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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주학파 미학범주

2 해석만 모음 " 從 50頁 第三 行到53頁)

작성자하전|작성시간22.12.12|조회수60 목록 댓글 0

태주
2.
p50 셋째 줄~p53
제 2 절

광견 : 태주학파인물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인생

왕간은  태주의 대표적 인물인데
“身尊道尊(신존도존)"이자 미의
인생 설계에 대해 이론의 설명이나
공상에만 그치지 않고 완비한 실천가로
각기 특색 있고 전설적인 인생 역정을 통해
우리에게 완전히 아름다운
인격의 모범을 제공했다.
어떤 사람들은 일찌기 왕간의 “保身” 철학이
士人의 “苟且偷生”  에 대한 정신적 보호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명말 청초(淸初) 황종희(黃宗熙)와
같은 사람은 이를 의심하면서 말했다.
"绵蛮함을 안식처로 삼는 법
곤란에 직면하여 구차하게 모면할 기회를
열어줄 수 없다!"
태주 학파의 몇몇 중진인 조대주, 안균,
하심은, 나근계, 등활거, 이지 등과 같은
이들은 모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정의롭고 늠름하게 비장한 삶을 살았고
황종희가 질문하기 전부터 원만하게 이
문제에 대답했다.
태주 학파의 이 전통은
후세사람들에게 “狂” 으로 간주되었는데
그들의 어떤 이들은 "광협"이라 불리며
어떤 이들은 "광유"라 일컬어지고
어떤 이들은 "광사"라고 불리는데
하여간 광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강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들이 단지 어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맨손으로 영웅과 범부(凡夫)를
쫓는 다능성의 뿌리 깊은 원인은
왕간(王艮)의 "대인조명(大人造命)"이
부르짖는 현실운명에 대한 항쟁의
정신에서 비롯되며 그들의 강한 "신성화(成圣)"  욕망에 달려 있고 번개처럼 순식간에
세상을 비추려는 그들의 생명정신에 달려 있다.
그들은  평범함을  버리는 인생 태도를
가지고 있고  인생을 예술의 극치로 여기고
경영하며 기세 좋게 세계의 이 큰 무대에
갑자기 등장했다.
이것은 심미적인 인생 태도다.


