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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신부 강론

[구약 묵상 시리즈 참고] 신약의 성요셉 이야기/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신부

작성자하늘호수♡마리아|작성시간24.04.02|조회수148 목록 댓글 3

◼마태오 1,16.18-21.24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또 요셉 축일을 맞으신 분들 축하드립니다.

 

이야기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안 한 것 같기도 하고,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여러분의 기억력도 아주 썩 좋지 않으시다는 것을 제가 잘 알기 때문에 부담 없이 합니다.

 

내가 어느 시골 본당에 있을 때 전직 조폭 출신 한 형제가 회두하여 교리를 배우고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어요.

내가 요셉이라고 줬죠.

가끔 술 한 잔을 같이 했는데, 좀 얼큰하게 취하면 아주 엉뚱한 질문을 그렇게 잘해요.

술맛이 싹 달아나게.

이 친구가 자꾸 똑같은 것을 질문하는데, 첫 번째, 두 번째는 제가 대답을 좀 시원찮게 했는지 고개를 갸우뚱,

세 번째 또 질문을 하길래 좀 쉽게 설명하니 고개를 끄덕였어요.

질문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을 읽어보면 마리아께서 남자 없이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낳으셨다고 하는데 그건 그냥 믿어주겠대요.

자기가 안 믿으면 어떡할 거예요?

그러면서 ‘그러면 요셉은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에요?’

자기도 세례명을 요셉으로 받았지만 이럴 수 없대요.

인간이 부부로 한방에서 한 이불 덮고 자면서 서로 동정을 지키면서 산다는 게 말이 됩니까?

자기는 이걸 못 믿겠대.

이것은 뭔가 꾸민 것 같으니, 신부님이 속 시원히 얘기해달라는 거예요.

여러분 같으면 이런 질문받을 때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처음과 두 번째는 내가 대답하고도 좀 궁색했어.

그래서 세 번째 술 마실 때 이 사람 분명히 술에 취하면 또 물을 거라 여겨 준비해 갔죠.

그리고 내 얘기 듣더니 아주 확실히 믿었어요.

여러분들은 누가 이렇게 질문하면 어떻게 설명하세요?

 

여러분도 세례받기 전에는 ‘이게 가능한 일일까 한방에서 서로 살냄새 맡으면서 살아가는데,

인간 기본적인 욕망이라는 게 있는데, 이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드실 수 있어요.

그러다 ‘아유 내가 무슨 못된 생각을 하고 있지?’ 하면서 스스로 생각을 지울 수도 있었겠죠.

그래서 저는 이론적으로 설명해야 설명하는 사람만 어렵고, 역사에 나타난 동정 부부에 대한 예를 들어줘야지 생각했어요.

그래서 샤를르달레 신부님이 쓰신 아주 감격스러운 이야기만 모아놓은 한국천주교회사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을 읽으며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이야기를 아주 내가 재미나게 해드렸죠.

 

여러분들 ‘호남의 사도’가 누군지 혹시 기억나세요?

전주 시내에 산이 있는데 그 산 이름이 치명자산이에요.

그 맨 위에 가면 조그만 성당이 있고 호남의 사도라고 불렸던 유항검 일가 순교자 7위의 고결한 신앙이 살아 숨 쉬고 있는

호남지방의 대표적 성지가 바로 전주의 치명자산이에요.

저도 몇 번을 올라갔어요. 치명자 유항검 일가 7명을 기리는 순교지입니다.

그 꼭대기에 보면 가족 합동묘가 있어요.

유항검과 그의 처 신희가 묻혀있고, 아들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동정 부부, 둘째 아들 유문석의 시신이 묻혀있고,

조카 유성의 뼈와 제수였던 이육희, 이렇게 7분이 모셔져 있죠.

 

그러면 이순이 루갈다는 어떤 사람이었느냐? 왕족의 후손이에요.

그 남편이 될 유중철 요한의 아버지 유항검이 호남에 가부로 출신은 미약하나 돈이 많았죠.

그래서 그냥 궁궐만 한 집을 짓고 그 수많은 방이 바로 호남 사람들 교리방이 됐던 거예요.

이순이 루갈다는 1795년에 주문모 신부님에게 세례를 받아요.

처음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가 프랑스 선교사나 미국 선교사가 아니고 중국 선교사인데, 그 중국 신부님의 이름이 주문모예요.

조선의 천주교는 중국을 통해 들어왔죠.

루갈다가 세례받았을 때 14살이었는데, 세례받고 성체를 모시면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죠.

14세의 이 어린 소녀는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어 동정의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는 시집 안 가고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됐어요.

반드시 출가하여 제사를 지낼 장손을 낳고 가문을 이어가야 하는 조선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는 여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죠.

이런 고결한 결심을 들은 주문모 신부님은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가 있었어요.

