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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의 우월(優越)과 가치(價値)
바느질에 그 오차를 표현할 때 올을 다툰다고 한다.
서예의 결구에 있어서는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까?
호(毫)를 다툰다고 해야 될 것이다.
“처음에는 터럭만큼의 오차지만 나중에는 천리나 벌어진다.
[毫釐之次,懸隔千里]”라는 말이 걸맞을지 모른다.
미술을 전공하려면 가장 기초적인 것이 소묘이다.
소묘를 통하여 거리감각. 사선(斜線)감각. 명암처리
등을 익혀 사물을 거의 완벽하게 그려 낼 수 있게 된다.
서예에서 소묘와 통하는 방법은 임서이다.
임서에는 형임(形臨). 의임(意臨). 배임(背臨)이 있다.
그 중에서 형임(形臨)이 가장 초보단계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십 년 정도는
형임(形臨)의 단계를 갖는다.
그 동안 한 글자를 천 번 이상을 써 보아도
비첩(碑帖)의 글씨와 완벽하게 똑같이 할 수는 없다.
자신이 써놓은 글씨를 보고 수 천 번을 써 보아도
똑같은 글씨는 다시 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듯이 어려운 공부가 글씨임에도 불구하고
뭇사람들은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현실이다.
여가선용의 잡기(雜技)정도로 취급해 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세월이 만들어 놓은 현상이며
산물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은 지난 수 십 년 동안
서예가들의 안일 무사한 태도에 대한
사회의 차가운 응징의 일환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현상이 되기까지에는 몇 가지 사유가 있다.
우선은 서예가들이 학덕(學德)과
선비정신의 고귀함을 잊거나 포기한 것에 있다.
또 서예를 공모전 등에서
입. 특선하는 것을 목표로 도제교육(徒弟敎育)하에서
저마다의 심혼을 펼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지 못한 것도 큰 이유이다.
그리고 실기위주의 학습풍토가 조성됨에 따라서
그 실기를 뒷받침할 수 있는 서법이론 체계가
전혀 확립되지 못한 것도 그 중요한 이유이다.
이삼십 여 년 전만해도
인사동(仁寺洞) 골동품상이나 화랑 가에서
서예는 매우 중요한 수집 대상이었다.
그 이후 차차 서양화와 한국화 등에 밀리더니
이제는 콜렉터(collecter)들의 수집목록에
서예가 거의 빠져버린 실정이다.
자업자득인 셈이다.
1989년에 원광대학교에 서예과가 처음으로 설과되고
계명대학교. 대구예술대학교. 대전대학교. 경기대학교에서
그 뒤를 이었다.
대학을 중심으로 할 일은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동안 잃어버린 서예인의 자질과 자세,
그리고 서예를 전공하고 있는 책임과 자부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또 학술적인 서법이론 체계를 확립함으로써
논문. 저서. 번역 등의 저작활동을 활성화하고
아울러 서예작품의 다양화를 모색해야 된다.
이 밖에도 초. 중등학교의 서예와 한문교육의 정상화에 대한
촉구를 위하여 온 서예계가 다 같이 일어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요즈음 같이 우리 것을 찾고
다시 동양적인 사고가 고무되어지고 있는 시기에 편승해서
서예와 서가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온 서예 인이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가치관의 혼란으로 도덕 윤리가
땅에 떨어진지 오래이다.
정서는 메마르고 인정은 고갈상태에 있다.
다행히도 사회 일각에서 인간성의 회복과
자연 되살리기 같은 움직임이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런 때 분연히 나설 수 있는 사표(師表)는
진정한 서가가 적격이다.
왜냐하면 다른 예술분야와는 달리
학문과 수양을 최상의 덕목으로 삼는
선비정신의 서가가 할 시대적 사명이기 때문이다.
서가가 자존(自尊)을 지키는 것은
사회 전체를 바로 잡는 사회봉사의 길이기도 하며
모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가장 공경스럽게 생각하는 풍토의 조성이기도 하다.
서예는 현묘(玄妙)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그리고 모든 예술의 기조가 되는 선의 예술이다.
서예의 대표적인 미적가치는
선조의 미, 여백의 비, 흑백대비(黑白對比)의 미,
묵광(墨光)의 미, 필력의 미, 일사천리의 미 등이다.
