라 했어요.

그러면 ‘아, 이거 단단히 변해서 왔구먼.’ 하며 마귀가 뒤로 물러난다 이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정 후 아파트 문 열고 들어가면서 남편이랑 싸워 넘어간 거예요.

그날 눈물 콧물 흘리면서 은혜받은 것 다 어디 갔냐 이거예요.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마귀가 알아봐요.

그래서 유혹이 올 수도 있어.

우리 레지나 자매님도 오늘 세례를 받았는데, 갑자기 ‘내가 왜 받았지?’ 하는 분심이 들 수 있어요.

그럴 때는 이게 신부님이 이야기한 이게 마귀 장난이구나 생각하면서 ‘마귀야 당장 물러가라’ 하면 딱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살다 보면 세례받았기 때문에 집안에 일이 생기는 건 아니거든요.

더 좋은 일만 생기지.

그런데 세례받았는데 혹시 애가 뭐 좀 다쳤어, 이거 내가 세례받아서 다친 건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 마귀의 소행이라는 거죠.

거기에 흔들리면 안 된다는 얘기예요.

세례 안 받았어도 다칠 수 있는 거예요.

맞죠? 그렇죠?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몇 가지가 있어요.

지금 얘기할 테니까 본인에게 해당하는 게 있나 생각해보세요.

만일 아무것도 해당하는 것이 없다면, 지금 성령이 주무시고 계시는 겁니다.

활동 못 하고 계신 거예요.

 

첫 번째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어요.

담대해지고 영적으로 깡다구가 생겨요.

‘그래 너 고통 이놈아 올 테면 와봐. 내가 너한테 안 져. 죽음 너 나한테 오려면 와 봐.’

영적으로 배짱이 생겨요.

우리들이 살면서 당하는 두려움은 크게 네 가지라고 해요.

첫 번째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두 번째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요.

물질이나 권력, 사랑하는 혈육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

세 번째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네 번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하면 떠오른 것이 순교자들이죠.

세상에 말 한마디만 하면은 살 수 있었을 터인데, 십자가에 침 한 번 뱉으면은 살 수 있었을 터인데,

밖에선 애들이 ‘엄마 거기다가 침 뱉고 와.’

어린 자식들을 놔두고 어떻게 배교 안 하고 죽을 수 있었을까, 무슨 힘이 순교할 수 있게 하셨을까?

그 상황이 지금 나한테 닥친다면 과연 순교할 수 있을까?

이렇게 4대의 두려움, 세상에 대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두려움, 고통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이 죽을 때까지 겪는 두려움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성령이 함께하면 이 네 가지 두려움을 이겨낸다 이거예요.

두려움이 올 때마다 나는 정말 용기 내어 극복하고 살았는가?

그렇다면 성령이 함께하시는 거예요.

 

두 번째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이 생겨요.

그래서 모든 것에 앞서서 하느님이 첫째 자리가 되죠.

내가 수천 번 피정 때 했던 얘기, 믿음이 뭐라 했죠?

‘죽기까지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사는 것’

옳거니, 이렇게 아는 것은 나보다 다 선생이 되었어요.

손가락 하나 잘라주기까지가 아니라, 죽기까지 첫째 자리에.

하지만 실제로 여러분들이 첫째 자리에 늘 하느님이 계시는가.

아픈 내 몸뚱아리가 첫째 자리에 있을 때가 있고, 속 썩이는 자식이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있을 수 있고,

어느 때는 돈이 윗자리에 있을 수 있죠.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갈등을 겪고 살아요.

그러나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는 천지 차이 아닙니까?

자식에게 축복을 달라고 하면서 하느님은 자식 밑으로 내려가면 축복이 자식에게 갈까요?

안 가요.

비는 위에서 밑으로 뿌리지 땅에서 거꾸로 올라가는 비는 없어요.

하느님이 첫째 자리에 딱 좌정하고 앉아 계실 때 그 밑에는 은총의 비를 받는 거예요.

하느님을 밀어내고 물질을 올려놓고 새끼를 올려놓고 내 몸뚱이, 내 취미 생활을 올려놓고.

어떤 사람은 일요일 취미 생활 때문에 성당 못 간대요.

나중에 늙어서 취미 생활 못 할 때 그때 가겠대.

내 속으로 ‘이 인간아 그전에 너 꼴까닥 해. 하루하루 사형수인 거 모르니?’

