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향기나는글(2)

소세양의 한시(金淨, 蘇世讓 漢詩)

작성자구정리|작성시간24.09.25|조회수24 목록 댓글 0

 







소세양의 한시(金淨, 蘇世讓 漢詩)



청풍 한벽루에서 (淸風寒碧樓)
 
서린 듯한 산천은 장엄도 하여 천지가 여기에서 그윽해졌네.
바람은 만고의 동굴에서 불어나오고 강물은 오경의 누각을 움직이네.
속 빈 베개는 여름에 시원하고 시혼(詩魂)은 가을 내내 상쾌하겠네.
어찌하면 몸의 허물 벗어버리고 높이 누워 이 물가에 머물 수 있나.
 
盤辟山川壯 乾坤茲境幽 風生萬古穴 江撼五更樓 虛枕宜淸夏 詩魂爽九秋 何因脫身累 高臥寄滄洲 (冲庵集 卷1)
 
이 시는 1510년 그가 충청도도사가 되어 청풍의 한벽루에 올라 느낀 감회를 읊은 오언율시로 우(尤)운이다. 
그는 모친 봉양을 위해 충청도 도사로 나갔는데, 반정공신들 틈에서 이상을 펼치기 어렵다고 보아 외직을 구했을 것이다. 
이 시에는 그러한 자신의 심정도 함축되어 있다. 수련은 주변을 둘러싼 풍경이다. 
동남쪽으로 소백산 줄기의 금수산이 솟아 있고 석벽 위에 자리 잡은 누각에서
남한강의 물줄기가 백사장을 돌아나가는 주변의 경치를 보여준다. 
함련은 조금 가까운 경치다. 
청풍에 만고굴이라는 풍혈(風穴)이 있는데 거기서 시원한 바람이 불고, 밤이 깊어지자 강물은
마치 누각을 움직일 듯 감돌아 흐른다는 것이다. 
허균은 이 구절이 ‘호방하여 자유롭다(豪放自恣)’라고 평했다. 경련은 자신이 느끼는 기분이다. 
누각에서 지내는 여름밤이 하도 시원하여 다가오는 가을 내내 시흥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미련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관직에 나아갔지만 훈구세력이 버티고 있는 중앙정계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개혁이 먹혀들지 않자
외직을 구해 나왔는데, 차라리 관직을 버리고 자연 속에 거침없이 살고 싶다는 소망을 털어놓은 것이다.

 

강남 (江南)

 
강남 옅은 꿈에 한낮이 고요한데 젊은 나이를 따라 시름은 불어가네.
쌍쌍이 제비 날아드니 봄은 저물려 하는데 살구꽃 보슬비에 발을 내리네.
 
江南殘夢晝厭厭 愁逐年芳日日添 雙燕來時春欲暮 杏花微雨下重簾 (冲庵集 卷2) 

이 시는 1514년(중종9) 봄에 지은 칠언절구로 염(鹽)운인데, 
그는 이 때 박상(朴祥, 1474∼1530) 등과 함께 사가독서를 하고 있었다. 
늦은 봄날의 한가한 정취를 시각적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기구는 봄날에 낮잠을 자고 일어난 나른한 분위기이고, 승구는 봄날이 지나가는 데 따른 시름이다. 
분위기를 제시하고 이에 따른 심정을 토로했다. 
왜 봄날이 시름겨울까. 꽃 피는 시절이 지나가듯이 청춘이 지나가므로 서운한 것이요, 
이상은 높은데 아직 현실에서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오지 않았으니 나른하고 시름겹다는 것이다. 
전구에서는 앞에서 제시한 분위기를 구체적인 사물로 묘사하여 보여준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와 활기차게 날지만 봄은 이미 늦어가고 있는 것이다. 
결구에서도 자신의 시름의 실상을 이미지로 보여준다. 
화사하게 살구꽃이 피었지만 거기에 보슬비가 내려서 봄날이 가기를 재촉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봄날이 지나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발을 내린다고 하였다. 
이렇게 의경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함축된 맛을 지녔기에 당시풍이라는 지적을 받았을 것이다.

 

느낌이 일어서 (感興)
 
지는 해 그림자는 들에 내리고 겨울 까마귀는 저녁 마을에 모였네.
빈 숲속에 밥 짓는 연기 찬데 초가집에서는 사립문을 닫는다.
 
