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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주학파 미학범주

1 해석 모음 ("진 태주학파 미학범주" 從 30頁第一行到50頁第二行)

작성자하전|작성시간22.12.12|조회수51 목록 댓글 0


해석만
1
p30 첫째 줄 ~p50 둘째 줄
”《노자》는 "도를 행하는 것은 사물을 위한 것이고 단지 황홀한 것일 뿐이다.
흐리멍덩한 그 속에 형상이 있고 , 어슴푸레한데 그 안에 물건이 있다.
어슴푸레하고 어슴푸레하며 그 중에 정교함이 있다. 그 정교함은 매우 진실하고 그 속에는 믿음이 있다. "고 말했다
이것들은 모두 '도', '진재'가 확실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특징을 말한다.
도가는 '도'가 보편적으로 천지 만물 속에 존재하고, 천지 만물이 생겨나고 존재하는 본원이라고 생각한다. 도의적 존재는 의지할 데가 없고 독립적이어서 고치지 않는다.
'도'는 그 자체로 최고의 '진'이며, 어떤 사물도 하늘과 하나이고, 도와 동체가 되어야만 '진'의 경지에 도달 할 수 있고, 그런 도를 가진 사람만이 '진인'이 될 수 있다.
《장자•대종사》에서 “옛날의 진인 ”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밝혔는데 오늘날의 진가(眞假)의 의미의 진인이 아니라, 득도한 하늘과 같은 존재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오늘날 속칭인 "도인"에 대해 《장자》에서 당신은 “천인 ” “지인” “성인”으로 불린다。'장자'는 "종(宗; 근본)을 떠나지 않는 것을 천인이라 한다. 정(精;완벽함)을 떠나지 않는 것을 신인이라 한다.
진을 떠나지 않는 것을 지인(至人; 도덕이 극치에 이른 사람) 이라 한다.
하늘을 종(宗; 근본, 으뜸)으로 삼고, 덕을 근본으로 하며, 도를 문(門; 방도, 방법)으로 삼으며,
변화의 징조를 성인이라 한다. ”고 말했다.
유가는 인생의 최고 경지가 성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성인의 개념은 오늘날 사람들의 관념에서 도덕적인 본보기가 아니라,
하늘과 소통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성( 圣)'자의 번체는 '聖'이라 쓰는데 耳로 구성되었다. 단옥재가 주를 달아 말하길 '圣'은耳로 구성 된 것인데 그것은 귀에 거슬리지 않다라 하였다."  바로 이순(60세)의 뜻이다.
"불혹", "지천명", "이순","종심소욕불유구"는
모두 인간은 천명 등 자연과 인생, 사회의 규율에 대해 이후의자유자재의 경지를 파악하는 것을가리킨다 . 선종은 또한 '진인'이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하는데, 도가의 '도인'에 해당하며, 세상의 법칙을 획득하고 자유자재로 운용하며 세속에 얽매여 가까이 있지않고 단독으로 외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역시 무위진인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유불도 三家는 인생의 최고 경지에 있어서, 모두가 가장 높은 진리를 터득하고
스스로 따를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진리는 가장 높은 본체이다.
서양의 미학은 독립적인 학과인데,
그 초기 의미는 "감성학"이었고, 심미적인 활동은
심미적인 대상에 대한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파악이다.
서양인식론에서 논리적 추리를 경로로
진리를 파악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중국 고대에서 '도'(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은
직감에 의한 심미적 파악으로, 
노자가 제창한 '현감'은 현원에 대한 것처럼장자의 '심재' '좌망' '조철'은 관도를 논하는 방법이고,
남조 송의 산수화가 종병의 '징회관도' '징회미상'도산수화의 예술적 이미지를 통해
도(道)에 대한 심미적 관조를 실현하는 말이기도하다. 이 때문에, 중국 고대 도가의 "도" "진"은
짙은 미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서복관은" 장자가 그것을(按:指道 다음과 같이 가리키다) 인생의 체험이라 여겨 진술 하고,
우리가 이러한 체험에 대응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는 철두철미한 예술정신이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서양의 "진"은 순수인식론의 범주이며
예술비평에서의 진실성 문제는
인식론의 진실원칙인 예술분야에 투영된 것에 불과하며, 반면 중국 고대의 진은 궁극적인 초월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진"과 미의 통일을 실현하였다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도"와 문예의 관계도 중국 문예 이론의
중요한 문제이다.
荀子는 문학의 '명도(明道)'를 내세우며
그의 도가 유·도 양가의 학설을 합쳤으며,
사회 정치의 성인의 도이자 자연 천도이며,
당나라 한유고문운동에서는 유가의 도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산문창작을"문이재도" "문이명도 "로 제의하였고 송대 시가에서 사람을 대하는 시 역시 문예에 치우쳐 도와 이에 대한 진리성을 밝힌 것이다.
'체도' '달도'를 문예의 목표로 삼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으며, 문제는 이 '도'가 진짜 도인지, 아니면 허망한 도덕 설교인지에 달려 있다.
노장과 위진 시대의 "관도"는 바로 높은 수준의 심미적 활동이다.
당연히 관도의 방식으로 보아야하지만
 예술적 이미지에 의한 심미적 관조인지
논리적 추리를 구사하는 논증인지
곧 시적 사유이고 역시 사적 사유이다.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것은
단지 내가 이 산 속에서 있기 때문과
도랑이 어떻게 해야 이와같이 맑은가를 물으니
수원(水源)이 있기 때문에 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등 송대의 철학시가 무엇 때문에
예술적 생명력을 오래 유지했는가의 원인은
바로 그들의 "도"에 대한 시적 직관 때문이다.
그래서 미는 결코 진리를 배척하지 않고,
반대로 그것은 여전히 진리를 인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이것은 바로 '도', '진리'가 '진'이 되는
미학 본성의 내포된 원인이다.
'진'의 세 번째 층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자연이다.
한방면은 심미 창조와 관련이 있는데 진기,
천기를 가리키는 자연적스러운 표출인데
즉 일종의 자연적으로 드러나는 창조방법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의 원모습과 원래의 자연 상태와 심미의 예술적 특징을 가리킨다.
노자의 시대에는 "천"이란 명사적 자연을 가리키고 또한 "자연" 은 고유명사가 아닌 "연" "성" 이다. "자연"은 "자성"을 가리키고 자연스럽게
어떤 모양으로 변하게되는 것이다.
차재(車載)는 "'노자'의 전책(全書)에서
 '자연'을 한마디의 문자로 언급하고 있다.
다섯 군데에 걸쳐 있는데...... '노자' 책은 '자연'이라는 낱말을 제시하여 각 방면에서 운용하고
이제까지 그것을 객관적인으로 존재하는 자연계라고 보지않고 자연이란 말을 구사하고 자연스럽게 인위를 가하지 않은 그러한 상태를 알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장자'에서 "지금 내가 하늘의 뜻을 알고자하나
그 까닭을 모르겠다. 고 하였는데 ,
이른바 "천기"는. 사실 사물의 변화한 내면의 구조를 가리키며  그것은 주관적인 노력이 필요치 않으며 역시 의지에 좌우되지 않고,
"마음이 가는대로 대로 하고자 하나 도를 넘지 않는다."는 자유자재한 기민성이다.
