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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이즘,

작성자고상석|작성시간14.11.12|조회수266 목록 댓글 0

에고이즘


이기주의, 자기 중심주의를 말하는 것이고 윤리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단순한 자기취청(聴   불취,들을청), 자만심,제멋대로 하는 것을 egoism이라고 한다.

정신적인 자기사랑은 나르시즘( narcissimsm), 자체사랑은 autoerotism이라고 한다. 

모두 자기, 자아를 특히 중시하고 있는 점은 공통적이다. 

남을 존중하는 사고방식을 애타주의 내지 이타주의 altruism라고 한다.


일상 이용되고 있는 의미에서 에고이즘(이기주의)은 오로지 자기의 욕망충족이나 이익 추구만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고, 

그 행동이 타인이나 사회일반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자기의 판단을 타인의 지성에 비추어 음미할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 "논리적 에고이스트"("학문의 에고이스트"), 

타인은 어떻든지 간에 자기 자신의 취미만으로 만족하는 "미감적 에고이스트"("교제의 에고이스트"), 

그리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효용도 인정하지 않는 "도덕적 에고이스트"(행복주의자)가 그들이다. 

나아가 칸트는 전체로서의 '에고이즘'에 '다원론'의 이념을 대립시킨다. 또한 칸트는 몇 차례의 인간학 강의에서 

자기를 세계에서의 유일한 존재로 간주하는 "형이상학적 에고이스트"라는 유형도 제시하고 있다.


이신론 (Diesm) :창조는 하였으나 방관하신다. 

계시를 믿지 않고 이성에 의지한다.

천지창조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창조행위 후에는 인간세계에 대한 자의적 개입을 중지하고, 자연에 내재하는 합리적 법에 
의해서만 우주를 통치하는 것으로서의 신에 대한 신앙을 의미하는 용어. 영어로는 deism. 자연 종교(natural religion)라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은 유럽사상 중에서 17세기 후반의 영국 명예혁명으로 시작되는 시민사회의 발전과 자연과학의 흥기에 따라서 합리적인 사변의 침투에 의해서 종래의 전통적 국교의 교의를 부인하고, 삼위일체나 계시ㆍ기적을 부정하고 성서의 상징적ㆍ비유적 해석을 채용하는 이단으로서의 신학을 가리킨다. 
종교를 이성과 조정하는 이 합리주의신학의 신조는, 최초 17세기의 철학자 챠베리의 허버트(Herbert of Cherbury, 1583~1648)에 의해서 정식화되어 샤프츠베리에 의해서 광신의 배격과 비판의 논거로서 이용되었는데, 이 주제가 세간의 주목을 모으게 된 것은 1696년에 톨랜드가 『그리스도교는 신비적이 아니다』를 간행하자 국교회의 호교논자가 이에 공격을 가한 것을 계기로, 소위 이신론 논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 등장한 대표적인 이신론자로서는 『천지창조처럼 오래된 그리스도교』(1730)의 틴들(Matthew Tindal, 1653년이나 57년~1733년)이나 『자유사상에 대해서』(1713년)의 콜린즈(John Anthony Collins, 1676~1729), 당시의 거물 종교가로 문필가인 볼링브룩 등이 알려져 있다. 이 시기 종교상의 교의의 비판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우며, 한 시대 전의 종교적 열광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종교상의 무관심이 관용의 사회적 기반을 만들었지만, 역으로 일응의 사회적 자유를 얻어서 만족한 시민층의 보수적인 상식 도덕이 그들 사이에 극단적인 합리주의에 대한 반발을 낳은 것이나, 이신론자측의 사변의 불철저함이나 피상함이 기존의 국교회파 체제를 유지하는 유리한 사회적 특권과 함께 이신론자측의 입장을 약체화하고, 영국에서는 결국 사상의 주류가 되지 못하였는데, 따라서 후세에 대한 영속적인 영향을 남기지 못했다.

은둔주의 

시끄러운 세상일(世上-)을 버리고 한적(閑寂)한 곳에 숨어서 사는 주의(主義)



금욕주의  asceticism, 義 :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인 욕구나 욕망을 이성()이나 의지로 억제하고 금함으로써 도덕이나 종교상의 이상을 성취시키려는 사상이나 태도.

금욕을 뜻하는 금제()가 따르는 연습 ·수련을 말하는데, 이에서 유래되는 금욕주의에는 2가지 경우가 있다.

 ① 어떤 궁극적인 목적을 위하여 몸을 단련시킨다는 본래의 뜻과, 

② 육체에 대한 불신()에서 몸을 파괴하거나 그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금욕주의의 역사에는 이 두 가지 전혀 다른 견해가 섞여 있다. 

원래 금욕주의는 의지가 생활 앞에 내세우는 이성의 명령과, 생활 속에 있는 자연적인 여러 가지 욕구와의 모순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모순은 당연히 고통이나 불쾌감을 수반하게 되므로,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 육체를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단련시키거나, 영혼의 발전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보아 이를 제거하려고 한다.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인생을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의 싸움터로 보고 후자의 소멸에 의한 전자의 승리를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태도와 결부된 금욕주의가 이원론적 금욕주의이다. 여기서는 이성만이 선()의 근원이며, 감성(:충동 ·욕망)은 악의 인연()으로 보고, 후자의 억압이 도덕생활을 위하여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 감성 그 자체를 악으로 볼 때에는 금욕의 정도가 극단적으로 기울어 마침내 고행()을 적극적인 선()으로 생각하는 입장이 된다. 피타고라스파(), 퀴닉파, 스토아파, 중세의 수도원 생활, 쇼펜하우어의 윤리설, 간디의 순결사상 등은 모두 이런 뜻의 금욕주의 계통에 속한다.

한편, I.칸트는 수도사의 금욕은 덕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광신적 속죄()를 꾀하는 것으로 보아, 이에 대하여 본원적인 도덕적 금욕이 있다는 것을, 스토아파의 “인생의 우연한 화악()에 견디고 쓸데없는 오락이 없어도 지낼 수 있도록 길들여라”라는 격언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도덕적 금욕은 자기 자신을 도덕적으로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양생법()으로서, 자연충동에 대한 투쟁과 그 지배가 인간을 건전하게 만들고 재차 획득한 자유의식이 사람을 기쁘게 해준다고 강조하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는 신의 은총에 의해서 일부 사람만이 영원한 구원으로 선택된다는 J.칼뱅 등 예정설()과 결부시켜, 자기가 선택되었다는 확증을 일상생활에서 구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은총에 의하여 주어진 재화()의 관리자, 영리추구의 기계로서의 의무를 지게 되며, 금욕은 목적으로서의 부()의 추구를 악()이라고 배척하면서도 부의 추구를 직업노동의 성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는 팽창되어가고 있는 시민사회의 윤리로서 반권위적 성격을 가지고,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절대주의적 봉건사회에 항의하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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