어느 예술을 막론하고 서예를 흉내 내고 모방하고
또 소재나 아이디어를 가져갈 뿐,
결코 다른 예술분야를 뒤따라가거나
그것으로부터 영향 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렇듯이 다른 예술이 전혀 견줄 수 없는
우월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서양 속담에
장미는 던져놓아도 아름답다는 말이 있는데
서예도 애당초 그러한 것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예의 우월성과 진면목이 피부에 와 닿기만 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하잘 것 없이 여겨지는 데에 이른다.
또한 서예의 가치와 우월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많은 전문분야 중에서
사대성현(四大聖賢)과 악성(樂聖). 시성(詩聖). 서성(書聖)이란
말 이외엔 ‘성(聖)’자를 쓴 사례를 일찍이 들어본 바가 없다.
실로 가슴 벅찬 우월감이 아니겠는가!
서예는 이밖에도 인생의 흥취를 돋우어 주고
심미안을 키워준다.
서가의 눈은 매서운 데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난(蘭)이나 수석(壽石) 또는 골동(骨董)같은 분야에
눈을 빨리 뜨고 접근 속도나 성취가 매우 빠르다.
또 심리분석이나 관상 같은데도 일가견들이 있으며,
유머감각이 있고 풍류를 좋아한다.
그리고 대체로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면서도
술을 통하여 자신의 솔직함을 드러내는 데에 인색하지 않다.
글씨 씀에는
독서나 선정(禪定) 또는 염불(念佛) 같이
삼매경(三昧境)을 경험한다.
침식을 잊는다는 말은 지나칠지 모르지만
작업에 임하다 보면 시간을 잊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시간은 뇌파가 쉬는 시간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옛날부터 대부분의 뛰어난 서예가는
거의가 장수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임상실험을 통하여
서예가 장수와 관련이 있다는 보고서가 나오기도 하였다.
요즈음 서예가 심리치료에도 각광받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형임(形臨) ; 형임은 비첩에 있는 글씨 형태의 모양 그대로 임하는 방법이다.
형임은 摹(모)나 雙鉤廓塡(쌍구곽전)을 통하여
좀 더 정확하게 근접할 수 있다.
형임의 단계는 임과 모를 병행한다.
의임(意臨) ; 의임은 비.첩의 글씨에 가깝게 임서하되
개인의 취향이나 개성을 살려서
다소 자유롭게 하는 학서방법이다.
문자 그대로 개인의 意(의)를 반영하는 방법으로
형임의 다음 단계로 볼 수 있다.
背臨(배임) ; 배임은 법첩을 보지 않고 전에 임서하였던 기억에 의존하여
글자의 형태나 풍격을 외워서 쓰는 방법이다.
배임의 단계는 끊임없는 ‘臨帖(임첩)’과
범본의 특징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讀帖(독첩)‘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다.
참고서적 ; <<서예통론>> 선주선저,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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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하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06.18 오늘은
2021년 6월 18일 금요일이다.
지금 비가 오고 있다.
우리 후배들
지난주에는 기말고사 기간이라 했는데
아직 시험이 끝나지 않았나?~~~~~
오늘 올릴 서예이론은
서예의 우월(優越)과 가치(價値)
에 관한 것이다.
틈이 나면 읽어보자.
기말고사 끝나는 대로
붓글씨 다시
시작하도록 하자.
나는 지난주에 토요일
코로나 백신주사
아스트라제네카를 맞았다.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픈 조짐이 느껴지면
타이레놀을 먹고 잘 보내다가
삼일 째 되는 날 밤
극심한 어지러움이 있었다.
나의 형상이 어떨까하고
거울을 보았는데
완전히 백지장으로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이었다.
이튿날에는 피곤하여 낮에도 누워있었다.
낮에는 잘 버티다가 밤에는
밥도 먹기가 힘들어 외출복 입은 채로
이틀은 그냥 잤다.
오후 5시 이후에는 뭔가가 힘들다.
모두가 아는 현상이기에
견디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 가족들에 비하면 나는
괜찮은 편이라 이 백신이
가족력과도 관련이 있지 않은가 생각도 했다.
면역력이 생기면 우리 후배들과
학교에서 강습회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 감사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건강하자
오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