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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통론

p250-258 서체의 흐름과 변화 (청대의 비학 발흥, 비학발흥과 중기 이후의 서법)

작성자하전|작성시간15.05.07|조회수391 목록 댓글 1

 

 

 

청대의 비학발흥과

중기 이후의 서법

 

 

 

p250-258

 

비학발흥(碑學勃興)과

중기 이후의 서법

 

 

청조를 건립한 만주인은 곧 중국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차차 한화(漢化)되어졌다.

청초의 몇 황제들이 모두 한자를 잘 썼다.

순치제(順治帝)는 왕희지의 <황정경(黃庭經)>과

<유교경(遺敎經)> 등을 배워

특히 대자(大字)를 잘 썼다.

강희제(康熙帝)도 동기창의 글씨를 매우 좋아하여

동(董)의 진적(眞蹟)을 많이 모아들임으로써

동체(董體)가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다시 복고의 조맹부의 글씨가 성행하면서

고법(古法)을 연구하는 것이 자연적인 추세가 되었다.

따라서 당비(唐碑)와 한비(漢碑) 등이

쓰여지게 됨에 따라 여지껏

행초 위주로 써오던 서법계에

해. 행. 전의 비중이 고창(高漲)하게 되었다.

건륭말년(乾隆末年)에 점차

첩학이 병태(病態)라는 논조(論調)가 출현하였고

가경(嘉慶), 도광(道光)이후에 와서는

첩학이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동체(董體) ; 동기창 서체 ?

고창(高漲) ; 급상승하다

병태(病態) ; 비정상적인

논조(論調) ; 논설이나 평론 따위의 경향

 

 

 

청대의 옹정(雍正). 건륭 연간(乾隆年間)에

학사(學士)들이 정치에 관한 글을 써서

투옥되고 살해되는 소위 ‘문자옥(文字獄)’이 자주 일어났다.

그러므로 학자들이 뜻이 있어도

그 뜻을 펴기 두려운 시국이었으므로

정치와 무관한

고고 금석학에 눈을 돌리는 상황이 되었다.

마침 고대(古代) 금석의 출토가 늘고

모탑(摹搨)의 유전(流傳)이 날로 넓어져

금석연구의 발전이

서법과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로서

비학이 발흥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청대의 금석비판(金石碑版)에 대한 학문은

고염무(顧炎武)의 <<금석문자기(金石文字記)>>를

처음으로 해서, 가경 연간(嘉慶年間)에

손성연(孫星衍, 1753-1818)이

천하고금(天下古今)의

비갈(碑碣)의 목록을 편성(編成)한

<<환우방비록(寰宇訪碑錄)>>을 펴냈다.

이어서 왕창(王昶)이

고금의 비갈(碑碣)을 일일이 석문(釋文)을 달고

고증하여 <<금석췌편(金石萃編)>>을 펴냈다.

조금 후에 옹방강(翁方綱)이

<<양한금석기(兩漢金石記)>>를 저록하였다.

완원(阮元)은

금석문자의 탁본을 수집하여

종정(鐘鼎)에 실려 있는 내용을 연구하였고

고대문학(古代文學)의 원류를 추소(追溯)하였다.

또한 금석문자의 고증(考證)과 나아가

서파(書派)의 비평을 더하여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썼다.

그 뒤에 포세신(包世臣)은

그의 스승인 등완백(鄧完白)의 진한전예(秦漢篆隸)의

서법상의 걸출한 표현에 힘입어

<<예주쌍즙(藝舟雙楫)>>을 지어 법첩보다는

비판(碑版)을 추증하였다.

조금 후의 강유위는 <<광예주쌍즙(廣藝舟雙楫)>>을 지어

포씨(包氏)의 이론을 확충하고

완원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비학의 범위를 더욱 광범위하게 하였다.

중기 이후의 서가 중에

옹방강(翁方綱). 계복(桂馥, 1736-1805). 등석여.

이병수. 완원. 진홍수(陳鴻壽). 포세신.

오희재(吳熙載, 1799-1870). 조지겸(趙之謙).

오대징(吳大澂, 1835-1902), 오창석 등이

대표적인 비파(碑派)이다.

또한 비첩을 같이 공부하여 대성한 인물로는

하소기(何紹基). 옹동화(翁同和, 1830-1904)가 있다.

