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68-274
통일신라시대의 글씨 (669-936)
통일신라는 669년에 고구려가 망한 이래
936년 망할 때까지 267년간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한반도가 단일민족문화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도록
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당(唐)과 공조하여 이룬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역사의 오점으로 남는다.
서예도 우리 나름대로의 고유성으로부터 크게 변하여
당나라의 서풍을 그대로 답습하는 바가 되었다.
물론 우리 고유의 유풍이 칼로 자른 듯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로부터 해서는 초당 서풍이
거의 일색을 이루게 되었으며,
왕희지의 행서 풍을 따른 것들이 주류가 되었다.
또한 삼국시대에 나타나지 않았던
찬자(撰者)와 서자(書者) 또는 각자(刻者)의
이름을 밝히는 것도 당의 유풍을 따른 것이었다.
비를 세우는 형식과 서체의 고착(固着) 등은
이후 우리나라 서예 사를 평가하는 선례(先例)가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서예유물은 매우 풍부하여
가장 유명한 비인 쌍계사진감선사비(雙谿寺眞鑑禪師碑)와
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信行禪師碑)
그리고 육필묵서(肉筆墨書)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비롯하여
태종무열왕비(太宗武烈王碑). 문무대왕비(文武大王碑).
감산사조상기(甘山寺造像記).
황복사사리함명(皇福寺舍利函銘).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鐘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등의 금석문, 그리고 석주기(石柱記). 석탑기(石塔記).
사리함기(舍利函記) 등 이루나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서예가로는 김생(金生), 요극일(姚克一), 영업(靈業),
최치원(崔致遠)이 특히 유명하며
이외에도 김인문(金仁問), 한눌유(韓訥儒),
김임보(金林甫), 김육진(金陸珍) 등이
활약하였다.
찬자(撰者) ; 시가(詩歌). 문장(文章). 책 등에 종사하는 사람 (=撰人
서자(書者) ; 글씨를 쓴 사람
각자(刻者) ; 글씨를 새긴 사람
p269
김생(金生, 711-791)
8세기를 들어서면서 통일신라에는 왕희지의 서풍이
성행하였다. 이 시기에 대표적인 서가는 김생이다.
해동(海東)의 서성(書聖)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예서, 행서, 초서에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홍관(洪灌)이 송에 사신으로 가
김생의 글씨를 양구(陽球). 이초(李草) 등에
보였을 때 모두 왕희지의 글씨로 인식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진적은 남아있지 않으며
고려 초기 그의 글씨를 집자한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에서
그의 풍모를 대할 뿐이다.
이 집자 비를 통해서 볼 때
필법이 왕희지를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왕희지 글씨와 유사한 면을 보이지 않는 자가 풍이다.
당 이옹(李邕)의 녹산사비(麓山寺碑)와 통하는
필법인데 필세가 거칠어 보이며
결구가 약간 둥글고 납작한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도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歌序)>가 전한다.
참고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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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
p270
요극일(姚克一)
『삼국사기』에 통일신라시대에
서가로 실려 있는 사람은 김생과 요극일뿐이다.
삼국사기에 벼슬은 시중겸서학사(侍中兼書學士)로
구양순법을 터득하여 김생만은 못하지만 필력이 주경하여
기품이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해동금석총목(海東金石總目)』에
대안사적인선사비(大安寺寂忍禪師碑)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탁본마저도 구해 볼 수 없다.
참고도판
영업(靈業)
영업은 승려로써 왕희지체에도 능했다고 전한다.
이우(李俁)가 만든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그가 쓴 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信行禪師碑)의
탁본이 있어 그 면모를 알 수 있다.
청의 유희해(劉喜海)가 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는
김생이나 최치원에 비견한다고 하여
그의 행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信行禪師碑)는
영업이 쓴 것으로 813년에 세워져
단속사지(斷俗寺址)에 있었다.
글자의 크기가 2cm정도의 행서인데
왕희지법을 터득하여
필력이 주경(遒勁)하매 결체의 묘를 얻었다.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에는
“담담하면서도 소랑하다〔澹而疏〕라고 평하였다.”