落日臨荒野 寒鴉下晩村 空林煙火冷 白屋掩荊門 (冲庵集 卷3)

이 시는 그가 유배에서 풀려나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온 1516년(중종11) 이후에 지은 오언절구로 원(元)운이다. 
제목 뒤에 병자년 겨울 이후(丙子冬以後)에 지었다고 밝혀 놓았다. 
전원의 쓸쓸한 겨울 경치를 담담하게 묘사하고 그 속에 시인의 심정을 함축시켰다. 
기구는 겨울 들판에 해가 져가는 시점이다. 겨울날 산 그림자가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을씨년스런 풍경이다. 
승구는 더욱 쓸쓸한 겨울 저녁의 마을을 그린 것이다. 
겨울 까마귀들이 마을 가까이에 모여들어 소슬한 느낌을 자아낸다. 전구는 인가를 그리고 있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집인지 시야에 들어온 집인지 알 수 없지만 스산한 겨울 분위기 속에 저녁밥 짓는 연기를 피워 올린다. 
시인은 이 연기가 차갑게 느껴진다고 했다. 결구에서 그 초가집의 주인이 문을 닫는다고 하여
시인이 닫힌 세계로 마음을 수렴하고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 해 겨울에 조정에서 그를 성균관 사예로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학문에만 골몰한 것과도 상통한다고 하겠다. 
허균은 이 시가 당나라 유장경(劉長卿)의 시와 아주 비슷하다고 평하여(許筠, 惺叟詩話. 金冲菴詩 落日臨荒野
寒鴉下晩村 空林煙火冷 白屋掩荊門 酷似劉長卿.) 당시풍임을 지적했다.

 

아름다운 달 (佳月)
 
아름다운 달이 겹겹이 구름에 가려 아득히 어두운 빛이 시름겹구나.
맑은 달빛 기다릴 수 없지만 밤 깊도록 강가 다락에 기대었다네.
 
佳月重雲掩 迢迢暝色愁 淸光不可待 深夜倚江樓 (冲庵集 卷3)
 
이 시는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바로 전에 지은 오언절구로 우(尤)운이다. 
그가 조광조와 함께 공신들의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상소하자 훈구세력들은 그들을 음해하기 시작하였고
중종도 이에 마음이 흔들려서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을 꺼려하게 되었다. 
이 시는 이러한 정치상황과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기구는 당시의 정치상황을 사물에 투사한 것이다. 
아름다운 달은 임금을, 구름은 훈구파를 상징한다. 승구는 정국에 대한 시인의 걱정스런 심정이다. 
어두운 빛은 훈구파의 음해로 인해 흐려진 임금의 총명을 암시하고 시름겹다는 말은
임금의 심중이기도 하고 시인의 심정이기도 하다. 
전구에서 시인은 맑은 달빛을 기다릴 수 없듯이 임금의 밝은 판단을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했다. 
이미 정국은 훈구파의 주도 아래 진행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할 수 없다. 결구에서 밤이 깊도록 강가 다락에 기대어서 다시 달빛이 밝아지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임금이 총명을 되찾아 이상적인 정치를 펴기 위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회포를 부쳐 (遣懷)
 
섬나라는 언제나 음산한데 쓸쓸한 마을에 하루 종일 바람이 부네.
봄을 알아 꽃들은 저절로 피고 밤이 되자 달은 하늘에 떴네.
고향 생각은 천리 밖인데 남은 생명이 멀리 떨어진 섬에 있구나.
푸른 하늘은 으레 정함이 있으리니 무엇 때문에 길이 막혔다고 울겠는가.
 
海國恒陰翳 荒村盡日風 知春花自發 入夜月臨空 鄕思千山外 殘生絶島中 蒼天應有定 何用哭途窮 (冲庵集 卷3)
 