그러나 비파(碑派)라도 첩을 아주 안 쓴 것은 아니며

비를 위주로 하였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청말과 민초(民初)에 걸쳐서 활약한

강유위(1858-1927)와 제백석(1863-1957) 도 유명하다.

 

 

 

p252

옹방강(翁方綱, 1733-1818)

 

자는 정삼(正三), 호는 담계(覃溪). 소재(蘇齋)이며

하북대흥인(河北大興人)이다.

사고전서찬수관(四庫全書纂修官), 내각학사(內閣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글씨는 어려서

노공(魯公)과 구(歐). 우(虞)를 배우고

이후 사신(史晨)을 비롯한

예서와 금석비첩(金石碑帖)의 연구가 극심하였다.

<<양한금석기(兩漢金石記)>>.

<<소재당비선(蘇齋唐碑選)>>

등 많은 저록을 남겼다.

그의 서품(書品)은 학문에 못 미친다거나, 근엄하여

풍운(風韻)이 없다는 평을 듣는다.

금석학 방면에 끼친 영향이 크며

비학발흥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풍운(風韻) ; 풍류(風流)와 운치(韻致)

風流; 음악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韻致 ;고아한 품격을 갖춘 멋


참고 도판

 

 


등석여(鄧石如, 1743-1805)

 

초명(初名)은 염(琰)이고 자는 석여(石如)라 쓰다가

완백(頑白)으로 고쳤다.

안휘(安徽) 회녕(懷寧) 사람으로

환공산하(皖公山下)에 살면서

호를 완백산인(完白山人)이라고 하였다.

벼슬을 하지 않고 포의(布衣)로 일생을 지냈는데

어려서 전각하기를 즐겨하여 한인을 깊이 익혔다.

전예에 새 바람을 일으켜 세상 사람들이

‘전예의 중흥조(中興祖)’라 한다.

등석여(鄧石如)의 전예는 청조일대에서 뿐 아니라

고금을 통하여도 제일류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의 전서는

<백씨초당기(白氏初堂記)>를 비롯한

조폭(條幅) 및 대련들이 있는데

대개가 대자로서 원경(圓勁)한 필치로 쓴

웅혼(雄渾)한 걸작들이다.

예서는 <오도손시평(敖陶孫詩評)>을 대표로

<시축(詩軸)>, <대련병풍(對聯屛風)> 등

작품이 많다.

모두 묵순필후(墨淳筆厚)한 것으로

창경고고(蒼勁高古)한 풍격인데

마치 한인이 다시 와서

대자를 써 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해서는 묘지명에 가까운 글씨를 썼으며

행초도 뛰어났는데

<산거조기시축(山居早起詩軸)>을 보면

창경수일(蒼勁秀逸)한 풍으로

마치 횃불이 번득번득 날아다니는 것 같다.


포의(布衣) ; 벼슬이 없는 선비

중흥조(中興祖) ; 쇠퇴한 전예를 다시 일으킨 조상

원경(圓勁) ; 획이 둥글면서 강함 ?

웅혼(雄渾) ; 글씨 또는 기운 따위가 웅장하고 막힘이 없다

조폭(條幅) ; 세로로 된 글씨. 그림족자

시축(詩軸) ; 시를 적은 두루마리

묵순필후(墨淳筆厚) ; 먹색은 맑고 필획은 두껍다 ?

창경고고(蒼勁高古) ;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이 있으며 세속을 초월하여 고상하다

묘지명(墓誌銘) ; 묘지에 기록한 글

창경수일(蒼勁秀逸) ;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이 있으며 수려하고 자연스럽다

 


 참고 도판







 



이병수(伊秉綬, 1754-1815)

 

자는 조사(組似), 호는 묵경(墨卿)으로

복건영화(福建寧化) 사람이다.

벼슬은 형부주사(刑部主事)에 이르렀으며

특히 양주(揚州)에서 지현(知縣)으로 있을 때는

덕정(德政)을 베풀어 사현사(四賢祠)에

봉입(奉入) 되기도 하였다.

그의 글씨는 뛰어나 향신(向燊) 같은 이는

“묵경(墨卿)의 예서는 한인에 직핍(直逼)하여

등완백도 그 순고(淳古)함에는 못 미친다“라고

평할 정도이다.

그의 공간포백(空間布白)에 대한 감각은 기발하여

신선한 생명감이 있다.

해행은 안법(顔法)으로 썼으며

원경강일(圓勁剛逸)하여

금석기(金石氣)가 있다고 평한다.