불교가 중국화 하는 과정 중에 위진의 현학과 융합하여 사람의 성정이 자연히 드러나는 합리성을 인정하여 이로 인해 중국 불교 역시 "자연"을 말한다. 이른바 자연은 운명에 맡기는 것으로 누구도 만들 필요가 없고 조금도 부자연스러움이 없다.
이것은 하나의 운명에 맡기거나 인연을 따르거나 마음에 드는 정신적 한계 역시 모든 분별 대립의 지혜 직관을 제외한 것이고 세속의 마음과 일상 생활의 부주의한 표출이다.
바로 "진기" "천기"로 인하여 우발성과 폭발성의 만날 수는 있어도 구할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예술 창조 중에 조금만 방심해도 지나가 버리는 영감과 비슷하여 이루말한 수 없는 묘미, 
인공적인 것이 천연적인 것 보다 나음을
형성하여 인간에게 이름에 맞지 않은 심미적 즐거움을 주고 그것은 특정한 심미창조의 성격을 갖게 하여 준다.
중국 고대의 예술론은 줄곧 진기천발에
대해 자연이 무심코 얻은 묘수에 대해서는
일할 마음이 없으면서 스스로 만든 예술작품은
높은 평가를 주며 심혈을 기울여 구상하고
노심초사한 작품에 대한 평가는 매우 낮았다.
육기는 문학 창작에 대해 말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감응의 기회가 있을 때 통하거나 막히거나의 질서는 오는 것은 막을 수 없고 가는 것은 정지할 수 없다.
재와 같이 숨겨진다 해도 움직이면 울려 퍼짐과 같다.

......이 때문에 혹은 정성을 다하거나많은 후회를 하거나 혹은 성의를 다하면 잘못을 적게 범한다.
비록 만물이 나에게 있지만 여력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때로 빈 가슴을 어루만지며스스로 안타까워하고  나는 남편이 열고 닫는 순라 꾼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서법상에서 왕승건은 " 书笔相忘 "의 요점을 말했다. 즉 외양과 정신을 겸비한 효과에 도달해야 하고 "번드시 마음은 붓을 잊고 손은 글을 잊고 마음과 손은 감정을 잊어 글씨와 붓이 서로를 잊는다.(서로 하나가 된다?)
곧 지혜를 짜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최고의 창조적 경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마음의 지혜를 잊어야한다.
그들은 예술의 창조에 대해 정서작 표현의 작품이라면 고도의 인정을 하여 주었고 반면 기예에 편중 되어 재현한 류의 작품에 대해서는 폄하하여 비난해 고도로 발달된 사의성 예술 정신이 형성되었다. 참된 자연이 내포하는 것으로부터 지적하는 바의 원모습, 본래의 자연상태로 말하면 사물자체의 법칙에 따라 자연히 만들어지지만 가식적이지 않는 심미풍격인 것이다.
도가는 본진(本真: 바르고 솔직하다 )을 제창하고 본래의 순수함과 순박함으로 돌아감을 주장하며 그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다.
《장자》에서 말하길 "소와 말의 사족(四足)을
하늘이라고 하여 말의 머리에서 떨어지거나
소의 코를 꿰는 것을 사람이라 한다. 
 고로 말하기를 사람은 하늘을 멸망시킬 수 없고
고의로 목숨을 멸할 수 없으며 순명(殉名)할 수 없다.  신중하게 지키어 잃어서는 안되는 것
이것을 일러 반기진(反其眞)이라한다."
여기서의 "真" 즉 “天”은 사물의 고유한 자연본성을 가리키는데 이와는 반대로 소와 말의 자연 본성에 대한 견제이다.
《장자·어부》에 말하길 "예라는 것은 세속에서 행하는 것이고 진이라는 것은 그래서 하늘에서 받은 것이어서  자연히 쉽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늘의 소중함과 진실함을 본받고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다. ”고 하였다.
여기의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진"은
세속의 "예"와 상대적인데 천성은 끊이지 않고 쌓여간다고 생각하고 경계하는 사람이 이화되면 사람은 "진"의 경지에 도달 할 수 있다.
도가의 "도"는 또한 일종의 마음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도가는 꾸미는 일없이 소박하고 순수한 진실한 사상은 중국 고전 미학이 아직 희박하고 오히려 소박하고 또한 사상의 근원이다.
위진 시기의 인물평가 가운데 "청"에 대해 매우 숭상하였고 문학평론에서도 역시 이러하였다.
육기가 이르길 하나의 '청(清)'자를 써서
육기의 작품을 간단히 요약하였는데
 "청은 묘하게 서로 이어져 있고"
"청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묘함"을 갖고
있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연꽃은 물에서 나온다 "는
 " 자연스런" 아름다움은
위진시대에 " 문구를 다듬다 "와
"장식 "의 아름다움은 서로 상대적이다.
당대의 시가 창작에서 산뜻하고
질박한 시풍을 특히 숭상하였다.
이백은 "건안이래로 아름다움은 진귀한 것이 못된다.
 " 시를 짓는데 반드시 "성세(聖世)의 먼 옛날로 돌아가 옷을 드리우며 참된 것을 귀히여긴다.
" 시가는 마땅히 "순수함에서 연꽃이 나오고
천연은 지나친 묘사를 제거한다. " 하며
맥락도 모르고 덩달아 흉내내며
한단(邯郸)에 가서 걸음걸이를 배우는 식으로
시를 너무 다듬으면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시로 하여금 "천진 "함을 잃어버리게
한다고 보았다.
이른바 “미사여구로 글을 꾸미는 것은
자연 그대로의 참됨을 잃어버린다. ”
라 하는 것은 도가와 불가가 본진의
미학정신을 숭상하여 시가예술에서 구현한 것으로 보아, 한부(漢賦)의 번잡하고
조리 없이 문구를 다듬는
지나친 묘사의 아름다움을 종식시켰다.
“진”의 제4층(第四層)의 의미는 심미 주체의
"진인"을 즉 사람의 참된 성정
참된 정신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술 창조 주체와 수용 주체에 대한
소질 요구 즉 참된 인간답게 행동해야
함을 바란다.
유가는 " 안과 밖이 도에 맞다 "는
것으로부터의 내외의 미를 겸하여 성의 있는 학문을 말한다.
유가 경전에서 "인"은 원래 "미"와 상대적인 개념인데 "인"은 개인의 기질 수양 등의 훌륭한 덕성이고 "미"가 지시하는 것은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문왕, 주공이 예법을 정하고 악률을 제정하여
주대가 남긴 귀중한 유산은 일련의 예의 제도인데 사회생활에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 일
모두 그에 상응하는 예절이 있는데
예를 들면 제례, 상례, 결혼식, 영빈례, 하객례
관례를 올리는 것 등등이다.
공자는 일찍이 예에 매우 흥미를 느꼈으며,
아울러 일찍이 노자(아버지?)께 예를 물었다.
그는 주나라 말기 노예사회의 예법이 파괴되는 
 현실에 대해 몹시 뼈저리게 느꼈다. 
