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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53 황금 유리관 속의 목발: 밀실에서 광장으로

작성자간호윤|작성시간26.04.24|조회수1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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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54

황금 유리관 속의 목발: 밀실에서 광장으로

우언(寓言,우화는 일본식 용어) <목발 없이 걷기>(류시화,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마라』, 2019, 83~88쪽)에는 기괴한 풍경이 나온다. 다리를 다친 폭력적인 왕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전 국민에게 목발을 강요하는 포고령을 내린다. 급기야 목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구가 나온다. 경찰과 군대는 목발을 짚고 특수훈련을 실시하며, 학교에서는 목발의 가치와 역사를 가르친다. 이후 이 나라는 목발이 신체의 일부이자 사회적 규범이 되어, 목발 없이 걷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하는 일이 되었다.

이 우언의 가장 비극적인 지점은 왕이 죽고 법령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여전히 목발을 짚고 산다는 데 있다. 심지어 ‘목발 없이 걷는 법?(단지 목발을 던져 버리는 되는 것)’을 가르친 현자가 떠난 뒤, 사람들은 그가 버린 ‘타다 남은 목발 잔해’를 황금 유리관에 모시고 ‘목발교’라는 종교를 만든다. 이 역설은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국제 정세가 마주한 ‘경직된 사고’의 적나라한 구조를 그대로 투영한다.

이 ‘목발의 왕국’은 결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거대한 가두리 양식장 안에 가둬버렸던 폭력적 역사를 기억한다. 과거 일제치하는 물론이고 군사 독재정권 시절 국가라는 전제주의 시스템은 국민 개개인의 두 다리를 묶고 ‘국가 안보’와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명분 아래 ‘획일적 사고’와 ‘밀실의 침묵’이라는 이름의 목발을 강요했다. 토론과 합의가 이루어지는 광장이 아닌, 감시와 검열이 횡행하는 밀실에 우리를 가두었던 그 시절, 스스로 걷고자 하는 의지는 곧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폭력적 국가 시스템이 설계한 이 가두리는 세월이 흐르며 제도는 해체되었지만, 그 영향은 여전히 우리 사고의 근육을 위축시키고 있다. 스스로 걷는 법을 잊게 만든 전제주의의 그림자가 오늘날에도 ‘집단 사고’와 ‘획일주의’라는 변종 목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착된 사고는 국제 사회의 비극 앞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보편적 인권이라는 본질을 저버린 채, 강대국의 논리라는 목발 뒤에 숨어 비겁한 침묵을 지키는 행태가 그러하다. 최근 한국 정부가 이스라엘군의 인권 문제를 비판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도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될 인간의 존엄성이 ‘국익’이나 ‘동맹’이라는 명분의 목발에 치여 짓밟히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강대국의 논리에 매몰되어 민간인의 학살에 눈감는 현실은, 우언 속 사람들이 스스로를 가두었던 ‘목발의 감옥’과 다를 바 없다. 이는 우리 마음속에 뿌리박힌 ‘강자의 논리가 곧 정의’라는 도식적 사고에 던지는 준엄한 경고다.

동시에 우리는 미국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없는 의존이라는 거대한 목발도 경계해야 한다. 우언 속 국민들이 목발 짚는 법을 가요 당하며 그것을 본래적인 것이라 믿었듯, 우리 사회 일각에는 미국을 절대적인 선이자 유일한 길로 추종하는 맹목적 사고가 깊이 박혀 있다. 한미 동맹은 소중한 자산이지만, 그것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다리 근육을 퇴화시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힘을 숭앙하는 데 익숙해진 나머지, 국익이 충돌하거나 보편적 정의가 훼손되는 순간에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권 국가의 자존이 아니다. 맹목적 숭배는 사고를 경직시키고, 결국 우리를 황금 유리관 속에 갇힌 ‘목발교’의 추종자로 만든다.

왜 사람들은 현자의 가르침을 받고도 여전히 목발을 짚고 있었을까? 그것은 ‘사고의 외주화’, 곧 스스로 판단하지 않으려는 습관이 주는 안락함 때문이다. 강대국의 논리에 나를 맡기고, 군사정권이 남긴 권위주의의 유산에 안주하면 스스로 고뇌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내 다리로 걷기 시작하는 순간, 모든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는 온전히 나의 책임이 된다. 우리 정부가 국제 사회의 민감한 현안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러한 ‘책임 있는 자립’의 발현이다. 맹목적 추종은 우리에게 ‘가짜 위안’을 주지만, 그 대가는 주체성의 상실이다.

현자는 말했다. “나에게 배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쉽고 간단한 일이다. 그저 목발을 던지면 된다.”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는 법은 단호한 결단만 있다면 의외로 명쾌하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동맹의 그림자, 과거의 망령, 그리고 우리를 지탱한다고 믿었던 모든 ‘정신적 목발’에 대해 “이것이 인간의 존엄보다 우선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황금 유리관 속의 타다 남은 목발을 숭배하는 일을 멈추고 밀실에서 나와 광장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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