그는 1519년(중종14) 11월 기묘사화로 인해 금산에 유배되었는데, 
노모를 뵈려고 군수에게 말미를 얻어 보은으로 가다가 돌아와 다음해 정월에 진도로 이배되었다. 
이 시는 진도로 옮긴 경진(庚辰,1520)년 3월 상순에 지은 오언율시로 동(東)운이다. 
절도(絶島)에 유배된 절망적인 상황과 늙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심정, 
그리고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담담한 각오가 드러나 있다. 
수련은 유배지 진도의 환경을 읊어서 자신의 심정을 함축하게 했다. 
음산한 분위기와 바람 불어 쓸쓸한 주변 묘사를 통하여, 이상을 향한 개혁정치를 펴다가
귀양 온 자신의 절망적 심정을 암시하고 있다. 함련은 자연의 변함없는 운행을 말한 것이다. 
자신이 유배되는 상황이 되어도 꽃은 여전히 봄을 맞아 피어나고 밤이 되자
달은 변함없이 떠올랐다는 말 속에 항구적인 자연에 대비된 인간 성쇠의 무상함에 대한 감회가 감춰져 있다. 
경련은 모친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이다. 
그는 금산에 유배되었을 때 모친을 뵈려고 보은으로 떠났다가 진도로 이배의 명을 받게 되었고, 
그 후에 그가 망명을 꾀했다는 모함을 받아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기에 이르렀는데, 
금산에서 진도로 옮겼으니 보은과는 천리나 떨어져 모친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고, 
남은 목숨이 외진 섬에 갇혀있다고 탄식했다. 
미련에서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보여준다. 
훈구파에게 밀려서 절도에 유배되기에 이르렀으니 자신의 이상은 좌절되었음을
알았다는 것이고 운명이 이러하다면 길이 다했다고 통곡한 진나라 완적(阮籍)같이 울지는 않겠다고 했다.

 

길가의 소나무를 제목으로 삼아 (題路傍松)
 
가지는 꺾어져 잎들도 뒤엉키고 도끼 맞고 남은 몸이 모래 위에 쓰러질듯
동량재로 베어져 쓰이기를 바랐더니 삐죽삐죽 거칠어서 신선 뗏목이나 만들겠네.
 
바닷바람이 불어가니 슬픈 소리가 멀고 산달이 높이 뜨니 여읜 그림자 성기네.
곧은 뿌리가 뻗어 땅속 깊이 이르러 눈서리도 그 품격을 모두 없애지 못하리.
 
枝條摧落葉鬖髿 斤斧餘身欲臥沙 望斷棟樑人世用 査牙堪作海仙槎 //
海風吹去悲聲遠 山月高來瘦影疏 賴有直根泉下到 雪霜標格未全除 (冲庵集 卷3)
 
 그가 진도와 제주의 유배지에서 지은 시는 ‘해도록(海島錄)’에 묶여 있는데, 이 시는 그 끝에 실려 있는 세 수 중 두 수다. 
김정국(金正國,1485∼1541)의 <사재척언(思齋摭言)>에는 이 시를 제주로 가는 도중 해남의 바닷가에서 지은 것으로
나와 있다.(金正國, 思齋摭言. 金提學淨坐黨禍 杖流濟州 至海南之海涯 憩道傍老松下 吟成三絶 白松木而書之.) 
길가에 서 있는 소나무를 빌어 자신의 처지와 회포를 부친 칠언절구로 각각 마(麻)운과 어(魚)운을 썼다. 
첫 수의 기구와 승구는 길가 소나무의 처참한 모습인데 자신의 처지를 암시한다. 
길가에 서서 도끼를 맞아 가지는 꺾이고 남은 둥치가 해변에 쓰러질 듯 서 있다고 하여, 
조정에 나섰다가 훈구파의 음해를 받아 이리저리 귀양 다니는 자신의 처지와 닮았다는 것이다. 
전구와 결구에서 길가 소나무의 쓸모를 말하여 역시 자신의 신세가 그렇다는 것을 상징하였다. 
기둥이나 서까래로 쓰이기를 바랐지만 이제는 뗏목 감밖에는 되지 않겠다고 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은 좌절되고 말았음을 함축한 것이다. 둘째 수의 기구와 승구는 길가 소나무의 모습이다. 
바람이 불면 슬픈 소리를 내고 달이 솟으면 그림자가 처량하다고 하여
역시 자신의 귀양가는 모습이 그렇다는 것을 비유했다. 
전구와 결구에서 소나무가 이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 본래의 품격만은 지니고 있다고 하여
자신도 눈서리를 견디는 소나무처럼 꿈꾸었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상을 지닌 채
선비의 지조를 굽히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소세양(蘇世讓,1486,성종17∼1562,명종17)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자는 언겸(彦謙)이고 호는 양곡(陽谷), 또는 퇴휴(退休)이며 본관은 진주다.
1509년(중종4)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 전경이 되고, 1513년 수찬, 정언, 이듬해 지평, 이조정랑이 되어 사가독서를 했다.
1517년 장령, 1520년 사간, 집의, 전한, 이듬해 직제학을 거쳐 사성이 되었으며, 원접사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1523년 황해도 관찰사, 이듬해 이조참의, 1527년 전주부윤, 1529년 예조참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다음해 형조참판, 예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한성판윤, 지중추부사에 올라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공조판서, 1535년 형조․호조판서, 이듬해 원접사가 되고, 1537년 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좌찬성, 대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春秋館)의 실록을 등사, 봉안하였다.
1543년(중종35) 윤임(尹任) 일파와 불화하여 모친의 병간호를 위해 익산으로 낙향하였다.

