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영비에 대하여
153년에 세워진 것으로 공묘(孔廟)에 있다.
서체가 관편(寬扁)하고 파책이 신전(伸展)하여
예기비와 비슷하다.
필획이 예기비 보다는 굵고 결체가 엄정(嚴整)하여
혼후(渾厚)하고 고박(古樸)한 맛이 있다.
乙瑛碑原文:
司徒臣雄,司空臣戒,稽首言,魯前相瑛書言,詔書崇聖道,勉□〔藝〕,孔子作春秋,制孝經,□□五經,演易〔繫〕辭,經緯天地,幽讚神明,故特立廟,成四時來祠,事已即去,廟有禮器,無常人掌領,請置百石□□一人,典主守廟,春秋饗禮,財出王家錢,給犬酒直,須報,謹問大常,祠曹掾馮牟,史郭玄辭對,〔故事辟〕□〔禮〕未行,祠先聖師,侍祠者,孔子子孫,大宰,大祝令各一人,皆備爵,大常丞監祠,河南尹〔給〕牛〔羊〕彖□□□各一,大司農給米祠,臣愚以為,如瑛言,孔子大聖,則象乾,為漢制作,先世所尊,祠用眾〔牲〕,長□〔備〕□,〔今欲〕加寵子孫,〔敬〕恭明祀,傳於罔極,可許,臣請魯〔相〕為孔子廟置百石卒史一人,掌領禮器,〔出〕□□□,□〔犬〕酒直,他如故事,臣雄、臣戒、愚戇惶恐,頓〔首〕頓首,死罪死罪,臣稽首以聞。 制曰可, 〔司徒公〕河〔南〕□□□□〔字〕季高元嘉三年三月廿七日壬寅奏雒陽宮 司〔空公〕蜀〔郡成都〕□〔戒〕字意伯 元嘉三年三月丙子朔,廿七日壬〔寅〕,司徒雄,司空戒下魯相,承書〔從〕事,下當用者,〔選其年〕〔以〕□,經通一藝,雜試通利能奉弘先聖之禮,為〔宗〕所〔歸〕者,如詔書,書到言:永興元年六月甲辰朔十八日辛酉,魯相平,行長史事,守長〔擅〕,叩〔頭〕死罪,〔敢〕言之,司徒司空府壬寅詔書,為孔子廟置百石卒史一人,掌主禮器,選年以上,〔經〕通〔一〕藝,〔雜試能〕奉弘先聖之禮,為宗所歸者,平叩頭叩頭,死罪死罪,謹案文書,守文學掾魯孔龢,師〔孔〕憲,戶〔曹史孔寬等〕雜試,龢脩春秋嚴氏,經通高第,事親至孝,能奉先聖〔之〕禮,為宗所歸,除龢,〔補〕名狀如〔牒〕,平〔惶恐叩頭,死〕罪死罪,上司空府 讚曰:巍巍大聖,赫赫彌章,相乙瑛字少卿,平原高唐人,令鮑疊字文公,上黨〔屯〕留人,政教稽古,若重規〔矩〕,乙君察舉,守宅除吏,孔子十九世〔孫麟〕,廉請置百石卒史一人, 鮑君造作百石吏舍,功垂無窮,於是始□。
乙瑛碑释文:
司徒吴雄、司空赵戒,叩首说:前鲁相乙瑛上书说道:皇帝曾下诏书,要求尊崇圣人之道,勉励学习六艺,孔子著书《春秋》和《孝经》,删定五经,演绎《易》经的“系辞”等。为了更好地经营天下,更长久地礼赞神明(孔子),所以特立此庙。(孔子后代的首领)褒成侯虽能四季都来庙中祭祀,但祭祀完毕立即离去。而庙中尚有许多祭祀用的礼器,平常无人管理,因此请求设置一位官秩为百石的卒史,主持、管理、守护孔庙的事宜。
