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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통론

p280-285 우리나라 글씨의 흐름 (조선시대의 글씨-초기)

작성자하전|작성시간15.07.15|조회수155 목록 댓글 3

 

 

 

p280-285

조선(朝鮮) 시대의 글씨

 

조선시대는

이성계가 건국한 1392년부터

일본에 의해 한일 합방된 1910년 까지를 말한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한 조선은

많은 학자와 서가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학문은 곧 벼슬이라는 등식 아래

지식인들의 삶이 영위되었으므로

글씨는 필사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특히 서예는 벼슬길에 크게 성공하지 못한 이들이

추구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조선 500 여 년 동안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서예인은

벼슬길과 상관없었던

초기의 풍류남아(風流男兒) 안평대군과

귀양살이 10년 동안 각고하여 높은 서예의 경지를 연

김정희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이기간 동안 중국에서

벼슬길과 예술성취를 병행한

명의 동기창(董其昌)이라든지

특히 벼슬 없이 포의(布衣)로 일관한

청의 등석여(鄧石如) 등 이루 셀 수 없는

명가(名家)가 배출된 것과는

그 양상이 하늘과 땅 차이이다.

더구나 문방사보에 대한 인식이나

표구에 대한 기술 등의 문제로

예술성이 크게 향상할 수 없는 처지였고

또 좋은 글씨가 있더라도

보존되어 내려오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것은 영조. 정조 때에

사신이나 상인들에 의하여

발달된 중국의 문방의 재료들이 들어와

제한된 서가들에 의하여

큰 작품들이 휘호되어 전해오고 있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글씨를 전반적으로 볼 때

간찰을 통한 행초의 발전이 모색된 것으로 평가되지만

비명(碑銘)의 글씨는 고려시대에 비하여

격조가 떨어지는 형국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글씨의 평가와 감상은

간찰이나 집첩(集帖) 등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조선의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누어

인물위주로 기술하고 그 대표작이 있으면

서술하는 것으로 하겠으며

한글에 대해서는 따로 분류하여

생성으로부터 궁체의 발달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초기

초기에는 고려 말에 유행하였던

조맹부의 송설체가 쓰여 졌고

세종 때에 사자관(寫字官)의 모범으로

왕희지체를 삼게 하면서

송설체와 왕희지법이 병행되어졌다.

이시기의 대표적인 서가로는 이영서(李永瑞).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강희안(姜希顔). 김시습(金時習). 김구(金絿).

황기로(黃耆老). 양사언(楊士彦) 등이다.

 

 

 

안평대군 (安平大君, 1418-1453)

이름은 瑢이며 호는 청지(淸之),

또는 비해당(匪澥堂)이다.

시문서화에 모두 능하였다. 세종대왕의 셋째아들로

36세에 사사((賜死)되었다.

대군은 ‘인서구로(人書俱老)’란

단어를 무색하게 할 만큼 30代에

명필의 경지를 일구어냈다.

대군의 글씨는 명인(明人) 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명에서 사신으로 왔던

예겸(倪兼)과 사마순(司馬恂)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보고 조맹부보다 뛰어나다 하면서

수 십 점을 얻어 갔다는 것이

신숙주의 수기(手記)에 나타나며

두 사신이 상찬한 시가

『黃華集』에 실려 있다.

글씨 중에 대표적인 것은

자신의 꿈을 안견에게 명하여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발문이다.

치밀한 결구와 유연한 필세,

글씨에 넘쳐흐르는 운치 등은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지금 이 작품은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에 소장되어 있다.

 

 

사사((賜死) ; 극형에 처할 죄인을 대우(待遇)하는 뜻으로,

                    임금이 독약을 내려 자결하게 한 일

인서구로(人書俱老) ; 사람과 글씨는 함께 늙는다. ?

상찬(賞讚) ; =찬상(讚賞) 아름답게 여기어 칭찬(稱讚)함





참고도판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강희안(姜希顔)

호는 인제(仁齊) 벼슬은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글씨는 왕희지와 조맹부를 익혀 득력하였다.

활자 을해자(乙亥字)는 그의 글씨이다.

 



 

 

김구(金絿, 1488-1534)

자는 대유(大柔)이며 호는 자암(自庵)이다.

벼슬은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권 1에

“그는 문장이 기걸(奇杰)”하였고

필력이 경건(勁健)하였다.

왕희지를 즐겨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또한 인수방(仁壽坊)에서 생활하여

그의 서체를 인수체(仁壽體)라고 하였다.

김구는 원교 이광사가 이르는

조선조 전기의 4대가(안평대군. 김구. 양사언. 한석봉)의

한사람이다.

특히 연면초(連綿草)에 뛰어나

이후 황기로와 같이 이후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부제학(副提學) ; 조선시대에 둔 홍문관의 정삼품 당상관 벼슬

연면초(連綿草) ; 두 자 이상 몇 자씩 이어서 쓰는 것

단초 ( 單草) ; 각기 한 자씩 떨어지게 띄어 쓰는 것

 



참고도판





 

황기로(黃耆老, 1521-1575이후)

호는 고산(孤山)이다.

13세에 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매학정(梅學亭)을 짓고

피세(避世)하였다.

젊은 나이에 외부세계와 단절된 것은

당시 조부가 성균관시절

익명의 투서사건과

부친이 조광조를 처단할 것을 주장한 사건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선비사회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등

치욕을 겪는 처지가 되었다.

그의 글씨는 마치 광초로 유명한

당의 장욱이나 희소와 같은 태도로

술로부터 취흥을 얻어 쓴 필치의 것이다.

황기로의 광초는 이후 조선의 선비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참고도판





 

 

양사언(楊士彦, 1517-1584)

호는 봉래(蓬萊)이다.

벼슬은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해동호보(海東號譜)』에 보면

“공은 풍골이 속되지 않고 필법이 기고(奇古)하였으며

또한 청아(淸雅)하였다.”고 하였다.

금강산 만폭동 앞면에

초서대자<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同天)>

8자가 전하는데

그 웅건하고 기존한 필세는

만이천봉과 무게를 다툰다는 평이 있다.

그의 글씨는 연면초(連綿草)

또는 광초(狂草)에 가까운 초서에 능하였다.

황기로와 함께 초성이라고 불렀다.

 

 

 

참고문헌 ; <<서예통론>> 선주선저, 원광대학교출판국 , 인터넷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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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하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7.15 이번 주에 명지서법 서예이론으로
    조선 초기의 서예에 대한 부분이다.
  • 작성자하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4.03 오늘은 2019년 4월 3일 수요일이다
    저녁 8시~10시까지 강습회 있는 날이다.
    우리 후배들 신학기 맞아 바쁘겠다.
    바쁜 와중에 서법이론도 보고
    붓글씨도 써보자 .
    색다른 삶을 살아 볼 수 있을 것으로 안다.
    저녁에 보자 오바
  • 작성자하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7.24 오늘은 2020년 7월 24일 금요일이다.
    우리 후배들 방학 잘 보내고 있지?

    오늘 볼 서예이론은 조선시대 초기에
    관한 내용이다.
    시간나는 대로 참고하자.


    수요일 저녁 6;10~8;00
    목요일 오후 12;30~2;00
    금요일 오전 9;30~11;30

    3명씩 강습 가능하니 미리 연락주면 이 시간에
    내가 기다린다.
    오늘도 불타는 금요일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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