저녁에 잠들고 아침에 눈 뜨는 것이 기적이에요.

이 대한민국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한밤중에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이 수백 명이에요.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아무도 장담 못 해요.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다 두는, 다시 말하면 순도 100%짜리 신앙을 지향해야 한다는 얘기죠.

지향해야죠. 도달하지 못하고 죽을 수도 많아요.

그렇지만 적어도 노력은 해야죠.

그런데 희한하게 순도가 떨어질수록 더 반짝거려요.

24k보다는 18k가 더 반짝거려요.

요란만 떤다는 뜻이에요.

무늬만 금이지 사실은 안에는 불순물이 들어가 있는 거죠.

순금은 덜 반짝이고 무겁죠.

무겁기에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뿌리를 내려요.

순도 100%짜리 신앙, 하느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 이것이 성령이 함께하시는 증표이고,

그러면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데 혼신의 힘을 다할 수밖에 없어요.

이 좋은 하느님을 예수님의 유언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릴 수밖에 없어요.

‘주님 지혜를 주세요. 제가 말을 잘 못 해요.’

‘시누에게 천주교를 알리고 싶은데 시누가 나보다 훨씬 더 말을 잘해서 얘기하다 보면 내가 자꾸 밀려요.

지혜를 주세요. 분별력을 주세요. 당신이 얼마나 사랑 자체인지 우리 가족들이 알게 도와주세요.’

성령께 청하면 그대로 됩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언변이 내 입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 충만한 어떤 할머니들은 시장 바닥에서 채소 팔면서도 대학교 교수 그것도 문학 박사를 끌고 교리반에 가요.

자기 이름도 못 쓰는 할머니인데요.

언문도 못 깨친 할머니가 성경을 읽다가 언문을 깨친단 말이에요.

이것은 성령의 역사죠.

그 힘이 어디서 나왔겠어요.

성령이 함께하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뜻이죠.

 

세 번째 성령 받은 이의 특징 말에 대한 분별력이 생겨요.

‘말에 대한 분별력이 생긴다.’ 풀이하면 뭡니까?

반드시 해야 할 말은 하고, 절대 해서 안 되는 말은 복에 칼이 들어와도 침묵해요.

이게 바로 분별력이에요.

하지만 많은 사람이 거꾸로 살죠.

반드시 해야 할 말은 두려워 움츠러들고 못 하고, 참으면 자기 덕이고 축복이 될 것을 말을 해서 사람에게 상처를 주죠.

 

혓바닥이 어딨어요? 이 안에 있죠?

내가 우스개 반, 농담 반으로 옛날에 피정할 때 그런 얘기 한 적 있죠.

야훼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진흙으로 다 빚으시고 제일 고민하셨던 게 혓바닥이래요.

하느님은 아셨어요.

혓바닥 하나 놀리면 집안이 뒤집어지고 나라가 뒤집어지고 교회가 뒤집어진다는 걸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 혓바닥을 어디다 붙여놓을지 고민이 많으셨죠.

처음에는 겨드랑이 밑에다 붙여놓으셨대.

그런데 걸을 때마다 걸리적거려. 이것도 자리가 아니구나.

두 번째는 등에다 붙여놨대요.

옷 입을 때마다 혓바닥이 뒤집어지네. 이것도 그 자리가 아니구나.

그래서 열심히 하느님께서 기도하시다가 찾아낸 최고 자리가 목젖이죠.

그러고도 불안해서 담을 치셨죠. 이빨로.

그러고도 불안해서 두꺼운 가죽을 하나 댔죠. 그것이 입술이죠.

이렇게까지 하셨는데도 우리는 침 튀어가며 남 이야기하느냐 정신없죠.

성령이 함께하시는 사람들은 말에 대한 분별력, 말을 컨트롤할 수 있어요.

해야 할 말은 반드시 하고, 그것도 상대방이 상처 안 받게요, 그렇죠?

너무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사람 상처받잖아요.

그래서 말을 전할 때 내가 어떻게 전해야 할까 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는 거예요.

상대방도 들으면서도 고맙다는 마음이 들어야죠.

‘저게 나를 개무시하네, 지는 얼마나 잘나서’ 그러면 싸움이 되는 거예요.

말 안 하는 것만 못하게 되는 거예요.