 단지 그는 "주례"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오로지 강제명령으로는 불가능하고
반드시 내재된 도덕의 필요에 의지해야 했다.
동시에 그는 많은 예의 범절이 완전히 형식에 매여 이로 인해 그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로 돌아가는 좋은 방책을 찾아
그리하여 그는 내재된 "인"을 찾아냈다.
공자는 예의 본질이 의식의 꾸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역시 겸손함에 있지 않으며 슬피 우는 등의 외재적인 표정과 태도에도 있지 않고 내심의
진실한 생각에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제사는 있는 것과 같고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신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예의를 외부의 규범 약속으로부터 인심의 내재적 요구로
변화시키며 중국 전통사상의 전형을 잉태했다.
즉 외적인 것에서 내면으로 향하고 외적 행위에 
 치중하는 것으로부터 내적 동기로 전향하였다.
안과 밖이 일치하고 겉과 속이 같은 것은 유가가 군자에 대한 기본적인 요구인데 즉 외관과 내용면이 잘 조화를 이룬다.
그들은 내적 미와 외적 미의 통일을 중시한다.
이 점은 도가와는 크게 다름이 있고 도가는
본체의 신실함을 중시하고 외재미를 경시한다.
《장자》 에는 일군의 외적인 이미지가 추한 졸렬한 자와 무질서한 자가 있는데 그들 외모의 기묘함이 내면의 정신미를   더욱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회남자》 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인은 숨어서 만물을 위해 먼저 이끌지 않고 일이 닥치면 제압하고 물건이 오면 응한다.
그 겉을 꾸미는 자는 그 안을 해치고 그 정을 돕는 자는 그 마음을 해치고 그 글을 보는 자는 그 바탕을 가린다.
잠시라도 바탕을 위하는 것을 잊지 않는 자는 반드시 본성에 억매인다.
백보를 가는 중에 그 모습을 잊지 않는 자는
반드시 그 모습에 피로하게 된다.
그러므로 날개가 아름다운 것은 그 뼈를 상하게 하고, 지엽이 아름다운 것은 뿌리와 줄기를 해치게 되는데  이 두 가지를 할 수 있는 자는 천하에 아무 것도 없다.
바로 천하에 내외를 겸한 아름다움이 없다면 외재미가 반드시 내재한 아름다움을 해친다. 이로 인해 내재미를 돋보이기 위해 반드시 외재미를 피해야 한다. 이것은 유가 도가 양가가 아름다움의 내재와 외재에서 관계상의 확연히 다른점을 표현한다 . 유가미학 사상 가운데 특히 심미적 창작의 주체와 작품의 통일, 즉 인간의 됨됨이와 글을 짓는 통일에 중점을 두고 사람과 글이 상호 검증된 문예비평의 표준양식을 형성하고 있다. 
창작자의 각도에서 볼 때 글을 쓸 때는
먼저 사람의 됨됨이가 되어야 하는
작가의 수양을 중시한다.
《맹자•공손추상》 에 “나는 이치에 맞는 말을 하며 나의 호연지기를 잘 키운다"라고 하였다.
맹자는 반드시 먼저 작자로 하여금
내재된 정신적 품격의 아름다움을 갖게 하여
 "호연정기"를 길러야 진정한 아름다운 언사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양기"는 자기의 고상한 사상적 정서와
도덕적 품격을 키우는 것이고 단
"양기"가 있어야 비로소
"지언(知言:이치에 맞는 말)" 할 수 있어서
곧 어떠한 좋은 작품도 써낼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문예 창작 방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작가가 인격 수양을 하고 자기의 고상한 정서를 길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지언양기" 설의 "기"는 사람의 내면에서
가장 본질적인 의미를 잡고 후세 사람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인문학 이론과 문학비평 가운데
중국 고대 문론사에 기품 있는 논문의
오랜 전통이 형성되었다.
“以意逆志”와 “ 知人论世”의 문예비평 방법은
바로 이 사상의 집중적인 구현이다.
”맹자는 "본래 시를 말하는 사람은 문으로써
사를 해치지 않으며 사로써 지를 해치지도 않고
뜻을 잘못 보지 않고 대의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그것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맹자는 독자는 마땅히 자기의 의지, 
경력에 따라 작품을 체험하고 이해 해야 하며
문구에 얽매이지 말고 어휘를 끝까지 파고 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知人论世(지인논세:인물을 평가하고 세사의
득실을 논하다)"는
《맹자•만장하》 에서 제시한 말인데
"그 시를 찬양하고 그 책을 읽었는데
그 사람을 알지 못할 수 있는가?
이것이 세상을 논하는 것이요
이것이 벗을 높이는 것이다." 라고 했다.
맹자는 독자가 문학작품을 읽을 때 작가의 경험과 품행 작품 창작의 시대적 배경을 통찰하고 작자의 각도에 서서   작자와 친구가 되어 작자의 사상 감정을 체험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작가의 작품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있다.
바로 김성탄이 《读第五才子书法독제5재자서법》 에서 말한  " 대체로 책을 읽으면 먼저 책을 쓰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 알아야한다. "는 것과 같다.
"知人论世(지인논세:인물을 평가하고 세사의 득실을 논하다)"는
《맹자•만장하》 에서 제시한 말인데
"그 시를 찬양하고 그 책을 읽었는데 그 사람을 알지 못할 수 있는가?
이것이 세상을 논하는 것이요
이것이 벗을 높이는 것이다." 라고 했다.
맹자는 독자가 문학작품을 읽을 때 작가의 경험과 품행 작품 창작의 시대적 배경을 통찰하고 작자의 각도에 서서  작자와 친구가 되어 작자의 사상 감정을 체험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작가의 작품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있다.
바로 김성탄이 《读第五才子书法독제5재자서법》 에서 말한 " 대체로 책을 읽으면 먼저 책을 쓰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 알아야한다. "는
것과 같다.
"知人论世(지인논세:인물을 평가하고 세사의 득실을 논하다)"는
《맹자•만장하》 에서 제시한 말인데
"그 시를 찬양하고 그 책을 읽었는데 그 사람을 알지 못할 수 있는가?
이것이 세상을 논하는 것이요
이것이 벗을 높이는 것이다." 라고 했다.
맹자는 독자가 문학작품을 읽을 때 작가의 경험과 품행 작품 창작의 시대적 배경을 통찰하고 작자의 각도에 서서   작자와 친구가 되어 작자의 사상 감정을 체험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작가의 작품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있다.
바로 김성탄이 《读第五才子书法독제5재자서법》 에서 말한
 " 대체로 책을 읽으면 먼저 책을 쓰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 알아야한다. "는 것과 같다.
"知人论世(지인논세:인물을 평가하고 세사의 득실을 논하다)"는
《맹자•만장하》 에서 제시한 말인데
"그 시를 찬양하고 그 책을 읽었는데 그 사람을 알지 못할 수 있는가?
이것이 세상을 논하는 것이요
이것이 벗을 높이는 것이다." 라고 했다.
맹자는 독자가 문학작품을 읽을 때 작가의 경험과 품행 작품 창작의 시대적 배경을 통찰하고 작자의 각도에 서서 작자와 친구가 되어 작자의 사상 감정을 체험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작가의 작품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있다.