p51
미국 당대의 미학자 埃伦.迪萨纳亚克
( 엘렌 디사나야커?)는
『미적 감각의 사람들』에서
예술적 이미지 특화를 핵심 질문으로 꼽았다.
그녀는 "내 이론은 확실하고 예술 혹은
더 정확하게는 무언가를 특별하게 하려는
욕망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일종의 수요다.
하나의 표정 혹은 인공제품을
심지어 우리 몸은 '특별히 다르다'라고
표기돼 있고 이런 충동은 뿌리깊고 보편적이다."
왕간의 일생에는 늘 자신을 특화시키는 행동거지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정덕 14년(1519) 37세 때
그들은  평범함을  버리는 인생 태도를
가지고 있고  인생을 예술의 극치로
여기고 경영하며 기세 좋게 세계의
이 큰 무대에 갑자기 등장했다.
이것은 심미적인 인생 태도다.
미국 당대의 미학자 埃伦.迪萨纳亚克
( 엘렌 디사나야커?)는
『미적 감각의 사람들』에서
예술적 이미지 특화를 핵심 질문으로 꼽았다.
그녀는 "내 이론은 확실하고 예술 혹은
더 정확하게는 무언가를 특별하게 하려는 욕망
생물학적으로 부여된 일종의 수요다.
하나의 표정 혹은 인공제품을
심지어 우리 몸은 '특별히 다르다'라고
표기돼 있고 이런 충동은 뿌리깊고 보편적이다."
왕간의 일생에는 늘 자신을 특화시키는
행동거지가 있었다.
심재가 하루 종일 탄식하며 가로되
"맹자의 유명한 말이 있다.
요임금의 말씀을 말씀하시고
요임금의 행실을 행하시니
요임금의 다스림을 따르지
않으면 어찌하는가?"
이에 의례에 따라 오상관(五常冠)과
심의(深衣), 조경(绦经), 홀판(笏板),
행(行)은 매우 표준적이고 
앉으면 향을 피우고 묵묵히 기억하였다.
서기문이 말하길
이 복희 신농 황제 요순 우탕 문무
주공 공자는 노인과 어린이를 귀천
현우로 하지 않고 뜻이 있고 배움을
원하는 자가  그것을 전한다.
왕양명을 뵈올 때도 의상이 특이해
《王文成公全书》의 기록에 의하면
 "(武宗正德) 15년(1520) 경진에
선생(왕양명 뜻대로) 마흔아홉 살에
강서(江西)에 계시다가
9월에 남창으로 되돌아가셨다.
태주 왕은은 옛날 관복을 입고
목간을 집고서 두 시로써  예물로
하여 만나 뵙기를 청하였다.
선생은 그 사람과 달리 계단을
내려와 맞이하였다.
이미 윗자리에 앉아
"무슨 관인가"를 물으니
"우씨 관이다" 하였다.
"어떠한 옷인가요?"라고 물으니
"노래자의 옷이요"라고 대답했다.
"노래자에게 배웠는가?"라고 말하니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배우기를 그쳤는데도 그 의복을 입고
있으니 배우기도 전에 당에 오른다면
발을 걸려 넘어져 얼굴을 박고
울어야 하겠군요.
왕은의 얼굴색이 동하여 한쪽으로
옮겨 앉았다.
깊이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고
사물의 이치[도리]를 따져 밝힘을
논함에 미쳐서는 깨달으며 말하길
"나의 학문은 억지를 부리며
절개를 굽히지 않는데 
선생의 학문은 매우 심오하고
미묘해 깨달음을 얻는 자 것이다." 하고
드디어 제자 찰을 잡고 반복하였다.
선생은 그 이름을 간(艮)이라 바꾸어 주고
자는 여지라 하였다.
왕양명을 스승으로 모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정 원년 1522년에 왕간은
또 한번 자신을《 特殊》하게
만들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것을 기대했다.
《연보》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심재는 사직하고 돌아와 부륜을 만들어
그 위에 표시하여  말하길
천하가 하나이고 만물이 하나가 되어
산림에 들어가 은둔을 구하고
시정을 건너면 우매함을 깨우쳐 준다.
공자의 학설을 따라 하늘과 땅이 어긋나고
훌륭한 벗에 이르러서도 하도 오묘하여
종잡을 수 없고 오늘날 온세상 사람들과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허세를
부리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다.
나를 아는 사람이 오직 이뿐인가?
나를 책망하는 자만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가?
그래서 《鳅鳝赋》를 짓고 문장
전귄을 배열하였다.
길에서 모여 강의하고는 곧바로
경사(서울)에 도착했다.
좌동령은 "그는 이미 성인이 되기로
뜻을 세웠지만 그러나 여전히
표면의 형식이 중시 되는 바
그는 이처럼 고풍스러운 옷을
입고 옛 행적을 답습하는 것과 같이
주변 사람들에게 황당하고
기괴하게 여겨지기 족하나
장황(張煌)히 밖의 사실에 대한 것 역시
그 내심에  공자의 학문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고 생각했다.
사실은 결코 이렇지 않은데
겉으로 보기에 왕간이 추구한 것은
확실히 겉으로 드러난 문장인데
그러나 이에 따라
"성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미도 왕간의
이런 "황당하고 괴상한" 의도를
