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정인준 신부 강론

12월 30일 주일 성가정 축일 ( 가정 성화 주간)“가난했던 그러나 사랑의 가정”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4.12.29|조회수118 목록 댓글 3

성가정 축일 /가정 성화 주간

 

제1독서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아버지를 공경한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3,2-6.12-14<또는 1사무 1,20-22.24-28>
2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3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4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5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6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12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13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14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생활>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12-21<또는 1요한 3,1-2.21-24>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13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17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18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19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20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21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부모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52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가난했던 그러나 사랑의 가정”

 

제가 아는 한 가정의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입버릇처럼 자기는 아이를 낳으면 모유를

먹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병원에서 아이를

낳자마자 바로 인큐베이터에서 우유를 먹였습니다.

 

뒤 늦게 그 아이 엄마가 자신은 모유를 먹이겠다고 해서 우유를 중단하고 모유를

먹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모유를 먹는 것이 쉽지가 않다고 하네요. 그 아기는 우유를

먹어보아서 쉽기 때문에 엄마 젖은 안 먹으려고 보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의 사랑과 노력으로 모유를 먹고 잘 자란다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이 알고 있지만 엄마의 초유는 영양분도 그렇지만 병에 대한 저항을

갖고 있어서 아이가 병에서 이길 수 있는 힘도 길러준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왜 아침부터 본당신부가 ‘젖 타령’이이냐고 의아하실 수 있습니다.

지난 우리의 추억은 아이와 엄마는 젖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도 하느님 앞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어미 품에 안겨 있는.’

또는 ‘어미 품에 있는 젖먹이 아이처럼’라는 표현을 썼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식과 부모를 잇는 가장 큰 관계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와의 관계 가족들간의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정을 ‘인생 최초의 학교.’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동서양을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부모에 대한 효도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바로 어버이에 대한 사랑과 효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 사는 사회에서는 서로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가정 축일입니다. 우리는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 받으려고 하고 이습니다.

그런데 나자렛을 가정의 표양으로 삼으라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요?

 

성가정이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평화롭고 예수님의 가정 답게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모처럼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부모는

잃어버린 자신의 아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그를 발견하고 부모는 반가움도 있지만 원망의 목소리로

‘얘야, 왜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것이냐?’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전혀 다른 내용읠 설명을 듣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십니까.”‘라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영역이 아들과 인간의 차원의 부모 사이에는 갈등을 엿보입니다.

가정의 본 모습이 어런 것 아닙니까? 서로가 같기 때문에 가정인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지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가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하느님의 아들이고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들이지만

나자렛에서 ’순명‘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성가정의 어려움을 또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지금으로 말하면 막노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직업이 목수라고 하지만 일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생활이 그렇게 넉넉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제일 민감하게 오는 것은 바로 생계에 대한 의무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의 가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으로는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 세상에 제일 서러운 것은 가난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바로 가난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성 가정의 가장 큰 모습은 바로 하느님 중심의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가정이야말로 가난하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고 서로의 갈등을 묶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나자렛의 성 가정 대축일을 맞이하며, 부모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이 자리에 있게 하신 분들은 바로 우리의 부모, 아버지 어머니라는 사실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고국에서 가난에 쪼들리고 전쟁에 피난살이 하던 그 부모님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생각하기도 싫었던 꾀죄죄한 우리의 부모님이 안 계셨더라면

우리의 지금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가정 축일을 맞는 우리는 먼저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는 오늘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가난했지만

정직했던 부모님을 갖고 있는 지금의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어제 우리 본당의 청년들이 송년 파티를 열었습니다.

우리 김신부와 저도 초대를 받았습니다.

한 말씀해달라고 해서 청년들이 귀가 닳도록 들어왔던 ‘옛날에는 말이다.’로 시작하는

가난하고 고생했던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터전 위에 청년들이

이 땅에서 희망을 키우라고 했습니다. 몇 몇 청년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와서 그런 말씀에

대한 고마움을 아주 서툴게 표현해서 저도 사실 기뻤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셨던 가난, 순명, 하느님 사랑의 길을 우리도 가야합니다.

무엇보다도 가난했지만 비굴하지 않았던 그리고 올바르게 살아오려 했던

우리의 부모님과 삶고 우리의 삶을 이 땅에 심고 젊은이들이 그 처전에서 희망을

가꾸게 해야 합니다.

너무 어둡고 심각한 분위기의 말씀을 드렸나요?

제가 알고 있는 강원도 한 산골의 한 가정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아이들만 여덟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저에게 들려주었는데 몇 번이나 웃었고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또 하나의 저의 이야기 이기 때문입니다. 식사할 때는 가관입니다.

 

큰 양푼에다 밥에다 감자를 쌓아두고 온 식구가 그 둘레에 앉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 밥은 바로 산과 같이 높지만 입이 여러개라 순식간에 먹어치웁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행복하고 그것을 듣는 저도 웃었습니다. 제가 그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잠 잘 때가 더 가관입니다. 커다란 이불이 하나입니다. 거기에 형도 누나도

누이도 함께 잠을 잡니다. 그런데 자다가 추운 겨울에 밖에 나가 오줌을 누고 들어옵니다.

 

사방이 캄캄해서 마당 한 켠에서 그냥 누고 들어옵니다. 들어와 보면 잠자던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지 알아요? 발을 하나 형과 누나 사이에 집어 넣고 날싸게

들어가면서 몸을 흔들면 자리가 하나 생기고 그 안에서 아침까지 자는 것입니다.

 

더 웃기는 이야기 할까요? 아침에 일어나면 일어나는 순서대로 양말을 신습니다. 제

일 먼저 신는 아이는 그래도 온전한 양말을 신습니다. 맨 나중의 아이는 발꿈치가 다 나간

양말을 그래도 좋다고 신고 학교에 가야 합니다.

 

곁들어 더 웃기는 이야긴 하나 더 할까요?

지금처럼 우리가 씹는 껌이 아닙니다. 그래도 대대로 내려오는 껌이 있습니다.

매일매일 커지는 껌 이야길입니다. 껌을 씹다가 아무도 못 씹게 침을 뱉고 벼개를 고이고

높이 붙여놔도 일어나서 먼저 씹는 아이가 임자입니다. 그런데 그 그 껌이 커지느냐면

벽에 붙였는데, 벽지까지 붙어서 떨어지고 떼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산골의 이야기이지만 어디선가 들었던, 아니면 내 자신이 그곳에 있었던

정다움이 있습니다. 가난했지만 우리의 가정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대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직함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것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거짓을 일삼는 삶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바로 가난한 가정의 삶이 있었다는 지난 일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며 더욱 이 땅에서 가정성화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하느님 중심의 가정,

그래서 때로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가 되고 힘이 되는 가정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출처: 구름 흘러가는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사랑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조나단 | 작성시간 24.12.29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늘 고맙습니다 🙏
  • 작성자발아래 | 작성시간 24.12.29 아멘. 감사합니다.
  • 작성자들꽃1 | 작성시간 24.12.30 감사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