바로 김성탄이 《读第五才子书法독제5재자서법》 에서 말한 " 대체로 책을 읽으면 먼저 책을 쓰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 알아야한다. "는 것과 같다.
“인물을 평가하고 세사의 득실을 논하다(知人论世)" 는 말과 "대의를
제대로 파악함(以意逆志)" 의 말은
작자 독자 작품의 삼자가 통일되어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중국 고대 문학 비평에서 하나의
기본적인 방법이다.
설설은 《一瓢诗话:일표시화》에서
"시원시원한 사람 시는 반드시 소탈하고 인정이
두텁고 후한 사람 시는 반드시 정중하며
기개가 있는 사람 시는 뛰어나며
시원시원한 사람 시는 반드시
유창하고 아름다우며
원할하지 못한 사람 시는 반드시
메말라서 이러한 하늘이 준 기운의
받은 바는 배워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바로 창작 주체의 성격, 기질, 감정 등이 작품의 특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유희재는《艺概•书概 예개•서개》에서
서법 예술과 서예가의 관계에 대해 "서는
이와 같다,
그 학문과 같고, 그 재능과 같고, 그 뜻과 같은데,
한마디로 말하면 그사람과 같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시품은 인품에서 나온다"
좋은 시를 짓는 열쇠는 "그 가슴에
炉锤(뜨거운 열정과 예리함?)가지고
있어야 한다." 라고 말하여 저자의 포부, 인품과 작품 사이의 대응관계를 확인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글씨는 정과 같고"
"시는 의지를 표현하며"  "그림은 사물의 형식보다도 그 내용 정신에 치중하고"  "음악은 마음을 닮게 하는" 등 예술형식과 인간 내재 심리 구조 사이의 대응 관계는 중국 고대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었다.
전종서가 《谈艺录 담예록》에서 말한 바
 "중국문학 이론의 특색은 가까이에서
취하여 문장으로 사람을 의인하고,
문장으로 사람을 의인하여 이 외양과 정신을
 일관되게 하여 문장의 바탕을
서로 소통시키게 한다"와 똑같다.
“真” 의 다섯 번째 뜻은 문예 작품 내의
진실성 문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것은 유가문예 이론의 기본 문제이자
서양의 전통적 진실성 이론과
가장 비슷한 점이다.
공자 이전에 유가(儒家)의 서적 중
진실과 가까운 몇 가지 개념은 역사적 사실(事實)과 사실의 진실 존재를 표시하는 것으로
역사와 부합되고 사실과 부합하며
민심(民心)에 부합함을 사실 있는
그대로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尚书》《春秋》가 원래 역사적 사실 류의 문헌과 관련이 있고 유가가 현실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갖는 것과도 반드시 관련이 있다.
또한 《周易》은 점을 치는 책으로
현상의 실재성에 대한 진실성 요구는
말할 필요도 없다.
공자의 이전 서적이 사가정신이 풍부하다고 할 수 있는데 육경의 모든 역사는 바로 이런 뜻이다.
그들의 "真" 은 일종의 사가실록의 진이며,
역사의 진실 사실의 진실이다.
동한사학자 반고는 《汉书•司马迁传赞
,한서·사마천전찬》에서
《사기》 는 "그 글은 곧고, 그 일은 진실하며,
허미하지 않으며, 악을 숨기지 않으므로
실록이라고 한다." 고 하였는데 사마천의
"실록" 정신을 충분히 긍정한다.
실록이란 역사적 사건의 진실성을 존중하고
객관적으로 사건의 본모습에 따라
저술하는 것이다. 
 이런 "진"은 중국 사가 정신의 근본이며,
"존자를 위해 꺼리지 않는다."
"장자를 위해 꺼리지 않는다. "
모든 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사가의 엄청난 힘을 보여 주었는데
이른바 "공자는 《春秋》를 이루었으나
난신적자는 두려워한다."고 했다.
공자의 문예 미학에 대한 중요한 공헌은
"시는 볼만하다"는 그의 제안에 있는데
중국 문학의 사실적 전통을 확립했다.
공자는 " 《诗》는 흥할 수도 있고,
볼 수도 있고, 무리지을 수도 있고,
 원망할 수도 있다.
가깝게는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요,
멀게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다.
새와 짐승과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다."고 말했다.
"观" 은 시가는 사회의 현실을 살피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사회 풍조의 성쇠와 득실을 볼 수 있다.
관을 정현은 "관은 풍속의 성쇠"라고 풀이했고
주희는 "득실을 관찰하여 알아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모두 시가의 감상 활동이며
일종의 인식 활동으로 여긴다.
《左传 • 襄公二十九年》은 " 계찰관악"의
기록은 바로 그 예다.
계찰은 오나라의 공자인데,
노나라에 이르자 악공이
그를 위해 각국의 시가를 불러주니
계찰이 시가가 반영하는 민심의
사회풍조에 대해 일일이 논평을 하였다.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는 효과에 도달하려면
먼저 문학은 반드시 사실을 사실적으로
기록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것은 사가의 실록정신과 상당히 일치한다.
사실의 실록성에 대한 유가사적 요구는 중국 문학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크며 사전문학이 신화, 전기, 소설 등 허구문학에 크게 발달한 것으로 표현된다.
또한 중국인들은 종종 역사서를 문학작품으로 읽고 시가를 역사적자료로 삼아 연구한다.
《史记 사기》는 역사책의 유파(流派)
절창이라고 부르며 운이 없는
이소로 불리며 두보의 시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 시로 불린다.

   离骚 <<이소>>는 전국시대 유명한 시인 굴원의 대표작으로 중국 고대 시가역사상 가장 긴 한 편의 낭만주의적 정치 서정시 이다.

다른 기사류의 문학작품은 항상 정사의 보충으로
여겨지며 이른바 공무를 도와주는
것으로 역사의 지류이며 바로 역사의 미비 함을 기록한다.
이것이 바로 소설의 "역사 보충" 학설이다。
이러한 사가실록의 전통이 소설의 원천인 현실 생활을 형성하고 세상의 교화로 이로움이되고 선을 권하고 악을 경계하는 현실인생을 배려하고 있는 그대로 진실을 추구하는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백거이는 《新乐府序 신악부서》에서
"그 일의 핵심이 진실하여
채취한 자로 하여금 믿음을 전하게 한다."
라고 했다. "
"그 일의 핵심이 진실한 것"이 역시 바로 사건의 진실성임을 주장했다.
종합하면, "진"은 미학과 문예 미학의 범주로서
심미활동의 각 방면에 나타나며
인생 경계론의 생명에 대한 참뜻이 있고,
심미본체론의 진리의 진실,
심미창조론의 자연진기,
심미적 태도의 자연 본래의 진,
심미 주체의 성정의 진실,
심미작품론의 내용적 진실성은
중국이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색의 완전한 체계를 형성하였다.
