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글씨의 흐름
조선시대의 글씨
p288-291
후기
조선의 영조 정조대는
청문화의 전성기 영향을 받아
문인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당시 청조에서 일어난 실학이나 고증학
또는 금석학의 발달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때에 우리나라의 학자들이
연경에 사신 또는 수행원으로 가
그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서
우리 서예계에도 누기를 일신하고
서가는 중기 말부터 활동해 온 윤순과 이광사
그리고 박제가(朴齊家). 신위(申緯).
김정희(金正喜) 등이 대표적이다.
윤순(尹淳, 1680-1741)
호는 백하(白下)이다.
벼슬은 부수찬(副修撰)을 지냈다.
글씨는 왕희지를 바탕으로
미불을 받아들여 누기를 벗어난
운치있는 서풍을 이루었다.
이광사(李匡師, 1705-1777)
호는 원교(員嶠)이다.
윤순에게 글씨를 배웠다.
행서와 초서에서 왕법을 바탕으로
미불풍을 가미하여 활달한 자가풍을 이루었다.
추사는 이광사를 지나치게 폄하했지만
꼭 그러한 것은 아니다.
64세 때 『서결(書訣)』2편을 지었다.
전편에는 글씨에 대한 이론과
서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배우는 사람이 범하기 쉬운 오류를 교정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또한 자신의 미진함을 고백하였다.
후편에는 옛 서론에서 논한 것을 취합하여
논평을 하였으며
자신의 미진했던 점을 보완하였다.
참고 도판
신위(申緯, 1769-1845)
호는 자하(紫霞)이다.
일찍이 주청사(奏請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벼슬은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시서화 삼절로 이름 높다.
일반적인 평가는 시가 으뜸이고
다음은 그림 그리고 글씨라고 한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등
300에 가까운 것을 사용하였다.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고
이후 제주도와 북청에서 10년간 귀향 살았다.
일찍이 박제가(朴齊家)에게 사사하였다.
24세 때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
당시 청의 학자이며 서가인
옹방강과 완원을 만났다.
이로부터 학문과 예술방면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에도 그곳 서가들로부터
자료를 전해 받았고
또한 우리나라의 탁본을 보내는 등
서신왕래를 통하여 안목을 넓혀나갔다.
그의 글씨는 예서에 특히 뛰어났으며
초서는 남긴 것이 없다.
해서와 행서에도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평자들은 그의 글씨를 기(奇)와 괴(怪)로 평한다.
지금도 일각에서는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아무튼 김정희의 성취는
우리나라 서예사상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림도 잘하여
국보 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에서
그의 문기(文氣)를 접할 수 있다.
이상의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글씨를 전반적으로 개괄해 볼 때
글씨의 수준이 점점 쇠퇴하여 온
서예사를 접할 수 있다.
더구나 중국은 조대(朝代)마다
굵직굵직한 명가가 연이어 출현한 것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그러한 면에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것을 답습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현재의 방대한 자료를 응용하여
분발을 거듭하여 우리 나름대로
굵직굵직한 명가(名家)들이 탄생됨으로써
중국을 초월하는 서예의 지평을 열어야 될 것이다.
참고 도판
해외간찰 청유(淸儒) 왕맹자(汪孟慈)에게 답한 글
참고 문헌 ; <<서예통론>> 선주선저, 원광대학교출판국 , .인터넷 사전, 월간지 묵가 11월호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하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7.29 이번 주에 나갈 명지서법 서예이론이다.
방학동안 우리 후배들이 건강히 잘 지내고
시간이 허락되는 후배들이 강의에 참여하길 바란다.
하나는 일요일 일본에 갔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8월 10일경 온다고 했는데
태풍이 와서 떠났는지 모르겠다.
이번 주 강습회에 가보면 알겠다. -
작성자하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8.07 오늘 2020년 8월 7일 금요일이다.
계속되는 장마로 우리 후배들
별고는 없는지 궁금하다.
방학은 잘 지내고 있는지도????
오늘 볼 서예이론은 조선시대 후기에
관한 내용이다.
시간나는 대로 참고하자.
가을 전시 작품 출품할 후배는
회장 유주영이 한테 연락주라
오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