왕희지의 진수를 얻은 명품으로 보여진다.
주경(遒勁) ; 필력이 힘차고 굳셈
참고도판
단속사신행선사비
(斷俗寺信行禪師碑)
최치원(崔致遠)
호는 고운(孤雲)이다. 시인이며 문장가이다.
12세(868년)에 당에 유학하여
6년 만에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였다.
승무랑어내공사(承務郞御內供事)의 벼슬에 있을 때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명을 떨쳤다.
28세에 귀국하여 아찬(阿湌) 벼슬에 올랐지만
당시 난세에 상심하여 40을 즈음하여
벼슬에 뜻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하였다.
『당예문지(唐藝文誌)』에 그의 46집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실려 있다.
대표적인 글씨유적은 쌍계사진감선사비를 비롯한
이른바 ‘사산비명(四山碑銘)’이 유명하다.
그의 종제(從弟) 최인연(崔仁渷) )도 글씨를 잘 썼다.
쌍계사진감선사비(雙谿寺眞鑑禪師碑)의
비신(碑身)의 높이는 2m 정도이며 폭은 1m이다.
지금도 하동 쌍계사에 보존되어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四山碑)는 이 비 이외에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搭碑).
경주숭복사비(慶州崇福寺碑)를 이른다.
진감선사비는 최치원이 짓고 전액(篆額)도 썼다.
비문의 글씨는 구양순. 우세남의 유풍에서
나온 자가풍이다.
필력이 주경(遒勁)하며
결체(結體)는 약간 고장(高長)하며 긴밀하다.
전아(典雅)한 서풍으로 문필가의 정취가 흠씬 담겨 있다.
전액(篆額) ; 전자(篆字)로 쓴 비갈(碑碣)이나 현판의 제액(題額)
주경(遒勁) ; 필력이 힘차고 굳셈
종제(從弟) ; 사촌동생
고장(高長) ; 크고 길쭉하다 ?
전아(典雅) ; 우아하다
참고도판
쌍계사진감선사비(雙谿寺眞鑑禪師碑)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
755년에 쓰인 육필진적이다.
호암미술관(湖巖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는데
27.3cmx13.9cm의 두루마리이다
『화엄경』 6권까지를 옮긴 것으로 발문(跋文)은
이두문(吏讀文)으로 되어 있다.
글쓴이는 이모(異毛) 등 10명에 달한다.
행간선(行間線)을 치고
매 행 34자의 소해(小楷)로 썼다.
당대 사경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보물로서
필력이 엿보이며 풍격이 수일(秀逸)하다.
참고도판
형체만 보일 뿐 자형은 정확하게 볼 수 없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이 경은 1966년에 불국사 석가탑 탑신 제 2층에 봉안되었던
금동사리함 속에서 발견되었다.
세로는 5.5cm에 불과하며
각 행의 자수는 7-9자로 7m에 달한다.
서체는 목판본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사경체(寫經體)와는
색다르며 비문이나 묘지명을 쓴 듯 한 필치이다.
그 서풍은 남조풍(南朝風)에서 우러나온 단아함에
초당의 서풍이 어우러져 있다.
글씨는 일그러진 듯이 참치(三叉)한 모습이면서도
그 가운데 조화의 미를 느끼게 한다.
신라 옛 글씨의 자연스러움이 배어있는 듯하다.
참고도판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자형을 거의 알아보기 힘들다
참고문헌 ; <<서예통론>> 선주선저 원광대학교출판국.인터넷 사전, 도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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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하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7.10 오늘은 2020년 7월 10일 금요일이다.
우리 후배들아 일주일 잘 보냈니?
어제는 많이 더웠는데
오늘은 장마비가 와서
그런대로 시원하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위생에 철저하고
건강하게 보내도록 하자
시간 나면 서예이론도 참고하여 보고
하전서예 7월 수강표 참고하여
시간이 되면 오고
수요일 6시 이후와
금요일 오전에 올 수 있으면
연락 미리해 주라
하전서실에서 기다린다
가을에는 졸업전과 전시회를
온라인으로 할 계획이다
좋은 대안이 있으면
연락주라
오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