마찬가지로 알 수 있듯이,
중국 '진(真)'미학(美學)이 내포한 것의
몇 가지 면은 선진(先秦) 때의 유교 도교
양가에서 사상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의 역사가 이어지는
맥락을 알 수 있고, 일종의 공시성(어떤
특정한 시기의 성질)과  역시성(어떤
시기를 종적으로 바라보는)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리하여 서로 교화,
흡수, 전환을 했고,  시기에 따라 다른 특질을
보였다. 예를 들어 한대 미학은 내용이
진실한 것을 중시하고,
위진은 생명본체의 진실을 중히 여기고
당송은 도와 이치의 진을 중히 여기는
가운데 명말에는 주체의 진실을 중시하였으나
질박하고 진실한 풍격의 진심미가 빚어낸 자연의 진실은 역대로 추앙받고 있으며,
생명 본체의 진을 중시하는 것은
오직 중국 회화의 미학을 일관되게
추구하고 소설·연극의 미학에서
융통(그때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
일을 처리하다)하는 것이다.
중국 철학사상에 있어서 어떤 완전한 체계가 있다는 학설은 인생의 궁극적 귀속에 대한 생명학을 담지 않는 사고가 없고, 우주, 인생의 큰길, 진리, 본체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아울러 각자에 맞는 수도법이 있는데
시문은 중국에서 줄곧 인생의 수양으로
중요한 방법이 되어 왔다.
중국의 철학자들도 종종 문학가들이었고,
그들의 사상 체계에는 인간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사고가 적지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철학사상은 종종 그들의
문예미학사상과 한데 어울렸다.
태주학파도 이러한데
그들은 거룩한 삶의 최고 경지를 지향하며,
인생의 궁극적 진리와 최고의 본체를 캐묻고 서민층에게 유가의 교리를 보급하는 과정에서
방법론적인 지도를 자주 하고,
그리고 적자동심을 지키고 함양하는 것에 대한 진인을 만드는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을 그들도 모두 시문의 형식을 통해 형상화하고 이지에 이르러 문학 자체에 대한 탐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무튼 태주학파의 진을 추구하는 사상도 이 다섯 가지 차원에 걸쳐
온전히 전개되었고 과거 걸출한 유학과는 다른 국면이 형성되어
명말의 문학해방 사조에 대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지는 중국의 16세기 위대한 초기
계몽 사상가이다.
그는 선지자라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대의 갈등과 사회발전을 깊이 통찰하며 의사일정을 문제 삼으며
비범하게 앞서가는 의식과 담력으로
중국 전통사상문화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인생의 참뜻을 탐구하며, 도덕적 이상주의에서 경험주의에 이르는 이성적 재건에 힘쓰고,
"동심설"을 핵심으로 "학주불기"
"지재구시" 의 새로운 사상 체계를 세웠다.

第一章 大人: 生命的全美真境
第一节 身尊道尊: 休用得兼的
人生至美境界

제 1장 대인 :
생명의 완전한 아름다움의 참된경지
제 1절. 身尊道尊(신존도족 ; 몸도 소중하고 도도 소중하다) :
겸용하지 않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경지

중국 전통미학은 인문학적 특징이 강해
인생의 지선지미를 추구하는 것이 대학,
즉 최고의 학문이다.
왕간은 태주학파를 처음으로 열고 종파를 세운 인물이며 그의 학문적 주장은 바로 탐구와 전파인데 "身"과 "道", "개인"과 "사회"가 잘 어우러진 인생의 최고의 경지, 생명의 최고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유가의 인생 태도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것이고 도가는 출세이다.
유가는 인생의 가치(價値)나
의의(意義)가 언제까지나 길이 전(傳)하여 없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덕을 쌓고', '공을 세우고',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말을 하는' 세 가지 순서를 제공하였다.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함이 덕을 쌓고 공을 세우는 것이 구체적인 방법이며 또한 성인은 유가가 세운
길이 남을 본보기이다.
도가 지혜의 정의는 "외(外)"자에 있는데, 노자는 "성인은 뒤에는 몸을 앞세우고 밖에는 그 몸을 보존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장자는 여우(女偊)의 입을 빌려 "삼일만에 천하 밖으로
나갈 수 있었는데 이미 세상 밖으로 나가 버렸으니 내가 또 그것을 지켰다.
9일 후에 외생을 할 수 있고, 이미 외생을 하였으면 그 후로는 조철 할 수 있고 조철 한 이후에 견독할 수 있고 견독한 이후에 고금이 없고 고금이 없는 이후에 죽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외신", "외천하", "외물", "외생"은
사람이 죽지 않는 방법인 동시에
자신을 세상으로 만드는 방관자이며, 관객의 눈으로 주위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이것 역시 무엇 때문에 도가 철학이 미학적인 특질이 풍부한 이유일까 왜냐하면 도가는 본래 신분을 방관하는 심미자이기 때문이다.
유가와 달리 그들은 참가자 신분으로 세계라는 이 큰 무대에서 역할 연기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인생태도로
자신의 역할을 하는가 하는 것은 유가 안에서 차이가 크다.
유가의 전형적인 인생태도는
"궁하면 자신만을 올바르게 하고, 현달하면 구제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유가의 생존지혜이자 벼슬길에서 실의에 빠진 선비의 마음을
치유해 주는 이야기이며 "궁하면 자신만을 올바르게 하는" 것은 비록 도가
"외천하"의 경지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은거의 의식은 매우 뚜렷하고,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도피적인
태도를 취했다。
왕간(王艮)의 인생 태도가
“독선(独善)” 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고, 공자를 특히 추앙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그를 내세웠다。
"나가면 반드시 제왕의 스승이 되고
처한 곳에서는 반드시 천하만세의 스승된다"는 것은 영달하면 국가를 위하고 궁하면 천하를 위한다는 주장이다. 먼저 그의 공자에 대한
평가를 좀 보자,  기록에 의하면 :
이윤(伊尹)과 부열(傅说)은 스승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
"이윤과 부열의 일은 내가 해서는 안 된다. 이윤과 부열의 학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문인이 물어 말하길 :
"무엇이라 이르는가?"
말하길 : "이윤과 부열이,
임금의 신임을 얻어
뜻밖의 만남이라고 할 만 하며
그 우연하지 않음이 없고 종신토록
독선 할 뿐이다. 공자가 곧 그러하였다." 왕간이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마음 속에서 공자는 가장 위대한 성자였고 심지어는 고대의 현상인 이윤과 부열보다 한 단계 위여서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윤, 부열의 상황을 가지고 왕간을 칭찬할 때에
그는 곧 매우 못마땅해 했다.
심재는 잡념을 물리치고 마음을 허정하게 하고 순수하게 하는 밝고 올바른 길이라 한다.
집 안의 잡동사니를 청소해야 더 많은 물건을 넣을 수 있고 내려놓으면 더 좋은 것만을 위해 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가 보기에 이윤과 부열 두 사람은 상왕인 탕과 상왕인 무정의 중용을 받고 완전히 좋은 기회와 호의로
스스로 노력한 결과가 아니었고
그들 역시 기회가 좋지 않았더라면
그들도 "独善其身(자기 한 몸의
선만을 꾀하다)"만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오히려 다르다.
왜냐하면 "공자는 춘추의 군주를
만나지 않은 것 역시 운명이기도 하였다.
또한 천하의 명도가 아름다운 이 사람으로서 널리 유행됨이 운명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늘의 백성(사람)이라면 운명을 따르리라.