특장(特長)인 예서는

<장천비(張遷碑)>, <형방비(衡方碑)> 등에서

득력하여 운필이 엄정하고 간가가 단장하며

웅장하면서 고미(古媚)하다.

묵적이 많이 전하며 모두 기특한 품격이다.

 

봉입(奉入) ; 받들어 들어가게 함 ?

직핍(直逼) ; 바싹 다가듦

순고(淳古) ; 옛날 사람과 같이 어질고 순하며 인정이 두터움

공간포백(空間布白) ; 쓰지 아니한 빈 칸에 글자와 글자,

                               행과 행, 그리고 글자와 행이 서로 호응하는 관계

                               곧 장법(章法)을 말함

안법(顔法) ; 안진경의 필법

원경강일(圓勁剛逸) ; 획이 둥글면서 강하며 굳세고 편안함 ?

금석기(金石氣) ; 쇠와 돌과 같은 거친 느낌이 나는 필치 ?

특장(特長) ; 특별히 뛰어난 장점

단장((端莊) ; 단정하고 장엄함 ?

고미(古媚) ; 예스럽고 예쁨

 


 참고 도판




















완원(阮元)

 

자는 백원(伯元), 호는 운대(芸臺).

연경노인(揅經老人)이다.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운귀총독(雲貴總督).

체인각대학사(體仁閣大學士) 등을 역임하였고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으로

비학을 창도(倡導)하였고

북조비판(北朝碑版)을 추중(推重)하였다.

그의 서법을 볼 때 현저한 공적은 없지만

선비답게 쓴 수묵(手墨)에서

순아청고(醇雅淸古)를 읽을 수 있다.

 

창도(倡導) ; 선도하다. 앞장서서 제창하다.

추중(推重) ; 받들어 존중하다.

수묵(手墨) ; 친필. 진필(眞筆)

순아청고(醇雅淸古) ; 순수하고 고상하며 맑고 예스럽다. ?

 

 

참고 도판





진홍수(陳鴻壽, 1768-1822)

 

자는 자공(子恭), 호는 만생(曼生)으로

절강항주(浙江杭州) 사람이다.

서화를 잘하고 전각에도 뛰어났다.

전예에서 특히 기이한 포백과 체(體)를 이루었다.

행초도 고법을 쫒아 탈속한 듯 청아(淸雅)한

서품(書品)을 이루었다.

 


 참고 도판




포세신(包世臣, 1775-1855)

 

자는 신백(慎伯), 호는 권옹(倦翁)으로

안휘경현(安徽逕縣) 사람이다.

서법이론가(書法理論家)로 이름 높다.

벼슬은 지현(知縣)에 이르렀고

만년(晩年)에는 강녕(江寧)에 은거하였다.

등석여(鄧石如), 황을생(黃乙生) 등과 토론하면서

글씨의 깊은 맛을 깨달았다.

<<예주쌍즙(藝舟雙楫)>>을 지어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나중에 북비(北碑)에 치력(致力) 하였으나

그의 이론에 부응한

서품(書品)은 남기지 못하였다.

 


참고 도판

 








하소기(何紹基, 1799-1873)

 

자는 자정(子貞), 호는 원수(蝯叟)로

호남도주(湖南道州) 사람이다.

벼슬이 사천학정(四川學政)에 이르렀다.

해서는 안로공(顔魯公)을 기조(基調)로 하여

북비를 더한 주경(遒勁)하고 청원(淸遠)한

품격을 이루었다.

행초는 그의 해서에 전의(篆意)를

융합시켜서 원혼(圓渾)하면서도

일기(逸氣)가 넘친다.

비첩을 두루 거쳐서 자성일가(自成一家)한

대표적인 인물로서 높이 평가되며

그 후대에 끼친 영향이 크다.

 

청원(淸遠) ; 맑고 심오함

전의(篆意) ; 전서체의 느낌이 있음 ?

원혼(圓渾) ; 둥글면서도 순수함 ?

일기(逸氣) ; 편안한 기운 ?

자성일가(自成一家) ; 스스로 서예에 있어서 일가를 이룸 ?

 


 참고 도판




조지겸(趙之謙, 1829-1884)

 

자는 휘숙(撝叔), 호는 비암(悲盦). 무민(無悶)

등을 썼으며 회계(會稽) 사람이다.

