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발상(發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선한 발상이라는 말도 있고,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도 있듯
어떤 생각이 생겨나온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무엇이 있다면 생겨나온 것입니다.
발생(發生)이나 발출(發出)과 같은 뜻입니다.
관건은 자가발생이냐 아니냐입니다.
자체 발광처럼 자체적으로 생겨난 것도 있고,
자체적으로는 도저히 생겨날 수 없고 외부에서 오는 것도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오는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요한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사람인지 세속적인 사람인지 물으시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우리도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이 돼야겠지요.
가장 근본적으로는 나라는 존재는 어디서 온 것인지,
일상적으로는 지금 떠오른 생각이 어디서 온 것인지,
내가 지금 판단하고 있는데 이 판단은 어디서 온 것인지,
내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데 이 주장은 어디서 온 것인지,
심지어 지금 나의 사랑은 어디서 온 것인지 물어야 하고,
하느님에게서 온 건지 내게서 온 건지 묻는 사람이 신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물은 다음에는 그것들이 영적인지 세속적인지 식별할 수 있어야겠지요.
앞에서 심지어 사랑조차도 어디서 온 것인지 물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의 사랑도 어디서 온 사랑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일 중요시하고 제일 소유하고 싶은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에서 비롯된 소유하려는 사랑은 당연히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지요.
오늘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에서 굴리에모 아빠스는
성령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 안에 부어 주신 사랑의 정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반면에 최고선이시고 궁극선이신 당신이 지니신 사랑은
선 자체이신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신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태초에 만물이 창조될 때부터 물위에서
즉 인간 자녀들의 출렁이는 마음 위에서 휘돌고 계시면서,
모든 이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고 모든 것을 당신께로 이끄시며,
그들에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시며 해로운 것들을 멀리하시고
유익한 것을 대주시며 우리를 하느님과 하느님을 우리와 일치시키십니다.”
아무튼 우리는 나쁜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일을 할 때도
심지어 사랑할 때도 늘 영적인 식별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사랑에서 왔는지.
그것이 하느님 사랑을 지향하는지,
공동선을 지향하고 이웃 사랑을 지향하는지 식별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