간파한 치밀한 기획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천하의 사람들과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허세를 부리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뽐내는 목적은
역시 천하를 계몽하기 위해서이다.
당연히 왕간과 그 후학들의
"광거"는 거기까지였다.
중용, 광견, 향원은 유가 사람에 대한
외세 풍격의 분류인데
각기 다른 인격적 특징도 반영됐다.
논어는 "중용은 덕이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백성들 사이에선 오래됐다"고 말했다.
중용은 유교에서 추구하는
최고 인격의 경지이다.
이런 군자의 동행을 찾을 수 없다면
공자는 물러나서 다음을 구했다.
" 중행(중용을 행함)을 행할 수 없다면
그와 더불어 반드시 광견이리라!
광자는 나아가 취하고 견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
형병소는 "광자는 착한길에서 나아가
취하고 나아가는 것을 알지만
물러나는 것을 모른다. 
견자는 절개를 지키고 인위적으로
하지 않으며 응당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이다."
형병소는 "광자는 착한길에서 나아가
취하고 나아가는 것을 알지만
물러나는 것을 모른다. 
견자는 절개를 지키고
인위적으로 하지 않으며
응당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이다."
《国语 . 楚语下》에는 "저(왕손승)의
부친은 초나라에서 살육을 당해
그 마음이 대쪽같았으나 불통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위소의 주에 "견자는 자기의 뜻을
곧게 하고 남을 따르지 않는다."고 했다.
바로 대쪽같은 사람은 광적인 사람처럼
떠벌리는 성격이나 뜻밖의 일에 놀라
소리를 지르거나 남을 핍박하는
진취성은 없지만 그러나 그는 내면의
옳고 그름이 뚜렷해서 나는 다른 사람은
바꿀 수 없고 나 자신도 바꾸고 싶지 않다.
광과 견 두 종류의 개성은
비교적 뚜렷한 두 가지의 사람인데
중용과 다르고 향원과도 다르다.
그러나 중용과 향원 간의 경계가
불분명하며 중용을 행하고자 하는데
흔히 향원으로 빠질 수 있다.
가리키는 것은 그러한 사람됨은
처세에 원칙 없이 융통성 있게
원만하고 아첨하며 위선적 소인인
하나의 위선자이다.
실생활에서 중용을 실천하는 것은
명목이고 향원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중국 역사상 일찌기 두 개의
"광자"를 배출한 시대가 있었는데
하나는 위진시기로 이를테면 혜강,
완적 등의 광자가 출현한 것이고
따로 하나는 곧 중
만명(중기 만기 명나라)시기이다.
이 시기의 심리학자는
광견과  향원에 대해서
매우 많은 비평이 있었는데
그들은 오히려 고루한 태도를 보였다.
왕양명은 "내가 남도에 있기 이전에도
아직 향원의 뜻이 약간 남아 있었다.
나는 지금 이 본체(良知)가 참으로
정말 옳고 그른 것을 믿는다.
손 가는 대로 가도 감출게 더더욱 없다.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광자의 마음이 되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내가 말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군요." 라고 말했다.
태주학파는 흔히 사람들에게
“王学左派(왕학좌파)"라고 불린다.
바로 왕양명(王陽明)에게
처음 노출된 광자의 인격을 가리킨 후
급진적인 태주 학파 인물들은
자기 개성을 더욱 퍼뜨리고
광자의 이미지로 명대의 역사에
찬란한 빛을 비추었다.
태주학파 인물인 광자 마음은 먼저
그 " 필부도 요순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그러한 마음이 존재한다" 는
의외의 정신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였다.
유가 경전은 “자리”를  매우 중시하여
《역경》에서 음(— —)  양(—) 의  
서로  다른 위치의 변화가 
 “팔괘”를 형성하였으며  팔괘의
서로 다른 위치의 변화는
육십사괘와 삼백팔십사효, 
음양  "자리"의 변화가
사물의 길흉화복을 결정하였다.
유가는 천인 관계를 처리함에 있어서
질서의 '“자리”는 이른바 "천지는 자리요",   
만물을 가꾸어 기른다.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다루는 데 있어서
공자는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치를
도모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ㆍ
기록에 근거하면 왕간과 왕양명이
처음 교제했을 때 
“出位之思”의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연보》에는 왕간 38세 때
양명공을 처음 본
정황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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