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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종자료집

사적순례(4)

작성자구봉산|작성시간07.09.30|조회수2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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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태조 3년 한양 천도가 있은 후, 정종은 그 원년 3월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다시 태종이 즉위하여 재차 서울로 천도하게 되었다. 창덕궁은 태종이 재천도하면서 창건된 궁이다.  태종이 말하되 “개성은 왕씨의 구도이므로 거처할 수 없는 곳인데 지금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태조시조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한성은 태조상왕의 창건지이며 종묘와 사직이 있다. 이곳에 거처하지 않는 것은 뜻을 잇는 바 효(孝)가 못되니 근년 겨울에 내가 옮아가 거처할 것이니 궁실을 짓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태종 4년에 시작한 창덕궁 공사를 만 1년만에 완공하고 이름을 “창덕궁”이라 하였다. 태종 11년에 이르러서는 진선문 석교(금천교)를 시축하고 태종 12년에는 돈화문을 건립함으로써, 창덕궁은 완전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로부터 임진왜란까지 약 180여년간은 별로 큰 재난이나 큰 건물의 신축은 없었고 다만 인정전 후원 담장 증축과 수문당과 대조전의 중수 등이 있었으며 임진왜란 후 폐허로 있다가 광해군 때 재건을 시작하여 광해군 5년경 완전히 재건하였다. 그후 인조반정 때 큰 화재가 발생하여 인정전만 남는 수난을 당했으나 그후 다시 여러 전각들을 재건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때 새로 지어진 건물은 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정묵당, 집상당, 보경당, 옥화당, 태와당 등이다.
1863년 철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함에 따라 고종은 인정전에서 즉위하였다. 그후 대원군에 의해 왕이 경복궁으로 이어한 뒤로는 창덕궁에 별로 수리나 영건이 없다가 고종 10년 겨울 경복궁 자경전의 화재로 인해 왕은 다시 창덕궁으로 어어하게 되었으며, 그후 10년간 이궁에 거처하면서 고종13~14년에 걸쳐 일대 수리를 하여 궁궐의 면모를 되찾았다. 그러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치르고 난 왕은 22년 봄 다시 경복궁으로 이어하였다. 그후 창덕궁은 왕이 잠시 들르는 일이 있었을 뿐 이렇다할 변천 없이 20여년을 지내다가 융희 원년 10월에 다시 순종 이하 왕실 일행을 맞이하여 황궁으로서의 출발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일제의 침략 세력이 궁중을 장악하고 있었을 때이므로 황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광무 11년 8월 경운궁에서 즉위한 순종은 그해 10월에 창덕궁의 수리를 명하고 11월에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지만 궁중은 일제 침략자들이 무상 출입하는 장소가 되었다. 인정전, 의정당, 주합루 등 건물은 수시로 이토 히로부미 이하 저들의 접견 향응에 제공되고 후원에는 학생들의 운동회가 열리기도 하니 전일 궁중의 위엄은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융희 4년 8월에는 매국노 이완용 등이 총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지시에 따라 우리나라를 일본에 합병하기로 정한 다음 이 창덕궁에서 마지막 어전 회의를 열고 황제를 핍박하여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 황제에게 양여한다는 조서에 옥새를 빼앗아 누르니 오백년 왕조의 창덕궁은 순종이 “창덕궁 전하"라는 칭호로 여생을 보내는 비운의 궁이 되고 말았다.