그러므로 대인군자는 운명의
주재자(主宰者)라 한다.
”만남” 과 “만나지 않음” 이 운명에 속하지만 만약 만나지 않는다면 자신만을 위한 것 외에
더 좋은 선택이 있을까?
바로 공자가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학문을 강의하여 세상사람으로 하여금
도를 알도록 한 것이다.
독선기신이란 운명에 맡기는
"천민(天民=일반사람)"에 지나지 않으며 도가에 해당하는 성인, 진인은 운명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에 
 “大人君子(대인군자)” 라고 불릴만하다.
왜 “대인” 의 인생경지가 “천민”에 비교하여 한층 높은가?
왜냐하면. “천민”은 몸과 도의
두가지를 다 갖춘 삶의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곧 " 지극한 선에 그쳤다."
왕간은 이것을 "유말(遺末)"이라 여겼는데 그는 천지 만물을 위태롭게 하는 자 그것을 일러 근본을
잃었다고 하고 천지만물을 깨끗하게 하는 자 그것을 일러 유말이라 한다.
입신만을 아나 도를 행함을 모르고
도를 행함을 알지만 입신을 알지 못한다면 한쪽으로만 치우친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의 인을 간직하고 일을
함에 있어서 의를 따른다면 대인의
일은 준비되는 것이다.
지선에 머무른 자는 입신한 것이다.
입신한 자는 천하의 큰 근본을 세운다.
근본이 다스려지면 끝은 다스려지고
자기를 바로 세우면 사물이 바르게
되는 것은 대인의 학문이다.
이런 까닭에 자신(身)은 천지만물의 근본이다.
; 천지 만물은 끝(末)이다.
자신을 아는 것이 근본이기에 이런 까닭으로 명덕을 밝게하여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서지하지 않으면 근본이 서지않는다. 
 근본이 어지러우면서 끝이
다스려진 자는 없다.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서 끝을
다스리면 더욱 어지러워진다.
라고 말했다.
왕간은 잡념을 물리치고 마음을 허정하게 하고 순수하게 하는
길(心斋)이 몸은 천지 만물의 근본이고 천하 국가와 천지 만물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본말관계는 중국 고대 철학에서
실체와 응용관계이며 봉건사회에서 나온 체용관계는 실질적으로 나와 벼슬(출세)의 관계이며
선비와 임금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왕간은 자신과 천하국가와의 본말관계에서 말하자면 선비가 나와 관리가 되는 것은 조정을 위한 일이며, 이익과 관록을 위해서든 자기의
정치적 주장을 실행하기
위해서든 자기 자신을 해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삼았다.
그는 "벼슬은 관록으로 혹은
몸을 해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벼슬을 하면 봉록으로 몸을 해치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벼슬은 정치를 행하는 것으로
몸을 해침에 이르고 벼슬을 해서
다스림으로 몸을 해쳤거나 하는 일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그는 또 “몸과 도는 원래 하나이고 지존자는 이 도요, 지존자는 이 몸이다.
존귀한 몸은 존귀한 도가 아니어서
그것을 존귀한 몸이라 하지 않고
존귀한 도는 존귀한 몸이 아니어서
그것을 존귀한 도라 하지 않는다.
모름지기 도사가 스스로 존귀해야
비로소 가장 숭고한 선이다.
그러므로 천하에 도가 있으면 도로써
목숨을 바치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몸으로써 도를 위해 죽는다.
반드시 도가 사람을 위해 몸을 바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신”과 “도”가 상호 의존적인
통일체이며 다시 말해 조정에
"나가든" 아니면 재야에
' 처하든" 모두 신”과 “도”의 양쪽이 원만해야만 "지선" 된 다고 여겼다. 왕간의 이 논리는 맹자에 대해서
바로 잡는 것이다.
맹자는 물고기와 곰 발바닥,
생과 의의 취사에 관한
기본적인 입장을 가지고
그것은 물고기를 버리고 곰을 잡고
자신을 버리고 의를 취한 것이다.
맹자가 "생"과 "의" 의 관계에 미리 전제를 두었는데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는 없지만, 심재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몸"과 '도",
"생'과 '의"를 겸비한 지선지미한
삶의 경지다.
구체적으로는 "출"와 "처"의 물음으로
되돌아가면 모두가 겸선의 문제가 있다.
그는 '출'의 겸선이 "제왕의 스승"을 위한 것이고 “처”의 겸선은 "본받아야 할 모범"이라 생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장부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마음
있어서 하늘과 땅과 만물이 자기에게 의지하며, 그러므로 나가면 반드시
제왕의 스승이 되고 처하면 반드시 천하
만세의 스승이 된다.
나가서 군주의 스승이 되지 않으면
그 근본을 잃고 처해서 천하 만세의 스승이 되지 않으면 그 마지막을 남길 뿐이다.
그는 만약 “출”하여 임금의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이런 “출”은 억지로 “되는대로 소홀히”하는 것이고 권세는 그 몸을 지치게 하고 그 근본을 상하게 할 것이다.
또한 “처”하여 천하를 교화하지 못하고
천하만세의 스승이 된다면 자기 한 몸의
선만을 꾀하고 그 마지막을 남길뿐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는 '"임금의 스승"이 될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왕이 법을 행하게 하려면 반드시
법을 취하고 경의를 다하고
그것을 배워서 신하가 이를 행하도록 한 다음 그말을 듣고 따르면 왕은 수고하지 아니하고도 왕도를 행 할 수 있다.
만약에 왕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곧 떠난다."
그런 날이 있으면, 임금이 매우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와서 '왕' 천하 이치의 가르침을 청하여 제왕이 경배하며 "나"를 스승으로 삼고자하면
그래야 "나"가 그의 보좌가 되고,
왕이 말을 듣고 따르게 하고
이렇게 하면 "일하지 않고 왕"을 할 수 있고, 유가(儒家)에서 이르는 바의
"소왕(덕(德)을 갖춘 사람)"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서둘러 떠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두 가지 결과가 발생한다 :
혹은 자기의 길을 고집하여 제왕을 거역하고, 반드시 몸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곧 순도( 殉道 : 도의(道義)를 위해 죽다)이다.
또는 자신의 원칙을 버리고
도로써 순인(특정한 사람을 위해 순직하다)하는
이러한 도는 단지 "순순히 복종하는 사람"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 " 그 존귀한 믿음을 기다리지 않고,
옥을 마음에 품고 행함을 추구하고
남을 위해 힘쓰고 나에 있어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그 도가 어떤 까닭으로 가능하겠는가? 도가 안 되면 출가해도 그만이다." 라고 하였다.
그는 또 "군자가 준수해야하는 것은
자신을 닦고난 후 천하를 평정한 것이다.
만약 도의로 사람을 따른다면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존중하며(尊重) ,
믿고 이행하며(信奉),
신임(相信) 할 수 없는데,
어찌 저들로 하여금
존신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대에게 간하다가 혹 듣지 않으면
수치스럽고 위험한 정도에 이른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역사에서 이런 "도존신존(道尊身尊)"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공자와 맹자 단지 두사람 뿐이고, 그 다음엔 그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성학가기라념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과 땅의 주재자를 장악하여 천지의
참된 마음의 본성(本性)을 포괄한다.