‘나 같으면 눈을 부라리면서 이야기할 텐데, 어떻게 저렇게 온유하게 나를 깨우쳐줄까,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것은 성령이 도와주셔야 한다는 얘기예요.

혀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도 있고 혀로써 썩은 냄새를 풍길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성령이 함께하면 자기 꼴을 찾게 합니다.

‘꼴값’이라는 얘기를 아마 피정 때 했는데, 사전적인 의미로 꼴값은 참 좋은 뜻이에요.

‘자기 꼴에 값을 한다.’ 그 뜻이에요.

여러분 저한테 한번 해보죠.

‘신부님 참 꼴값하십니다.’

그거 되게 좋은 말이라니까요.

‘우리 선생님은 참 꼴값하시는 선생님이야.’라는 말은 정말 선생님답다는 말입니다.

사제의 꼴이 있고 군인의 꼴이 있고 교사의 꼴이 있죠.

수녀의 꼴이 있고 주교의 꼴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좋았던 말이 지금은 나쁜 의미로 쓰이죠.

우리는 좋은 의미의 꼴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사제를 사제답게 하는 힘이에요. 수녀를 수녀답게 하는 힘입니다.

신자를 신앙인답게 만들고, 봉사자를 봉사자답게 만드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사제도 그냥 직업인이 되는 거야.

신자들은 신부님들을 볼 때 아주 예민하게 느끼죠.

우리 신부님이 기도하는 사제인지, 강론 준비 철저히 하는 사제인지 신자들은 알아들어요.

어떤 강론은 5분을 해도 지겨운 것이 있고, 어떤 강론은 30분을 해도 짧게 느껴지는 강론이 있어요.

강론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퀄리티, 질의 문제예요.

 

그리고 지금 생각난 것인데 하나 더 하면, 다섯 번째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은 늘 기쁘게 살아요.

어떤 고난과 고통이 오더라도 담대히 합니다.

앞의 4개를 늘 잘하고 살기 때문에 기쁨이라는 결과물을 얻어요.

앞에 있는 그 4개를 늘 하고 살기 때문에

그렇기에 주눅이 들거나 인상 쓰거나 자기 힘들다는 것을 사람들한테 알아달라고 하지 않아요.

본당 신부 할 때 보면 참 열심이고 늘 웃고 얼굴에 기쁨이 충만한 분이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집 사정을 들어보면, 남편은 알코올 중독자에 시어머니 똥오줌 치고 있고

큰 애는 교도소에 가 있고 웃으면서 다닐 상황이 아니야.

하지만 억지로 웃는 웃음이 아니에요.

끝까지 하느님 붙들고 성령이 충만한 거예요.

 

지금 성령이 충만한 사람의 특징 다섯 가지 얘기했어요.

첫 번째 두려움이 없다.

두 번째 하느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다.

세 번째 말에 대한 분별력이 생긴다.

네 번째는 자기의 꼴, 무너져버린 자기의 꼴을 찾는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늘 기쁘게 산다.

 

이제 결론을 얘기하겠습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즉, 성부와 성자에게서 뿜어나오는 힘이요, 기운이요, 사랑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하는 힘이고 성자를 성자답게 하는 힘이지요.

그래서 결론은 뭐냐?

우리 역시 우리에게서 성령을 빼버리면 허수아비입니다.

사제건, 수도자건, 주교건, 추기경이건, 교황이건 성령을 빼버리면 그냥 헛껍데기, 아무것도 없어요.

 

두려움 없이,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혀를 다스리면서, 자기 꼴을 찾으면서,

기쁘게 성령과 함께 사셨던 수많은 성인 성녀들을 우리는 묵상해야 합니다.

이따 미사 후 십자가 보목 친구하신 후 2층에 올라가 성인 유해 앞에서 단 몇 분이라도 전구 청하십시오.

‘힘을 주십시오. 제가 지금 이런 고통 중에 있습니다.

제가 아픕니다. 치유해 주세요.

그러면 정말 몇 배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느님 증거하겠습니다.’

 

우리 성인들의 삶을 본받아 두려움 없이, 

하느님 첫째 자리에 모시고, 혀를 다스리면서, 자기의 꼴을 잡으면서 기쁘게 사는 것,

이것이 성령 강림 대축일 사제의 입을 통해 여러분에게 하시고 싶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2023년 성령 강림 대축일 (5/28)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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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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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3.06.06 아멘!감사합니다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3.06.06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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