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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48
K-컬처와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우리 문화의 내면은 안녕한가?
2026년 3월의 봄은 가혹하다. 밖으로는 전쟁의 불길이 전 세계를 뒤흔들고, 그 여파는 파병 압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젊은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주권 국가로서의 자존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하는 실존적 고민이 깊어지는 시점이다. 안으로는 사법개혁 등 내란의 잔재 청산이 산적해 있고 지방선거도 코앞으로 다가와 나라 안팎이 뒤숭숭하다.
이런 정국을 뒤로하고 3월 16일, (사)한국작가회의 부천지부장으로서 회원들과 함께 민족의 자존을 지킨,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1898~1961)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 부천’ 문학의 지주요, 일제하 한국 문단의 자존인 수주 선생의 기일을 맞아 매년 거행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외세의 오만보다도 더 깊은 자괴감이었다. 일제 강점기라는 혹독한 시대 속에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끝내 고개를 꺾지 않았던 시인의 기념비 곁에는 오물과 무단 투기된 쓰레기가 쌓여 있었고, 묘소 앞에는 폐가와 이어지는 50여 미터 남짓의 길마저 방치되어 있었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에 문득 질문이 떠올랐다. 이것이 과연 한 도시만의 문제일까. 세계를 선도하는 K-컬처와 문화 강국을 자부하는 우리가, 정작 우리 정신의 뿌리를 이처럼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이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은 《나의 소원》에서 간절히 설파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 하였다. 그가 말한 ‘높은 문화의 힘’은 결코 외형의 화려함이나 수치로 환산되는 성과에 있지 않다. 그것은 제 나라의 정신을 지켜낸 선구자를 어떻게 기억하고 예우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쓰레기와 무관심 속에 놓인 수주 선생의 묘역은, 우리가 스스로 자부해 온 문화적 성취가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놓여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우리는 지금 ‘K-콘텐츠’와 ‘유네스코 문학도시’라는 화려한 수사에 지나치게 도취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국가적 위신을 세우는 일에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정작 민족의 자존을 지켜낸 이들의 흔적을 보존하는 일에는 인색하기 이를 데 없다. <논개>의 시인, 수주 선생 이름을 딴 ‘수주초·중·고등학교’와 ‘수주도서관’을 세우고 ‘수주문학상’까지 제정했지만, 정작 그 정신을 기리는 실천은 공허하다. 겉모습만 남고 내실은 비어버린, 생명력을 잃은 ‘박제된 허상’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제 뿌리를 소홀히 하는 사회에 지속 가능한 번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소 비약일 수 있으나, 우리가 스스로의 가치를 충분히 존중하지 못하는 태도는 대외 관계에서도 은연중 반영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힘의 논리도 있겠으나,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치를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광화문에서 BTS 공연도, 전 세계가 환호하는 K-컬처의 위상도 좋지만 제 나라의 민족 시인을 쓰레기 더미 속에 방치하는 민족을 어느 강대국이 존중하겠는가. 내 집 안 어른도 모시지 못하면서 밖에서 대접받기를 바라는 것은 안타까운 자기모순이다. 문화의식이 무너진 나라가 밖의 찬바람에 맞서 당당히 “No”라고 말할 명분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주 변영로 선생의 묘역을 정비하는 일은 단순한 환경 정화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되묻는 일이며, 잊혀가는 역사적 긍지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나아가 거센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내적 기준을 회복하는 상징적 실천이기도 하다. 정부와 지자체는 보여주기식 문화 정책에서 벗어나, 우리 정신의 뿌리를 돌보는 가장 기본적인 책무로 돌아가야 한다.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끝내 꺾이지 않았던 수주 선생의 고결한 자존심을, 우리가 이어받아야 한다. 쓰레기더미와 폐가 속에 방치된 소중한 문화가 제대로 예우 받을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외부의 압박과 불확실한 국제 질서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당당히 고개를 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