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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55 다산 정약용의 시비(是非)와 이해(利害)로 읽어 본 선거 ​

작성자간호윤|작성시간26.05.18|조회수3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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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 55 - 한겨레:온

6.3 선거가 한 달도 채 안 남았다. 거리마다 형형색색의 현수막이 나부끼고, 확성기에서는 세상을 바꿀 듯한 포부가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 화려한 수사 뒤에 숨은 본질을 들여다보면, 대중[유권자]은 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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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55

다산 정약용의 시비(是非)와 이해(利害)로 읽어 본 선거

6.3 선거가 한 달도 채 안 남았다. 거리마다 형형색색의 현수막이 나부끼고, 확성기에서는 세상을 바꿀 듯한 포부가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 화려한 수사 뒤에 숨은 본질을 들여다보면, 대중[유권자]은 대개 두 가지 심리적 함정에 빠진다. 한 부류는 세상을 절대적인 선(善)과 악(惡)의 구도로 재단하려는 ‘신념적 결벽주의자’들이고, 다른 부류는 오로지 나의 주머니를 채워줄 실리만을 따지는 ‘냉소적 실리주의자’들이다. 전자는 정치를 이념적 논쟁으로 타락시키고, 후자는 정치를 천박한 장사치들의 노름으로 전락시킨다.

이 혼란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조선의 대유(大儒)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다산 선생은 200여 년 전, 유배지의 고독 속에서도 인간의 욕망과 사회의 구조를 냉철하게 관찰했다. 그는 인간이 내리는 모든 판단과 행동의 근저에는 두 개의 커다란 저울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바로 ‘시비(是非, 옳고 그름)’와 ‘이해(利害, 이롭고 해로움)’다. 선생은 이 두 잣대를 교차시켜 인간의 선택을 네 가지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이는 투표소로 향하는 유권자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명확한 좌표가 된다.

선생에 따르면 인간의 선택 중 가장 높은 경지는 ‘수시획리(守是獲利)’다. 이는 ‘옳음을 지키면서 동시에 이익을 얻는 상태’를 말한다. 개인의 가치관과 공동체의 정의가 부합하면서도, 그것이 현실적인 풍요와 안정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구조다. 모든 정치가 지향해야 할 유토피아이자, 성숙한 유권자가 꿈꾸는 최고의 결과다.

그다음은 ‘수시취해(守是取害)’다. ‘옳음을 지키되 손해를 감수하는 경우’다. 비록 당장 내 삶에 경제적 이득이 오지 않더라도, 혹은 우리 지역에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손해를 입더라도, 그것이 국가 전체와 미래 세대를 위해 옳은 길이라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하는 높은 결단이다.

반대로 경계해야 할 것은 ‘추비획리(趨非獲利)’다. ‘그릇된 길임을 알면서도 눈앞의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후보라 할지라도 나의 부동산 가치를 올려줄 것 같으면 눈을 감아버리는 선택, 공동체의 정의보다는 진영의 승리라는 사적 이익에 몰두하는 태도가 여기에 속한다. 이는 정치를 오염시키고 사회의 도덕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주범이 된다.

가장 최하의 단계는 ‘추비취해(趨非取害)’다. ‘그릇된 선택을 하여 결국 자신에게 해까지 입히는 어리석음’이다. 감정적인 선동에 휘말리거나 상대 당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에 사로잡혀 자격 없는 자에게 권력을 쥐여주고, 그 결과로 돌아온 정책적 실정이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선거가 끝난 뒤 많은 유권자가 후회하는 까닭은 바로 이 ‘추비취해’의 늪에 빠졌기 때문이다.

현실의 선거에서 이 네 가지 구분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후보들은 누구나 자신이 ‘수시획리’의 적임자라고 주장하며, 상대방은 ‘추비취해’의 사이비 후보라고 낙인찍는다. 유권자 역시 기만당하기 일쑤다. 우리는 종종 ‘시비’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거창한 구호와 이미지에 매몰되어, 정작 그 이면에 숨겨진 ‘이해’의 계산기를 보지 못한다.

특정 정당을 열렬히 지지하는 이유가 실상은 나의 계급적, 지역적 이익을 대변해주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절대적인 정의나 민주주의를 지키는 거룩한 성전(聖戰)인 양 착각한다. 반대로, 정의로운 척 목소리를 높이는 후보가 실제로는 사적 이익을 취하는 ‘추비획리’의 인물임을 알아채지 못하기도 한다. 다산 선생의 기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차가운 이성과 냉정한 자기 점검을 요구한다.

대한민국 선거는 거대 양당 구조이기에 본질적으로 갈등의 분화구다. 각기 다른 시비와 각기 다른 이해가 충돌한다. 이때 ‘옳음’만을 강조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이상주의에 빠져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게 되고, ‘이익’만을 좇으면 공동체의 통합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상식이 무너진다. 유권자의 선택은 이 두 축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추(錘)와 같다.

우리가 다산의 오래된 사유를 곰곰이 새겨볼 이유는, 그것이 시대를 초월한 인간 행동의 본질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투표소의 가림막 뒤에서 우리가 쥐어야 할 것은 특정 후보의 이름이 적힌 도장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두 저울이다. ‘이 선택은 옳은가(是)?’ 그리고 ‘이 선택은 진정으로 우리를 이롭게 하는가(利)?’ 이 질문들에 정직하게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추비취해’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수시획리’라는 가장 높은 경지에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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