春秋两季祭祀用的礼品,如供牺牲用的动物(马牛羊等)和酒类,如果已裁定由公家出钱者,其钱数需要报告。很恭敬地询问了太常下属的祠曹掾史冯牟和郭玄。。他们回复说:按照太学(辟雍)过去的先例,在礼仪未举行之前,要先祭祀圣人先师。陪同祭祀的人,有孔子的子孙、大宰令、太祝令各一人,都要手持酒器,由太常丞监视祭祀,由河南尹供献牛羊猪鸡等牺牲,大司农供米,进行祭祀。愚臣司徒雄、司空戒以为,正像乙瑛所言,大圣人孔夫子,根据乾坤之象卦,为汉朝制定了法规,早为先世所尊重和遵循。祭祀所用的众多牲畜(牛羊猪鸡等),还有长官和吏人所用的祭祀礼器。今天又想加倍宠爱孔子的子孙,以便更恭敬地搞好祭祀活动,并且永远流传下去。
可以允许臣的请示,同意鲁相乙瑛提出的为孔庙设百石卒史一个,让他掌领礼器,公家给出犬酒钱,照过去类似情况的先例行事。臣下吴雄、赵戒愚笨憨直,万分惶恐地叩首请罪,并在跪拜中等待皇上的答复。皇上下诏说:可以。河南原武人吴雄、成都人赵戒上书。桓帝元嘉三年(公元153年)农历三月廿七日干支纪日为壬寅,上奏雒阳宫。
元嘉三年三月初一为内子,廿七日为壬寅。司徒雄、司空戒和鲁相下属的佐官书报从事,此事可用人的条件是:年岁在四十以上,能通晓(六艺之中的)一艺,一般常识测试也能通过,能够遵奉、弘扬先圣(孔子)的礼仪,又在宗族中威望较高,符合诏书要求者。诏书等收到了,现上报。永兴元年六月朔日为甲辰,十八日辛酉。鲁相平,和代理长史事宜的卞县长官各擅者,冒死叩头,大胆地言于司徒、司空府第。(壬寅诏书,为孔子庙置百石卒史一人,掌主礼器,选年口以上,经通一艺,杂试能奉弘先圣之礼,为宗所归者,平叩头叩头,死罪死罪)此段为鲁相平复述司徒等上内容与前文字相同。
谨案(符合条件的)有精于文词书写、正在试职文学署吏的鲁郡孔龢,师傅孔宪、户曹史孔宽等人,经过杂试,孔龢曾经修习《春秋公羊传》之“严氏学”,经过检测,顺利通过并得高名次。他又是著名的孝子。能够奉行孔圣之礼。在宗族中威信很高。故现将他的姓名和有关情况写在公文奏牒上。我(鲁相)平,十分惶恐地叩头谢罪。上报司空府第。于是赞曰:像高山一样雄伟的圣人(孔子),你的功业光明盛大,弥漫宇宙。鲁相乙瑛,字少卿,是平原高唐人,(曲阜)县令鲍叠,字文公,上党屯留人。他们的政教业绩,都遵循古训,郑重而合乎规范。鲁相乙瑛君,检察、举荐守孔宅之人,发现孔子十九世孙孔麟,廉洁正直,起用为吏;又(向皇帝申请)设置了百石卒史一人,专管孔庙事宜。县令鲍叠君,修建了百石吏的房舍。他们都功垂千古,于是开始…
해석
사도인 신 웅과 사공인 신 계는 머리를 조아리고 아뢰옵니다.
노나라의 전 집정관이었던 영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황제께서는 조서를 내려 성인의 도를 숭상하고 육예의 학문에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공자께서는 춘추를 지으시고 효경을 제작하시며오경을 산정하시고 주역의 계사를 연역하셔서 천지의 상도를 바로 잡으시고 신명을 그윽히 도우셨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사당을 세워서 포성후가 사시로 와서 제사를 올리지만 일이 끝나면 바로 돌아갑니다.