언젠가 그 사람의 입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나도 동정을 지키면서 살고 싶다.’ 그게 누구냐? 유항검의 장남인 유중철 요한.

그 말이 기억난 겁니다.

그래서 비록 출신은 달라도 주문모 신부님은 이순이 루갈다와 유정철을 맺어줍니다.

혼배성사를 준 거죠.

처음에 이순이 집안에서는 당연히 난리가 났었죠.

전주 이씨, 왕족의 후손인데 살긴 한양에서 살았어요.

지방 부자와 결혼을 완강히 반대했지만, 루갈다의 엄마 권 씨의 설득으로 집안에서도 마침내 허락하고 말아요.

그 얘기까진 안 했겠죠.

‘급이 낮은 아무개랑 살려고 하는데 동정으로 살 겁니다.’

이 얘기했다가는 집안에서는 말도 안 되죠.

아무튼 그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는데 어머니 권씨의 역할이 굉장히 컸습니다.

세상을 뛰어넘은 어린 소녀 이순이와 피 끓는 청년 유중철 동정 부부,

또 신분을 넘어서 신앙을 택한 그 어머니 권씨,

또 아들 부부의 동정의 삶을 뻔히 알고도 허락했던 시부모였던 유한검과 그의 아내 신희.

대체 천주님은 어떤 분이시길래 이런 일들을 성사시키셨을까?

이런 일들을 루갈다의 어머니가 하느님의 힘이 아니면 할 수가 없었던 일이었고,

호남의 부자 유항검은 아들과 며느리가 한 방에 살지만 절대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결혼을 시켰단 말이에요.

하느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려고 이렇게 엄청난 사건을 이 두 집안에 벌려주셨는지 신비하기만 하죠.

 

14살에 시집온 이순이 루갈다는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늘 겸손하게 집안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결혼해서 4년 동안 살다가 죽었지만, 그 집안이 화기애애하고 훈풍이 돌게 하는 정말 착한 며느리,

성실한 며느리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 며느리가 들어오고 난 다음부턴 하인들 사이에서도 웃음꽃이 피고, 어른들 사이에서도 웃음꽃이 피었다고 그래요.

호남지방의 복음화에 요람답게 많은 사람이 드나들면서 이곳에서 교리를 배우고 천주님을 알았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유항검하면 ‘호남의 사도’라는 말이 자동으로 따라 나가요.

그리고 그 아들 며느리가 동정 부부로 순교했다는 것도 또 따로 나가요.

아무튼 치명자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유항검 일가 7인의 합동묘, 순교의 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동정부부로 살기로 결심하고 결혼했어요.

그리고 루갈다는 둘이 있을 때는 오라버니라고 불렀대요.

그리고 이순이 루갈다가 제일 존경하는 여인이 아가다 성녀였대요.

항상 해지고 잠자리에 들 때가 서로가 아주 긴장이 됐다고 그러죠.

루갈다 성녀가 쓴 옥중 서안을 보면 4년 부부의 연을 맺고 살면서 10번 큰 유혹이 있었대요.

동정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육신의 유혹.

그럴 때 되면 신랑은 문을 박차고 나가 우물물을 떠 머리에 끼얹었대요.

음욕이 사라지게 하려고.

아무튼 그렇게 어려운 고비를 10번을 넘기면서 루갈다는 그럴 때마다 쇠로 된 십자가를 꼭 쥐었다고 해요.

그러면서 둘이 같이 생각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음욕을 가라앉혔다고 그래요.

나중에 누가 묘를 팠고 거기서 십자가가 나왔는데, 뭉그러진 십자가가 나왔대요.

얼마나 십자가를 세게 쥐었으면, 그 쇠로 된 십자가가 찌그러질 정도로. 유명한 얘기죠.

루갈다 묘에서 나온 뭉그러진 십자가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한 얘기예요.

박물관에 가면 있어요.

4년 동안 부부 생활하면서 10번의 큰 유혹.

피가 끓는 젊은 동정 부부의 삶이 어찌 생각만큼 쉬웠겠습니까?

루갈다의 옥중서간에 그때 마음을 뭐라고 표현했느냐?

‘마음 두렵기가 얇은 얼음 위를 걷는 듯했고, 깊은 물가에 서 있는 듯했다.

그때마다 십자가를 쥐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른다.’

십자가를 쥐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으면 묘소에서 발굴된 철제 십자가가 뭉그려졌을까?

그 뭉그러진 십자가 속에 녹아있는 이 동정 부부의 끓는 피, 또 유혹, 기도, 눈물, 한숨, 땀, 뜬눈으로 지새우는 무수한 밤.

서로가 서로를 달래면서 4년 동안을 살았겠죠.

‘우리 이러면 안 되잖아. 우리 이 고비만 넘기자.’