 

연경에서 일이 있어서 (燕京卽事)

 
열흘이나 잔치를 열어 송별을 하니 삼월의 황성에서 아직 돌아가지 못하네.
버들개지는 늙은 길손의 터럭보다 희고 복사꽃은 미인의 얼굴보다 붉구나.
봄 시름이 점점이 빈 여관에 이었는데 돌아갈 흥은 펄펄 고향땅에 떨어지네.
머지않아 공무가 끝나면 옷깃을 떨치고 긴 휘파람 불며 국경을 나서리라.
 
宴開迎餞一旬間 三月皇州却未還 柳絮白於衰客鬢 桃花紅勝美人顏 春愁點點連空館
歸興翩翩落故山 早晩句當公事了 拂衣長嘯出秦關 (國朝詩刪 卷5)

 
이 시는 그가 1533년(중종28) 12월에 진하사로 중국 북경에 갔을 때 지은 칠언율시로 산(刪)운이다. 
그는 이미 1521년에 원접사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정사룡(鄭士龍)과 더불어
중국 사신 당고(唐皐) 등을 맞아 시문으로 잘 응대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던 터였다. 
그의 시는 의성의태의 첩어를 빈번히 사용하여 사장파의 형식주의적 특징을 드러낸다고 하는데
이 작품에도 그런 특징이 드러난다. 
수련은 북경에서 관리들이 열어준 전별연이다. 
열흘씩이나 잔치를 열어 그들을 북경에 붙들어 두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일이 늦어지고 있다고 하였다. 
함련은 북경에서 보는 삼월의 풍물을 대구로 표현한 것이다. 
버들개지를 자신의 귀밑털에, 복사꽃을 미인의 얼굴에 비겼는데,
 허균은 이 부분이 “스스로 득의한 곳(渠自得意處)”라고 했다. 경련은 객창감과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다. 
객지의 빈 여관에 여러 날 머무는 고단함과 빨리 임무가 끝나서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의태의 첩어를
이용하여 절실하게 표현하였다. 
미련은 돌아가는 홀가분한 기분이다. 공무가 끝나 옷깃을 떨치고 휘파람을 불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여
임무를 마치고 득의롭게 돌아가는 사신의 심정을 잘 나타내었다.

 

좌의정 상진이 그린 기러기 화첩에 쓰다 (題尙左相畫雁軸)

 
저문 강가에 외로운 그림자 쓸쓸한데 어두운 강기슭에 붉은 여뀌 꽃 다 졌네.
하릴없이 가을바람에 옛 짝을 부르나 구름과 물이 만 겹이나 깊은 줄 알지 못하네.
 
蕭蕭孤影暮江潯 紅蓼花殘兩岸陰 謾向西風呼舊侶 不知雲水萬重深 (陽谷集 卷7)
 