사당에는 예기가 있는데 상근하면서 그것을 관리할 사람이 없으니 청컨데 연봉 백석 정도의 녹을 줄 졸사 한 사람을 배치하여 사당 지키는 일을 맡아서 주관하게 하고 춘추의 향사 때는 왕실의 돈을 내어 희생과 제주를 마련하는 경비를 지급하도록 하여 그 보고를 받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태상의 아전 풍모와 서기 곽현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대답하는 말이
"옛날에는 벽옹례를 거행하기 이전에 선성선사를 먼저 제사하였습니다.제사를 모시는 자로는 공자의 자손 중에서 태재령과 대축령 각 일인이 모두 작배를 갖추고 태상승이 제사를 감독하며, 하남윤이 소, 양, 돼지, 닭, 말, 개를 각 한마리씩 지급하며, 대사농이 제사에 쓸 쌀을 지급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영의 말과 같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공자는 대성인이시라 건곤을 관찰하고 본받아서 한나라를 위하여 법도를 제작하였으니 선대로 부터 존중하던 바입니다. 제사에는 여러가지 희생을 쓰고 장관과 서리는 잔을 준비하였습니다.
이제 자손들에게 은총을 더하고 공경히 제사하는 법도를 밝혀 영원히 전하고자 하오니 신들의 청을 허락하소서. 노나라 집정관은 공자묘에 백석 정도의 녹을 줄 졸사 한 사람을 두어서 예기를 관리하게 하고, 왕실의 돈으로 희생과 제주의 경비를 지급하며, 다른 것은 옛일과 같이 하소서.
신 웅과 계는 어리석고 우둔하여 진실로 황공하오며 거듭 머리를 조아리고 죽을 죄를 청하옵니다.
신등은 머리를 조아리고 아뢰옵니다."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가하다." 라고 하셨다.
사도 공은 하남의 원무 사람인 오웅으로 자는 계고이다.
원가 3년(AD153년) 3월 27일 임인에 낙양궁에서 아뢰었다. 사공 공은 촉군의 성도 사람인 조계로 자는 의백이다.
원가 3년 3월 병사삭, 27일 임인에 사도 웅과 사공 계가 노나라 집정관의 승서종사인 하에게 하명하여 당용할 사람은 나이 마흔 이상으로 육예 중 하나에 능통하고 일상적인 잡무들을 시험하여 통과한 자로서 능히 선성을 제사하는 예법을 받들어 넓히며 종족들의 신망을 받을 수 있는 자로 선발하되 조서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답서가 도착하였는데 말하기를
"영흥 원년(AD153년) 6월 갑진삭 18일 신유에 노나라 상인 평과 행정사사인 변과 수장 천은 머리를 조아리고 죽을 죄를 청하며 사도부와 사공부에 감히 말씀을 올립니다.
임인일의 조서에서 공자묘에 백석 정도의 녹을 줄 졸사 한 사람을 두어 예기를 맡아서 주관하게 하되, 나이 마흔 이상으로 일예에 능통하고 여러 잡무를 시험하여 능히 선성을 제사하는 예법을 받들어 넓히며 종족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는 자를 선발하라고 하셨습니다.
평은 거듭 머리를 조아리고 죽을 죄를 청하옵니다.
삼가 살피건대, 문자를 잘 쓰는 수문학연 노의 공화와 사부 공헌과 호조사 공람 등을 여러가지로 시험한 결과 공화가 춘추엄씨전을 익혀 능통하며 잡무 시험에도 높은 점수로 합격하였고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니, 능히 선성을 제사하는 예법을 받들어 넓히며 종족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으므로 공화로써 보임하고 그 실정을 아래와 같이 보고하옵니다.
평은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거듭 죽을 죄를 청하면서 사공부에 올립니다."
라고 하였다.
찬양하여 말하노니,
높고 높아서 위대하신 성인이여.
빛나고 빛나니 더욱 아름답도다.
노나라 상 을영의 자는 소경이니 평원 고당 사람이다. 곡부 현령 포첩의 자는 문공이니 상당 둔류 사람이다.
행정과 교화를 펼침에 옛일을 상고하여 마치 그림쇠와 곱자를 중시하듯 하였다.
을군은 수택할 서리로 공자의 19세 손 인렴을 가려 뽑아서 임영하고 백석 정도의 녹을 줄 졸사 한 사람을 둘 것을 청하였고 포군은 백석의 리가 거주할 집을 지었으니, 후세에 드리운 무궁한 공로가 이에서 비롯하였도다.
바이뚜, 무릉도원, 서예통론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