이러한 유혹의 산을 하나하나 넘을 때마다 그 두 부부는 향주 삼덕이 커졌습니다.

향주삼덕과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은 두 개의 백합꽃이 되어 그 백합 향기가 동정 부부의 묘로 바뀐 겁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호남의 사도 집안은 풍비박산 납니다.

시아버지도 끌려가 죽고 시어머니도 끌려가 죽고 남편이 먼저 끌려가 1년 먼저 죽죠.

루갈다는 옥에 갇혀 있으면서 간수의 눈을 피해서 글을 씁니다.

그게 바로 ‘옥중서간 루갈다 일기’입니다.

숙제를 내드립니다. 찾아서 한번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똑똑한 여인이었고 왕족이었으니 얼마나 교육을 많이 받았겠습니까?

편지를 피로 쓴 편지라고 얘기합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도 유명하고, 황사영 백서도 유명하지만, 이 책은 정말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책입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옵시다.

술만 먹으면 나한테 시비 걸었던 그 조폭 출신 형제에게 내가 공부한 것을 술 먹으면서 리얼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형제가 술잔을 들고 울고 있더이다.

그래서 얘기가 다 끝나고 난 다음에 ‘믿겠니?’ 하니, 제 앞에 무릎을 꿇더니 ‘요셉 성인 의심한 것 용서해 주세요.

고백성사 주세요.’

 

이 동정 부부는 누구의 삶을 본받았던 거죠? 마리아와 요셉이에요.

14살, 16살의 부부.

그 젊은 사람들이 아예 시집 장가가기 전에 지금으로 따지면 수사님, 수녀님이 되겠다 했으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그 당시 풍습으로는 혼자 살 재간이 없었어요.

중간에 주문모 신부님이 다리를 놓고,

친정엄마가 뒤를 밀어주고 집안을 설득하고,

유항검은 장손이 끊기는 것을 알면서도, 동정 부부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는 것.

얼마나 큰 하느님의 신비입니까?

사람이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해도 그렇게 마음대로 못 하잖아요.

그것이 돈 가지고 해결이 될 일입니까? 아니죠.

우리 한국교회 여러분들의 선배들은 정말 자랑스러운 선배들이 많아요.

전 세계 어디를 내놓아도 이런 동정 순교자 없어요.

유일하게 한국에만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산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죠.

 

요셉 성인의 삶은 참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해줍니다.

부부로 한 방에 살면서 서로 동정을 지킨다는 것이 말은 안 되지만, 말이 돼요.

한국교회에 이렇게 우뚝 솟은 동정 부부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동정 부부 이야기는 그리스도교에서 갈라져 나간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없어요.

전 세계에서도 없어요.

여러분들 사제, 수도자들을 한번 보십시오.

사제의 독신제가 위대한 것은 사제들이 신체적으로 어디 결함이 있기에 혼자 사는 게 아니죠.

예수님이 아무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마태오복음에 태어날 때부터 고자로 태어난 사람이 있고, 살다가 사고가 나서 고자가 된 사람이 있고,

세 번째 하느님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세 번째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허락하셔야 한다.

사제 수도자들은 바로 이 세 번째죠.

그래서 신학교 입학할 때 몸에 핸디캡이 있으면 입학이 안 돼요.

아주 건강한 청년이 조건이죠.

사제가 고자이고 수녀들이 아기만 못 낳는 여인이 아니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증언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독신으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힘 있는 하느님 증명 방법이 뭐냐? 사제 독신제예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사제가 사제복을 입고 지나다니면 어떡합니까?

한번 힐끔 쳐다보죠.

어디 식당에 가서도 사제복 입고 밥을 먹으면 쳐다봐요.

‘신부님이 맞지?’ 대개는 알죠.

그러면서 ‘신부님이 결혼 안 할 거야, 그런데 왜 안 하지?

허우대는 멀쩡하게 생겼는데, 무슨 힘이 저분을 저렇게 혼자 살게 할까? 뭐가 있긴 있나 보다.’

그래서 사제의 독신제는 강한 하느님 증명 방법이에요.

사제가 다니면 많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다녀요.

 

지난 주일 미사 끝나고 12시 반에 바이크 30여 대에 사람 한 40여 명 모여서 ,내가 성수 뿌리고 수단 입고 축성해 줬어요.

신자는 그중에 한두 사람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내가 사인한 성경책 하나씩 나눠줬어요.

내가 그날 그랬습니다.

이 성당이 청주에서 제일 오래된 성당인데 88년 이래 이렇게 오토바이가 많이 들어온 것도 처음이다.

한국에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이 많은데 여러분들은 특별히 선택받아서 온 사람들이다.

신자 아닌 사람들도 사제를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가 ‘신부님은 욕심 없이 오로지 양들을 위해서 살 수가 있다.’입니다.