벼슬은 지현(知縣)에 그쳤다. 시(詩). 고문(古文).

서화(書畵). 전각(篆刻)에 모두 뛰어난 인물인데

특히 전각은 최고 일류로 친다.

글씨는 처음에는 안로공(顔魯公)을 쓰고

35세 이후에는 북비로 돌아서

역입평출(逆入平出)의 대표적 작가가 되었다.

특히 해서를 잘 썼는데

북비의 맛을 그대로 취하여 대성하였고,

행초에도 노공과 북위를 참용하여

탁월한 서품을 이루었다.

전예는 등법(鄧法)을 기초로 하여

더욱 색다른 서풍을 창출하였다.

특히 조달(早達)한 사람으로 56세에

죽기 10여 년 전부터 벼슬길에 오르면서

서화를 안 할 것을 맹세하고 거의 절필(絶筆)하였다.

40세를 전후하여 이룬 그 성취는 놀라우며

또한 원숙무애(圓熟無碍)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 작가이다.

 

역입평출(逆入平出) ; 기필할 때에 붓끝이 거슬러 들어가

                               평평하게 펴서 나오는 필법의 한가지 ?

등법(鄧法) ; 등완백 필법 ?

조달(早達) ; 젊은 나이에 벌써 막힘이 없이 통달함

원숙무애(圓熟無碍) ; 숙달의 경지에 이르러 거리낌이 없음

 


참고 도판






오창석(吳昌碩, 1844-1927)

 

이름은 준경(俊卿)이고 자는 창석(倉石)인데

후에 창석(昌碩)이라 고쳐 썼다.

호는 부려(缶廬)이다.

절강안고(浙江安告) 사람으로

안동현령(安東縣令)을 지냈다.

시문. 서화. 전각으로 크게 이름을 날렸다.

그의 글씨는

석고(石鼓)와 종정(鐘鼎)의 법으로

특색 있는 필자(筆姿)를 자아내었다.

평생을 석고(石鼓)를 임(臨)한 것으로 유명하다.

행초는 전법(篆法)을 취하여 자가풍을 이루었다.

예서는 전서나 행서에 못 미친다.

 

석고(石鼓) ; 북과 같은 돌에 글씨를 조각하여 넣은 것

                   내용이 모두 사냥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를 엽갈(獵碣)이라고 불렀고 통칭

                   석고 문이라고 하는데 진나라 때의 석각 문자이다

종정(鐘鼎) ; 종과 솥 같은 기구를 만들 때에 그 곳에 새긴 명문을 말함

필자(筆姿) ; 글씨의 형태 ?

 

 

참고 도판






강유위(康有爲, 1858-1927)

 

자는 장소(長素), 호는 갱생(更生),

천유화인(天游化人)으로 광동남해(廣東南海) 사람이다.

정치사상가(政治思想家)로서

완원. 포세신의 존비설(尊碑說)을 계승하여

<<광예주쌍즙(廣藝舟雙楫)>>을 저술하였다.

그의 글씨는 특히 행서에 뛰어났다.

북위. 석문명(石門銘)을 비롯한 북위 풍을 응용하여

창고질박(蒼古質朴)하며 필원세경(筆圓勢勁)한

풍모를 이루었다.

 

창고질박(蒼古質朴) ; 오래되어 예스러운 풍치나 모습이 그윽하고

                               꾸민 데가 없이 수수하다 ?

필원세경(筆圓勢勁) ; 획이 둥글고 힘참 ?


참고 도판





그외 청대 참고 도판

양수경(楊守敬)

행서칠언련(行書七言聯)


양현(楊峴)

예서칠언련(隸書七言聯)


오대징(吳大澂)

전서(篆書) 사곡(四曲) 병풍(屛風)


오양지(吳讓之)








옹동화(翁同和)

해서(楷書) 대련(對聯)




참고문헌 ; <<서예통론>> 선주선저 원광대학교출판국,   인터넷 사전,  인터넷 참고, 각종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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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하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6.05 우리 후배들 여전히 잘 지내고 있지 ?
    오늘은 금요일 참고 할 서예이론이다.
    시간나는대로 읽고
    우리후배들 지금의 시간들이
    좋은 경험이 되고
    건강하게 다시 보기를 바란다.
    지난번 올려 준 하전서예 시간표 보고
    올 수 있으면 와라
    한 강의 당 2명 정도 강의 할 수 있으니
    수강 학생이 없는 시간에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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