옛부터 영웅은 누가 될 수 있었는가,
천지개벽이래 오직 중니뿐이다.
중니 다음은 맹자, 맹자 다음은 누가 알겠는가?
맹자 이후에 나 아니면 또 누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왕간의 잡념을 물리치는
진취성 있는 정신이고 그는 이를 "출처의
커다란 핵심"이라고 불렀다.
그는 "공자의 학문은 맹자만이 알고
한퇴지는 공자가 물려준 것이 맹자라고
하였는데 정말 한마디로 맞다.
맹자를 보기 위해 거칠게 처신했던
송나라의 모든 유가들이 있어 간과한 적이 많다.
학문적 뿌리는 모두 출처의 핵심에서
기상이 거칠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말했다. 왕간이 잡념을 물리치는
“出”의 핵심은 유교 인문정신의 간단하지만
심오한 말로 큰 뜻을 표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도를 지키되 세를 따르지 않는 것이 도가 있는
사대부 처리와 세가 있는 제왕의 관계에
대한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바로 지식인의 독립된 인격과
자질을 지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공맹 이후에 이런 유교 인문
정신은 거의 다 없어졌고
유생은 제왕과 지낼 때 비천한
자리에 자신을 앉혀놓고
옹졸하고 비겁한 인격을 형성했다.
왕간은 잡념을 물리치는
 "출처대절(出處大節)"은 "처(處)"를 위해
"지선(至善)"에 그치는 삶의 아름다움을
실현하는 하나의 과정을 설계했다.
왕간이 말하길: 처(處)해서는 반드시
 천하 만세에 스승이 되고
말은 반드시 나와 함께 수신과 근본을
세우는 학문을 명백히 하고
법을 세상에 전하여 후세에 전할 수
있게 하였으니 그 후에 반드시 세워 이르고 함께 이르니 오직 수신 하고 세상을 보아 그 자신만을 독선(獨善)하는 자가 아니다.
이 처함에는 마지막을 남기지 않는다.
공맹의 학문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나가는 것은 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도를 위해 죽지 않았고 
그 처함도 배움에 싫증을 내지 않고
가르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 본말이
일관되었다.
이것이 바로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하며 지극한 선에 이르게 함을 이른다.
왕간 생각의 방향은 설사 벼슬을
하지않더라도 "배움에 싫증내지 않고"  
"바닷사람이 지치지 않기"만 한다면
자기의 몸을 닦고 근본을 세워 
대학이 세상에 퍼져 널리 후세에 전해지는 공로가 있고 "立功"하기 위해 또한 자신의 학문을 밀고 나갈 수 있고
"입언(立言)" 하기 위해 자신의 덕(德)을
후대(後人)의 사법(師法)으로 삼고
"입덕(立德)"을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곧 본말이 일관되고
내외가 화합하는 지선인생(至善人生)에
이를 수 있다.
왕간(王艮)의 이 논리 역시
전통 유교인 “사도(師道)”가
말하는 微言大義를 지적했으며
교육의 근본적 임무는
봉건제왕의 실용적 도구가 아니라
도를 전하는 데 있다.
봉건시대에는 학문의 목적을 위해
과거 훈련으로 다스려 깨우쳤으며
공맹의 개인 학문 강의 정신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이 전환의 시작은 순자가 "최고의 선생"인
 "직하학궁(稷下學宮)"이 아닐까 싶다.
직하학궁(稷下學宮)은 제나라의
관학(官學)으로 순자(荀子)는 학궁에 10여 년간 머물면서 세 차례 최고학관인
"제주(祭酒)"를 지냈다.
그래서 왕간의 심재의 마음속에
공맹만이 정통의 강의를 하고 순자의
관학은 그렇지 않았다.
그 자신도 민간 강학 활동에 더욱 열심이었다.
왕간은 한때 학자가 자신의 학술을 보급하는 두 가지 경로를 구체적으로 논증하기도 했다.
하나는 "출(出)"의 방식인데,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학자는 그래서 학문이 스승도 되고,
어른도 되고, 임금을 위한 것이 된다.
제왕은 나의 도를 믿어 존중하지만
나의 도가 제왕에게 전하는 것은 제왕을
위한 스승이다.
나의 도가 공경대부에게 전해진 것은
공경대부들을 위한 스승이다."
다른 하나는 '처'의 방식인데 그 논리는
"다방면으로 몸을 닦으면(修身立体)" 곧 "사도가 서고"  곧 "착한 사람이 많으면" " 천하의 스승"이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수신을 근본으로 하고,
그런 후에 사도를 세운다면 선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한 집에 있는 것 같으면 반드시 수신을 하고 근본을 세워 한 집안의 법을 한 집안의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한 나라에 몸을 담으면 반드시 수신을 하여 한 나라의 법을 한 나라의 스승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몸을 천하에 두면 반드시 수신을 하여
천하의 법을 천하의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 , 이로써 왕간은 “隐”과“见”에 대해 자신의 독특한 이해를 형성하였다.
그는 말했다.
공자는 "제자들이 나를 은둔자라 한다"고 했다.  이“隐”자는 “见”자에 대해
공자는 당시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직업이 없이 제자들과 수신(修身)
강학(敎學)으로 세상에 나타나 하루도
은둔한 적이 없다. 
은둔은 즉 노인과 낙담하는 무리 같으니
비범한 사람은 세상을 피하지만
새와 짐승은 같은 무리인 것은 그뿐이다.
그는 공자의 강학은 “隐(은)” 이 아니라
“见(견)” 으로 "제자들"이 정치적으로
하려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도가, 불교가 세상을 피하는
것에 대해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부귀공명을 경시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그 폐단이 윗사람을 존경하지 않는 
정도에 이른다." 라고 말했다.
왕간은 자신의 강학으로 종신토록 한 선비가 "處"한 상황에서 어떻게 "身尊"과 "道尊"을
실현하여 양립시킬 수 있는
지극히 아름다운 인생의 길을 걸어왔다.
왕간(王艮)을 이어받아 “대인이 운명의 주재자 "를 말한다는 것은 顏钧의
"어천조명(御天造命 :하늘에 올라 운명을 지배한다)"의 사상이다.
안균은 태주학파의 중요한 일원으로 왕간(王艮)의 직계 제자인 서월(徐樾)에게 가르침을 받고 태주를 접하여 귀로 듣고 눈으로 직접 보고(耳提面地) 왕간(王艮)의 "대성인학(大成仁學)"을 만나고 통합하여 평생 포의(布衣)로 강학하여 태주학파에서 두 명의 저명한 제자 나여방(羅如方)과 하심은(何心隐)을 양성하여 태주학파의
사상을 더욱 확대 발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왕간의 "대성인학"에 중요한 내용은
바로 천지만물이 하나의 인(仁)으로 천하를 교화하여 신존도존(身尊道尊)의
완벽히 아름다운 인생을 실현하는 것이다.