수도자들의 독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체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거죠.

 

요셉은 순명하는 분’이 분명합니다.

정말 죽기까지 순명하신 사람이었죠.

순명은 기적을 낳았습니다.

순명은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일단 ‘네’ 하면 뭐가 일어나느냐? 치유가 일어납니다.

일단 순명하면 구마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해방됩니다.

그리고 영적 명예를 하느님께서 순명하는 자에게 내려주십니다.

 

세 번째로 요셉은 침묵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침묵은 하나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침묵은 자기 삶을 뒤돌아보며 쓸데없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완덕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 바로 침묵이 주는 힘입니다.

요셉은 철저하게 침묵했습니다.

비밀이죠. 요셉한테 천사가 나타났잖아요.

요셉만큼 사실 인간적으로 볼 때 기구한 남자도 없어요.

자기 자식도 아니잖아.

처음에는 남모르게 파혼하려다 천사가 나타나 ‘성령의 힘으로 잉태한 것이니 네가 보호자 노릇 해 줘.’라는 말을 듣고

그 후에 요셉은 어디 가서 한마디도 말 한 적 없어요.

침묵하는 남자였어요.

하느님과 약속한 것을 지키는 사람이었지요.

입이 싼 사람은 절대로 완덕으로 못 나갑니다.

필요 없는 얘기 많이 떠들고 다니는 사람은 침묵의 신비를 못 느낍니다.

 

네 번째로 요셉 성인을 보면서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묵상해야 할 묵상 주제는 이것입니다.

요셉은 이 세상 어느 남자보다도 할 말이 많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정말 마음고생 많이 하신 분이에요.

이런 요셉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제일 큰 선물이 뭘까요?

예수님이 요셉의 임종을 지켜보게 한 겁니다.

유일하게 요셉은 예수님이 임종 지켜보는 자리에서 숨을 거두셨어요.

우리들이 이 세상 떠나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자리를 지켜주시면 얼마나 행복하고 든든할까?

위험한 순간마다 임종하는 요셉의 머리맡에 아들 예수님이 지켰듯이.

그래서 요셉 성인은 그것 하나 가지고도 보답을 다 받으신 거죠.

그 후에 요셉 성인하면 떠오르는 게 뭡니까?

임종하는 이의 주보 성인, 또 ‘가정을 지키는 주보 성인’이 되셨죠.

지금처럼 가정이 깨지는 시대야말로 요셉 성인이 우리에게 보여줬던 완덕을 우리들도 따라 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오늘 요셉 축일 강론을 마무리하면서 여러분들이 이것을 기억합시다.

첫 번째, 인간의 힘으로는 부부지간에 동정을 지킬 수 없지만, 하느님의 힘으로는 동정 부부도 가능한 거다.

마찬가지로 요셉과 마리아도 역시 얼마든지 동정으로 살 수 있을 거다.

개신교에서는 그런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성모님이 어찌 동정이냐?

예수님이 어느 집에 가 있을 때 성모님과 그의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그랬죠.

그때 얘기하는 형제는 같은 아버지 같은 어머니 밑에서 난 그 그런 자식이 아니라 그랬죠.

그리스 말로 ‘아델포이(ά́δελφοι)’와 ‘아델포스(αδελφός)’와 전혀 다른 뜻입니다.

사촌 육촌한테 쓰는 말은 아델포스, 피를 나눈 내 동생한테 쓰는 말은 아델포이죠.

그런데 그것을 한국말로 번역하니까 ‘형제’라고 쓴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성모님의 동정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몰라서 하는 얘기죠.

 

두 번째로 요셉은 하느님께 순명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순명은 기적을 낳는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세 번째로 요셉은 침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침묵하면서 지키는 사람.

우리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하느님께서 ‘너만 알고 있어라.’ 했던 것을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많았던가 뒤돌아봅시다.

하느님과 나만의 비밀이었던 것이 왜 없겠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늘 치유시키고 구마시키시고 난 다음에 그 인간 밖으로 내보내기 전에 마지막이 뭐예요?

함구령, 말하지 마라.

 

네 번째로 요셉 성인이 돌아가실 때 예수님이 지켜줬던 엄청난 은혜를 우리도 받을 수 있도록

‘주님, 제가 임종하는 자리에 주님께서 제 옆에 계신다면 얼마나 마음 든든하고 행복하겠습니까?

주님, 감히 청할 자격은 없지만, 그날 그 시간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한 번은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때 주님,

당신이 양아버지 옆에서 양아버지를 지키셨듯이 제 옆에서 계셔주시길 간절히 청합니다.’하는

마음 기도를 하도록 합시다.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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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04.03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1만두 | 작성시간 24.04.03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아멘.
  • 작성자바람의노래 | 작성시간 24.04.08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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