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51 단합(團合)과 담합(談合)을 모르는 세대: ‘개념의 뿌리’를 잃어버린 문해력의 위기
작성자간호윤작성시간26.04.15조회수12 목록 댓글 0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51 단합(團合)과 담합(談合)을 모르는 세대: ‘개념의 뿌리’를 잃어버린 문해력의 위기
휴헌 간호윤 ・ 2026. 4. 9. 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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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 51 - 한겨레:온
최근 강의실에서 마주한 한 풍경은 필자에게 실소를 넘어선 깊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중동 전쟁의 여파로 유가(油價)가 요동치고 기업들이 가격을 올리는 현상을 두고, 한 대학생이 리포트에서 ‘유가 단합’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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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51
단합(團合)과 담합(談合)을 모르는 세대: ‘개념의 뿌리’를 잃어버린 문해력의 위기
최근 강의실에서 마주한 한 풍경은 필자에게 실소를 넘어선 깊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중동 전쟁의 여파로 유가(油價)가 요동치고 기업들이 가격을 올리는 현상을 두고, 한 대학생이 리포트에서 ‘유가 단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오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진 설명에서 그 학생은 “기업들이 힘을 합쳐 가격을 올리는 결속력을 보였다”며 ‘단합(團合)’의 논리를 펼치고 있었다.
시장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법적인 ‘담합(談合)’이, 동료애와 결속력을 상징하는 ‘단합(團合)’으로 둔갑한 순간이다. 이는 단순한 맞춤법의 오류가 아니다. 단어의 밑바닥에 흐르는 ‘뜻의 결’을 읽어내지 못하는, 이른바 ‘개념의 뿌리’가 뽑혀 나간 우리 시대 문해력의 현주소다.
실제로 이러한 체감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OECD가 공개한 ‘2023년 국제성인역량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의 문해력은 이전 조사 대비 20점 이상 하락해 주요 국가 중 가장 큰 폭의 하락을 보였다. 더 심각한 점은 특정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전 연령층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1989년~1996년생 청년층은 10여 년 사이 19점이 떨어졌고, 같은 기간 중년층은 무려 42점이나 하락했다. 이는 단순한 교육 방식의 변화나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언어 이해 체계’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에 가깝다.
우리는 흔히 문해력을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고전문학을 전공하며 언어의 층위를 살펴온 필자의 시각에서 문해력은 ‘개념을 해체하여 그 본질을 꿰뚫는 힘’에 가깝다. 학생이 혼동한 ‘담합’과 ‘단합’을 보자. 담합은 ‘말씀 담(談)’에 ‘합할 합(合)’을 쓴다. 즉, 자기들끼리 몰래 ‘이야기(談)’를 나누어 이익을 ‘맞추는(合)’ 밀담의 속성이 그 본질이다. 반면 단합은 ‘둥글 단(團)’을 써서 여럿이 둥글게 모여 마음을 하나로 합치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담는다. ‘담(談)’과 ‘단(團)’, 이 한 글자의 차이를 인지하는 순간 단어는 박제된 사전적 정의를 벗어나 살아 움직이는 이미지가 된다.
이런 사례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수학 시간의 ‘분수(分數)’를 단순히 숫자의 위아래 조합으로 외우는 아이와, 그것이 ‘나눌 분(分)’과 ‘셀 수(數)’가 합쳐진 ‘나누어진 수’임을 아는 아이의 사고 깊이는 다를 수밖에 없다. 도덕 시간의 ‘도덕(道德)’ 또한 그러하다. 이를 사회 규범이라는 어려운 정의로 접근하기보다, 사람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道)’과 그 길을 걷는 올바른 ‘마음가짐(德)’으로 해체해 설명해주면 아이들은 비로소 그 단어의 무게를 체감한다.
최근 국가교육위원회에서 초등학교 한자 교육 활성화를 검토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필자는 전공자로서 찬성하면서도, 동시에 경계하는 지점이 있다. 한자 교육이 결코 ‘지식 자랑’을 위한 수단이나 현학적인 문구를 나열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자성어를 줄줄 외우고 어려운 어구를 쓴다고 해서 진정한 지식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한자를 ‘정복해야 할 대상’ 혹은 ‘남보다 우월해 보이기 위한 장식’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우리가 한자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사교육의 범람을 막기 위해 시험은 철저히 배제하되, 전 과목의 교과서에 등장하는 필수 개념어 500단어 내외를 선정하여 그 단어의 뿌리인 ‘뜻’을 익히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학습의 형벌’이 아니라, 교과서를 스스로 읽어낼 수 있는 ‘자립의 도구’를 쥐여 주는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해력을 정확히 갖춘다는 것이 곧 자신의 행동을 그 뜻에 맞게 실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문의 끝은 결국 행동이기 때문이다. ‘도덕’의 뜻을 정확히 아는 학생이라면 그 길을 걷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배려’의 한자 뜻을 해체해 본 학생이라면 타인의 마음을 살피는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올바른 실천과 행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담합’과 ‘단합’을 구분하지 못하는 대학생의 해프닝은 단순히 어휘력의 부재를 넘어, 우리 사회의 공적 가치와 사적 이익을 구분하는 판단력의 결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문해력과 국력은 비례한다. 그리고 이제 그 경고음은 이미 울리고 있다. 통계가 보여주듯 우리의 문해력은 전 세대에 걸쳐 흔들리고 있으며, 이는 곧 사회 전체의 사고력과 판단력의 기반이 약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자 교육에 대한 소모적인 찬반 논쟁을 넘어,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문해력의 도구를 쥐여 줄 것인가’를 깊게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현학적인 문구에 매몰되지 않고, 단어 하나에 담긴 인간의 숨결을 읽어내며 그 가치대로 살아가는 힘을 기르게 될 것이다. ‘시험 없는 한자, 도구로서의 한자,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지는 한자’가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