안균이 이 학문을 크게 여겼던 것은 자신과 만물을 아우르는 생명의 본질이
바로 천지가 "생(生)"의 큰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학문이 큰 데 모이는 이유는
자기가 태어나 서고 사람이 태어나고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큰 근본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는 인생의 쾌락의 원천으로 자신의 인생과 천하를 구제하는 것으로 꼽았다.
이런 즐거운 인생 미적 체험은 그의 한정된 서적의 시가에서 여러 차례 표현되어 왔다.
어부가 삼각주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나그네가 허허 웃는 것이 당연하다.
웃음 중에 약간은 마음이 없고, 성인과
범인은 그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의 생애는 활달한 것이 아니라
놀이의 기본이다.
이 덕은 태어나면서부터 활달하게 살았던 나그네 웃음의 비결이다.
그대는 오늘 나와 함께 허심탄회하게 웃고 나는 타고난 인물과 웃으리라.
80년 동안 쉬려고 해도 정신적으로 활발하여 근심을 잊은 지 오래다.
그날그날의 깊은 감흥을 따라가서
덕성이 더 훌륭한 모습으로 세월을 보냈다.
존경 받는 사람의 공업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의 뜻을 세우고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마침내 계획되었다.
이는 신연저(神渊底)에서의 즐거움이지
공자가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망녕된
것들이 아니다.
안균은 생명 가치의 확장과 영원 추구하는 것을 기쁨의 근본으로 삼고
 "生"은 최고의 가치로서 태어난다.

p48
그러나 세상을 살아 가는데
"비위에 거슬리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인생의 좌절과 운명에 대한 불이익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피해야 할지, 아니면 무감각할 것인지?
왕간이 물러나 내어 놓은 답은
"도량이 넓은 사람은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이었고, 안균이 내놓은 답은
"나는 하늘이 정해준 것을 받아들이기 싫고
운명을 스스로 지배하고 싶고
그런 삶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이런 정신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이다.
그는 "학문은 적절한 시기에 갖추어
하늘의 명을 받들어 운명을 개척해 나가면 그 가운데 번민과 즐거움이 있고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한다.
끼니를 잊고 침식을 잊고 나이를 잊으면
지극히 신령스러움에 이를 수 있을 뿐이다. ......
나무꾼은 마음으로 깨달아 이해하고
또 맹세하건대 반드시 행함이 있는데 
말하기를 기개는 철처럼 굳고 
 정신은 물처럼 살아있고
몸은 솜처럼 부드럽고
두 눈은 사물(事物)을 똑똑히 살피고
해와 달이 나란히 다가옴을 살핀다.
사물의 중요한 부분을 움직이게 하여
사계절이 틀리지 않음을 관찰하고
자기편에 서서 은택이 때 맞추어 내림을 살핀다.
마침내 칠 일 만에 돌아오니 이익에는 길이 있고
삼 년 만에 성사되었으니 공자의 현설과 같이 시간을 틈타 육룡을 타고 하늘의 명을 받들어 얼마되지 않은 다급한 경우에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했다.
"어천조명"은 생명을 다스리고 초월하여
"어천조명(御天造命)"이라는
성구(成聖)의 추구가 있어
사람은 현실의 침식과 근심 곤궁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도와 공을 세워 출세하여"
자신의 생명력 정신력 등이 모두 범상치 않아 이른바 기개가 쇠처럼 단단하고 정신은 물처럼 맑고 몸은 온화하여 솜처럼 부드럽고 또한 자신의 통찰력은 그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고 우주와 사시의 변화 기상의 변천에 묘하게 일치하여 개체의 생명이 초월되고 승화되어
왕간이 말한 " 大人"이 되었다.
나근계는 태주 학파의 3대 계승자이며
역시 모종삼은 "태주파 중 유일하게
출중한 사람" 으로 간주되었는데
그는 "대"는 시간의 영속과 공간의 무한이고 "대인"은 천지의 모든 것과 하나가 되어 자신의 도덕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말했다. 사람이 큰 사람인 것은 몸집이 크지 않고
도가 크면 배움이 크다.
학문이 크면 도가 크고 도가 크면 몸이 크다. 큰 몸이면 천하만세의 생명과 혈맥이 통하여 참된 마음이 되고 만세에 걸친 화복은 몸 전체라고 생각했고 병이 나고 가려운 데를 치료하여 하나가 되었다. 그것을 대인이라고 부를 뿐이다.
그는 《대학》의 근본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공자의 학문은 인을 구하는 데 있다. 또한《大学》은 공자 문하에서 인을 구하는 내용이 완전하고 흠이 없는 책이다.
대개 인은 혼연동체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대인은 가정 국가 천하에 연합하여 그 몸을 완성한다. 지금 명명덕을 보면 반드시 천하에 있다고 하면  통천하는 모두 내가 덕을 밝히는데 있을 것이다" "덕을 밝히는 것은 촛불을 비치는 것과 같다.
천하에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은
촛불이 온 방안을 모두 밝게 하는 것과 깉다. 촛불은 한 방을 밝히기에 족하지 않으나 촛불은 그 촛불이 아니었다.
밝은 덕을 밝히고자 하면 천하를 밝힐 수 없고 덕은 그 덕이 아니다.
이와 같이 명덕이 되고 대학이 되는데
이를 대인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大人”을 완성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인(仁)'에 도달하는 것으로
완전히 천지만물과 혼연일체가 되는
体大이고 둘째는 명덕을 밝혀 천하를
밝게 비추는 즉 用大이다.
그는 “大人”을 완성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인(仁)'에 도달하는 것으로
완전히 천지만물과 혼연일체가 되는 体大이고 둘째는 명덕을 밝혀 천하를 밝게 비추는 즉 用大이다.
유가의 인(仁)은 역시 體用이 하나로
합쳐진 융통성있는 경지이자
유가의 일관된 길이다. 
나근계는 "一以貫之
(한 가지 이치로 모든 일을 꿰뚫다.)"의
재해석을 통해 그의 체용을 겸하여 얻은
"仁"을 계속 설명하고 있다.
그는 말하길 성문의 인을 구하는 것이
一以贯之 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라는 것(一也者)은 천지만물을 겸하여 내가 그 덕에 서로 어울려 갈등이 없이 화목하게 되는 것이다.
관이라는 것(贯也者)은
하늘과 땅 만물을 통하여 내가 널리
보급하여 활용하는 것이다.
한가지 이치로 근본이 되지 않으면
천지만물은 이와는 달라
스스로 모든 일을 꿰뚫 수 있겠는가!
살아 있는 인이 마음이 되지 않는 것은
즉 천지만물 근본의 쓰임이란 참으로
다함이 없어 어디에서든 스스로 하나로 
통할 수 있고 스스로 꿰뚫어 능히
한가지 이치로 할 수 있다.
나여방 역시 자신의 도덕적 경지인 인(仁)과 사회적 가치의 용, “明天下” 가 결합한 체용(體用)과 일치하고 본말은 하나의 근본인 “大”이며 왕간의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한결같게 하는 “身尊道尊” , 안산농(安山農)의 “生己生人生天下”와 같은 맥락이다.
체용을 모두 갖추었지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태주학파의 전형적인 가치관념과 생명추구이자 그들의 행동지향적이고 강직한 정신의 원천이라고 말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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