이제신(李濟臣)의 <청강시화(淸江詩話)>에, 상진(尙震,1493∼1564)이 좌의정에 올라 김제(金褆)가 그린
두 폭 노안도(蘆鴈圖) 족자를 그에게 보내 화답을 구하자 그가 절구 두 수를 지어 보냈는데
모두 스스로에 비유한 것이고 그림에 핍진하여 절창이라고 하였고, 허균의 <성수시화>에도
같은 일을 소개하고 품은 생각이 심원하여 상진이 보고 차탄했다고 하였다.
(李濟臣, 淸江詩話. 蘇退休 罷居湖南 時尙領府在相位 以金褆蘆鴈二簇求咏 蘇以二絶還 楓落蘋香蘆荻花 疏翎隨意泛晴波 塞天昨夜風霜厲 却愛江南有歲華 … 皆自喩也 太逼畵樣 可謂絶唱. 許筠, 惺叟詩話. 蘇退休少與尙左相同僚 而尙爲下官 及入相 以畵鴈軸求詩於退休 退休作一絶 書送曰 … 含思深遠 尙見而嗟悼之.) 
상진이 좌의정에 오른 것이 1551년(명종6)이고 영의정에 오른 것이 1558년이니 그 사이에 지었을 것이다. 
칠언절구로 침(侵)운인데 두 수 중 첫째 수로 제화시다.
 기구와 승구는 배경묘사다. 해 저문 강가와 여뀌 꽃이 진 강기슭 등을 그려서
쓸쓸한 가을의 전원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윤임 일파와 불화하여 낙향하였고 명종 즉위 후 다시 불렀으나 반대가 많았으며 자신도 벼슬에 뜻이 없었다고 했다. 
그로 보아 시골에서 만년을 보내는 자신의 처지를 암시하는 듯하다. 전구와 결구는 기러기의 행동이다. 
기러기가 옛 짝을 부르지만 구름과 물이 얼마나 깊은지 모른다고 했다. 
기러기가 자신을 투사한 것이라면 옛 동료를 그리워하지만 처지가 서로 다르다는 숨은 뜻이 들어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생각이 심원하다고 말한 것이리라. 
결구에서 <국조시산>은 만 겹[萬重]을 만 리[萬里]라고 적었고, <기아>는 물[水]을 나무[樹]로 적었다.

 

이아가 죽림서쪽 산기슭에다 초당 터를 잡다 (邇兒得草亭之基于竹林西麓)

 
성안이나 산림을 따질 것 없이 집은 모름지기 대 그늘을 끼고 지어야지.
좋구나, 여생을 노닐며 쉴 곳이니 세상의 어떤 일에 다시 마음 두리오?
 
不論城市與山林 卜築先須傍竹陰 好是餘生游息地 世間無事更關心 (國朝詩刪 卷3)
 
이아는 그의 측실에서 난 둘째 아들이다. 
이 시는 만년에 고향에 돌아와 형제와 자녀들이 함께 모여 살며
노년을 보냈던 편안함을 보여주는 칠언절구로 침(侵)운이다. 
그는 대제학을 맡을 정도로 시문에 능했지만 대윤인 윤임 일파와 불화하였고 사장파의 일원으로서
사림파의 견제를 당하여 결국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두 명의 형과 더불어 대가족이 이웃에 모여 살았다고 하므로 측실의 둘째 아들이 고른 집터를 보고
이렇게 흡족해 하였던 것이다. 
기구와 승구는 집터를 고르는 기준이다. 
성안의 저자거리이거나 산기슭의 숲 가까이거나 간에 집은 대 그늘이 드리워질 수 있는 곳이라야 운치가 있다는 것이다. 
시인다운 심미안이라 하겠다. 
전구와 결구는 그런 곳에 터 잡아 살게 될 자신의 마음가짐이다. 
대 그늘이 깃든 운치 있는 집에 산다면 번거로운 세상사에서 벗어나
여생을 편하고 초탈한 모습으로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담백하고 초속한 한가로움이 넘쳐난다고 하겠다
.


김정(金淨,1486,성종17∼1521,중종16)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다. 
자는 원충(元冲)이고 호는 충암(冲菴)이며 본관은 경주로 보은 출신이다.
1507년(중종2) 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고, 
이듬해 정언으로 문신 중시에 장원하여 병조정랑이 되었다. 
다음해 부교리, 헌납, 1510년 충청도도사를 거쳐 1512년 교리, 이조정랑, 
이듬해 사가독서하고,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1515년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폐비 신씨(愼氏)를 복위하고
폐비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가 보은에 유배되었다.
1517년 응교, 전한을 거쳐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승지, 이조참판, 1519년 대사헌,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소격서를 혁파하고 향약을 실시하며 현량과를 설치하는 등, 
개혁정치를 펴다가 그들의 급속한 성장에 대한 훈구파의 반발로 기묘사화가 일어나 금산에 유배되고, 
진도, 제주로 옮겼다. 1521년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

[출처] 김정, 소세양의 한시|작성자 jaseodang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