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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화조각사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 ~1856) 수선화

작성자구정리|작성시간24.08.25|조회수9 목록 댓글 0

 

 

 


 

 

 

 

 

 


▲ 김정희, 수선화부 탁본과 부분, 조선 19세기, 23.5 x 60.8cm, 제주 추사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 ~1856)의 그림과 글씨는

후대에 사모하는 이가 많아 "완당탁묵 阮堂拓墨"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탁본이 간행되었다.

그중에는<수선화부 水仙花賦>라는 것이 있다.

여에는 수선화를 노래한 청나라 호경의 명문을
특유의추사체로 쓰면서 "몽당붓으로 아무렇게나 그렸다"는
수선화 그림이 실려있다.

추사의 수선화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는 24살 때 아버지(김노경)를 따라 연경에 가서
처음 이 청순한 꽃을 보고 신선한 감동을 받고는
그 뒤부터 아주 사랑하는 바가 되었다.

43세 때는 평안감사로 재직 중인 부친을 뵈러 평양에 갔다가
때마침 연경에 다녀오는 사신이 평안감사에게 수선화를 선물하자
아버지께 그것을 달라고 하여 짐꾼을 시켜 남양주 여유당에 계신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보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다산은 기쁜 마음에<수선화>라는 시를 지었다.


"신선의 풍모에 도사의 골격 같은 수선화가 우리 집에 왔다
지난날 이기양이 사신 길에 가져오더니
추사가 또 대동강가 관아에서 보내주었다 (­­‥‥)
어린 손자는 처음 보는지라 부추 잎 같다고 하고
어린 여종은 마늘 싹이 일찍 피었다고 놀란다"


다산은 시 끝에 부기로 추사가 평양에서 보낸
수선화 화분은 고려청자였다고 적었다.

추사는 다산을 그토록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리고 1840년, 추사 나이 55세에 유배의 형벌을 받고
제주도에 와보니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이 수선화였다.

그러나 농부들은 보리밭에 나 있는 아름다운 꽃을
원수 보듯 파버리며 소와 말 먹이로 삼고 있었다.

추사는 하나의 사물이 제 자리를 얻지 못하면
이런 딱한 일을 당하고 만다면서 처량한 감회가 일어
눈물이 나는 것을 금치 못하겠다며 애잔한 시 몇 수를 지었다.

자신의 처지를 이 버림받은 수선화에 비유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추사의 수선화 그림에는
청초하면서 어딘지 쓸쓸한 분위기가 서려 있다.

유홍준의 국보순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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