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46-250
청대의 비학 발흥
청은 1644년에서 1911년까지의 267년간이다.
청대의 서풍을 전반적으로 보면
중기 이전의 조맹부와 동기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른바
첩학기(帖學期)와
중기 이후에 진한과 북조. 수. 당의 비각(碑刻)을
배우는 서가들이 새로운 서풍을 일신(一新)하였던
비학기로 나눌 수 있다.
비학기는 시기적으로
비판(碑版)을 위주로 하는 고고(考古).
금석학이 흥성(興盛)하면서 대두된 서학풍토였다.
첩학기(帖學期) ; 첩을 중요시 하였던 시기 ?
첩학은 법첩의 원류. 우열. 탁본의 시대순과 좋고 나쁜 것,
필적의 진위와 글 내용을 등을 연구하고 고증하는 학문
또는 법첩을 숭상하는 서파를 이르기도 한다.
글 쓴 사람의 글을 돌에 새겨 세운 것을 비
첩은 다른 사람의 글씨를 임모하여 새긴 것이다.
비는 옛 사람의 진적이고
첩은 후인들이 모방한 것으로 진적이 아니다.
묵적은 비단이나 종이 위에 쓰여 져서
그 당시나 후대에 전해진 작품이다.
뒤에 서예가 확대되면서
비단. 종이 위에 쓰여 진 명가들의 묵적이나
돌 . 나무에 모각한 글을
탁본 한 것을 모아서 서첩으로 하여
그 결과 첩의 범의가 넓어지게 되었다.
다음 인터넷 참고
청조의 서법
명말에서부터 활약하던 왕탁과 부산이
청초의 서단(書壇)을 장식하였다.
대개 중기 이전에 첩을 위주로 쓰던
제가(諸家)를 들면
진혁희(陳奕禧, 1648-1709).
심전(沈荃, 1624-1684).
하작(何焯, 1668-1743).
왕주(王澍, 1668-1743).
장조(張照, 1691-1745).
유용(劉埇, 1719-1804).
양동서(梁同書, 1723-1815).
왕문치(王文治, 1730-1802) 등이다.
이들은 진당(晉唐)으로부터 명에 이르는 글씨를 썼으며
동기창의 그늘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 중에는 유용의 성취가 가장 뛰어 났으며
초기의 정보(鄭簠)는 일찍이 한비(漢碑)에
눈뜬 선각자로 평가된다.
조금 후의 금농(金農)과 정섭(鄭燮)도
또한 비를 연구한 흔적이 보여
비파(碑派)의 선구자가 아닌가 짐작된다.
정보(鄭簠, 1622-1694)
자는 여기(汝器), 호는 곡구(谷口)이며 상원(上元)사람이다.
그의 글씨는 한비(漢碑)에서 얻은 졸박(拙樸)하고
기고(奇古)한 맛으로 예서를 많이 썼다.
글씨의 품격(品格)도 그러려니와
예서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공로는 매우 크다.
묵적으로 <예서조폭(隸書條幅)> 등이 있다.
졸박(拙樸) ; 꾸민데가 없이 수수함 ?
기고(奇古) ; 기이하고 예스러우며 고아함
참고도판
금농(金農, 1687-1763)
자는 수문(壽門)이고 호는 동심(冬心)
또는 계유산민(稽留山民)이며
절강(浙江)의 전당(錢塘) 사람이다.
서화를 다 잘 하였고 시에도 뛰어났으며
일생을 포의(布衣)로 벼슬하지 않았다.
글씨는 해서와 예서를 많이 썼는데 모두 기이하다.
예서의 횡획은 굵게 하고
종획은 가늘게 하였으며 파를 거의 없이 하였다.
해서도 방절(方折)하게 써서 위비(魏碑)의 맛이 있다.
비파(碑派)의 선구(先驅)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 할만하다.
참고도판
정섭(鄭燮, 1693-1765)
자는 극유(克柔), 호는 판교(板橋)이며
강소흥화(江蘇興化) 사람이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통하였으며
특히 그의 화죽(畵竹)은 전무후무한
격(格)이라고 칭한다.
글씨는 일찍이 예학명(瘞鶴銘)을 모(摹)하였고
이후에 황산곡을 썼으며
나중에는 전예해행에
사죽(寫竹)의 필의(筆意)를 더하여
‘육분반서(六分半書)’라는 독특한 자가풍을 이루었다.
모(摹) ; 본떠서 그리다 (쓰다)
주로 습자지를 위에 놓고 비친
본을 베끼는 것을 가리킴
사죽(寫竹) ; 대나무를 묘사하다
필의(筆意) ; 작가의 의도
육분반서(六分半書) ; 예서도 전서도 아닌
자기의 필체를 낮추어 부른 글씨
참고도판
유용(劉埇, 1719-1804)
자는 숭여(崇如), 호는 석암(石庵)이며
산동제성(山東諸城) 사람이다.
벼슬은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이르렀고
시(諡)는 문청(文淸)이다.
그는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하였고
시문(詩文)을 잘했다.
청 중기이전의 첩파(帖派)로는
가장 크게 성취한 사람이다.
해서는 종. 왕의 체형(體形)에
노공(魯公)의 법으로 썼다.
또한 북비의 맛을 더한 수경(秀勁)하고
청원(淸遠)한 풍을 이루었다.
행초는 그의 해서를 흘려 쓴 것으로
장봉(藏鋒)을 위주로 세렴(勢斂)하여 고경(古勁)하고
혼후(渾厚)한 풍격을 이루었다.
그의 성취는 청대(淸代) 전체를 통해서도
일류급으로 여긴다
체형(體形) ; 글자의 생긴 모양
노공(魯公) ; 안진경
수경(秀勁) ; 필세가 수려하고 힘차다
청원(淸遠) ; 맑고 심오하다 ?
장봉(藏鋒) ; 붓 끝을 감춤 ?
세렴(勢斂) ; 기세를 제한함 ?
고경(古勁) ; 소박하며 강건함
혼후(渾厚) ; 질박하고 자연스러움
참고도판
참고문헌 ; <<서예통론>> 선주선저 원광대학교출판국, 인터넷 사전,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