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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49 펜은 칼보다 강하다?- 언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작성자간호윤|작성시간26.04.02|조회수13 목록 댓글 0

한겨레:온 - admin

 

 

펜은 칼보다 강하다?- 언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펜은 칼보다 강하다.” 1839년 영국 작가 에드워드 불워-리튼(Edward Bulwer-Lytton)이 희곡 『리슐리외 또는 모략(Richelieu; Or the Conspiracy)』에서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언론·사상·저술의 힘을 상징하는 명언이 되었다. 이 경구는 오랫동안 언론인의 자긍심이자 무기로 통용되어 왔다. 권력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진실을 기록하는 펜 끝이 결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SBS를 통해 드러난 언론노조와 언론 현장의 실상을 그렇지 못하다.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던 언론 개혁이 왜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가 비로소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흔히 언론의 타락을 논할 때 우리는 사주(社主)의 탐욕과 자본(資本)의 예속을 일차적 원인으로 꼽는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보다 본질적이고 치명적인 문제를 드러냈다. 바로 현장을 지키는 언론인, 그들 자신이 개혁의 걸림돌이자 권력의 부역자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언론의 기회주의를 논할 때 반드시 소환되는 역사적 장면이 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해 파리로 진군할 당시, 프랑스의 관보였던 <모니퇴르(Le Moniteur)>의 헤드라인 변화다. 나폴레옹이 탈옥했을 때 “살인마가 소굴에서 탈출했다”고 포효하던 언론은, 그가 파리에 가까워질수록 “찬탈자”, “보나파르트”로 호칭을 바꾸더니, 마침내 그가 입성하자 “황제 폐하께서 충성스러운 신민들 곁으로 돌아오셨다”며 낯 뜨거운 찬사를 보냈다. 권력의 향방에 따라 잉크의 색깔을 바꾸는 이 비굴한 태도는 언론이 ‘공기(公器)’가 아닌 ‘권력의 기생충’으로 전락했을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나치 부역과 권력 아부로 얼룩진 기존 신문들을 폐간하고 그 폐허 위에서 <르몽드(Le Monde)>지가 탄생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문은 누구에게도 아부해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창간 정신은 언론인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정휘창 작가의 <원숭이와 꽃신>으로 읽은 오늘날 우리 언론의 처지는 매우 서글프다. 오소리가 준 꽃신에 길들여진 원숭이는 처음엔 편안함에 취하지만, 결국 발바닥이 부드러워져 꽃신 없이는 한 걸음도 걷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우리 언론 역시 권력이 던져주는 단독 정보와 사주가 보장하는 안락한 울타리라는 ‘꽃신’에 길들여진 것은 아닌가. 스스로 굳은살을 만들며 거친 진실의 현장을 누벼야 할 언론인들이, 권력이 제공하는 편의 속에 안주하며 비판의 발톱을 스스로 뽑아버린 결과는 참담하다. 꽃신을 얻기 위해 마침내 오소리에게 제 간을 내어주듯, 우리 언론은 생존을 위해 ‘진실’을 제물로 바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SBS의 흑역사인 ‘논두렁 시계’ 보도는 언론이 권력과 결탁해 어떻게 한 인간을 사회적으로 매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잔혹한 사례였다. 최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또다시 불거진 논란은 이러한 기만적 관행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방증한다.

▲ 챗지피티 삽화

 

영국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5’에 따르면, 한국의 뉴스 신뢰도는 조사 대상 48개국 중 37위에 머물렀다. 수년째 최하위권에 고착된 이 부끄러운 성적표에도 불구하고, SBS 언론노조는 정당한 비판을 ‘언론 탄압’이라 규정하며 억지 발표문을 내놓았다. 과오를 덮기 위해 논리를 비트는 모습은 ‘사이비 저널리즘’ 의 전형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늘 ‘정의항의 해체’를 말한다. 고정된 관념의 껍데기를 깨야만 본질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언론’이라는 정의항을 해체해 보자. 스스로를 ‘진실의 파수꾼’이라 칭하는 것은 거대한 오만의 전제일 뿐이다. 그 껍데기를 벗겨냈을 때 남는 것이 고작 사주의 안녕이나 집단의 이익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언론이라 부를 수 없다.

 

미국의 폭스뉴스가 거짓 보도의 대가로 1조 원이 넘는 배상금을 물어낸 사례는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를 던진다. ‘언론인이기에 보호받아야 한다’는 특권적 전제를 해체하고, 시민과 똑같은 책임과 의무를 지는 기록자의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 프랑스가 <르몽드>지를 통해 치욕을 씻어냈듯, 우리도 언론인의 자각과 제도적 개선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언론인 자기 혁명’을 시작해야 한다.

 

오직 진실만을 향해 나아가는 날카로운 펜 끝만이 일그러진 우리 사회를 바로잡는 유일한 시작점이 될 것이다. 칼보다 강한 펜은 오직 정직한 영혼을 가진 언론인의 손에서만 빛난다.

 

글┃간호윤(객원편집위원, 인하대학교 프런티어창의대학 초빙교수, 고전독작가)

편집: 간호윤 객원편집위원

간호윤 객원편집위원 Kan77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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