돈화문
창건된 것은 태종 12년(1412)이며, 2층 문루에는 큰 종을 걸고 시각을 알리거나 비상시 위급을 알리는 용도로 썼다고 전한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여 광해군 원년에 완공되고 이때의 건물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보물383호).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2층 우진각 지붕의 다포양식이다. 궁궐의 대문 가운데 정면이 5칸인 것은 돈화문이 유일한 것이나 좌우쪽 협칸은 벽으로 막았으므로 실질적으로는 3칸 대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황제가 아닌 군주는 대문을 3칸으로 해야 하는 중국과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곧 3칸 대문으로 만들어 중국의 사신을 의식하면서도 외관은 크고 장중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돈화문을 들어서서 왼편으로 안내판 뒷편 일대에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나무들이 서너그루 있다. 가시가 없고 크기도 큰 이 나무들은 괴목, 회화나무 또는 홰나무라 한다.
돈화문을 지나면, 느티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느티나무는 특히 우리나라, 우리민족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나무이다. 우리나라의 마을에는 대개 큰 정자나무가 있었으니 이때 가장 뛰어난 기능을 발휘한 것이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군림하기도 했고 동네 사람들의 휴식처로 때로는 서당의 선생이 강학하는 민족의 애환이 모인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입구에서 만난 이 나무가 다른 어떤 나무보다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는 한자로 쓰면 모두 “괴(槐)”가 된다. 괴는 주나라 이래 궁내에 심는 나무의 대표적 수종이다. 주례에 보면 주나라 시대에는 궁의 고문(궁성의 가장 바깥누문을 말함)과 응문(궁중의 정문)사이에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심어서 이 나무 밑에 삼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오는 이를 맞이하였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이 제도에 따라 궁궐 입구에 괴수를 심었다.
원래 경복궁의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도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설 당시 사라져 버렸다. 물론 경희궁터와 경운궁에도 느티나무가 있었다. 현재 신문로 시립박물관 동쪽 주변이나 정동일대에 군데 군데 보이는 거목들이 바로 궁궐에 속해 있던 느티나무들이다. 궁안에 심는 나무 하나에도 돌 하나에도 의미와 철학을 담는 우리 조상들의 대단함에 또한번 놀란다. 창덕궁 안 다른 곳에서도 가끔 눈에 띄는데, 나무에도 뜻을 심은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돈화문을 들어서면 길은 메마른 느낌의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원래는 박석이 깔려있던 길이라 한다. 그리고 가운데 부분은 어도로 그 길은 돈화문에서 북쪽으로 진행되다가 금호문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여 창덕궁 내부로 향하게 되어있다. 흘러내리는 산자락에 맞춰 자연스럽게 건물을 배치하다 보니 그렇게 축이 꺾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꺾인 길앞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개울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그 개울을 금천이라 하는데 궁궐의 안팎을 구별하는 의미와 배산임수의 뜻을 살리기 위한 명당수의 의미가 있다. 옛날에는 당연히 맑은 물이 흘렀을 금천에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
금천과 어도가 만나는 지점에는 다리가 놓인다. 이 다리를 일반적으로 “금천교”라 하는데 이것은 태종 11년(1411) 창덕궁을 처음 지을 당시의 것으로 창덕궁과 다른 궁궐을 통틀어 가장 나이가 많은 건축물이다. 다른 것들은 임진왜란이나 혹은 일제시대 때 불타고 헐렸으나 금천교는 60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직 끄떡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금천교는 돌다리치고는 상당히 넓은 다리다. 전체가 세 구획으로 이루어진 삼도인데, 가운데의 어도가 상당히 넓고 좌우에 돌난간을 세웠는데 난간 네 귀퉁이에 동물 석상이 감시를 하고 있다. 네마리 짐승이 제각각 다른 몸짓에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다리 밑의 물길에는 홍예를 틀었는데 두 홍예 사이 역삼각형이 이루어진 부분에는 도깨비 얼굴이 돋을 새김으로 새겨져 있고 그 앞뒤 도깨비 얼굴 앞에는 짐승들이 앉아 있다. 남쪽에 있는 것은 얼핏 보면 해치같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몸에 털이 아니라 비늘이 덮여있고, 뿔도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것을 보면 해태는 아니다. 혹 백택(白澤)이라고 하는 또 다른 상상의 짐승이 아닐까 추측된다. 북쪽에 있는 것은 몸통은 거북이 같으나 얼굴을 보면 사람 얼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무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거북인 아니다. 거북이 몸통에 용의 얼굴을 하고 북쪽을 지키는 상서로운 짐승을 현무라 하니 이것도 현무라고 해야 할까. 현무는 청룡, 백호, 주작과 함께 넷이 짝을 이루어야 하나 여기는 둘뿐이니 현무라고 하기도 어렵다.

금천교를 건너면 진선문이 있다. 일제시기 언젠가 없어진 것을 지금 완공해 제자리를 잡은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금천교와 진선문은 엇갈려 있다. 옛사진을 보면 금천교에서 눈을 감고 곧장 걸으면 바로 진선문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축이 똑바르지 않아 보인다.
진선문에는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이 와서 치면 왕이 듣고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주마고 하는 큰북이 달려 있었는데, 태종대에 처음 설치하였다가 중간에 유명무실해진 것을 영조대에 다시 설치하였다 한다. 이 북을 “신문고" 혹은 “등문고"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이 궁궐 문으로 들어가서 북을 쳤다고는 쉽게 생각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진선문 북쪽으로 가면 벽돌건물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 기법이 아니다. 이곳은 일제시대 때 일제가 창고나 또는 검도장으로 쓰던 곳이라 한다. 그 건물 북쪽에는 제대로 된 우리 건물이 있다. 주변의 부속건물들은 모두 잃어버린채 홀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어딘지 범접할 수 없는 격조가 있다. 안내판에는 구선원전으로 되어 있다. “종묘"가 역대 왕과 왕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일년에 다섯 차례 제사를 모시는 국가의 사당이라면 선원전은 태조와 현왕의 4대조의 초상화-어진을 모셔놓고 초하루, 보름, 생신이나 기일 등 수시 로 왕이 직접 가거나 혹은 대리인을 보내어 차례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이다.
종묘가 국가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서울의 대표적 상징으로 높이 모심을 받았다면 선원전은 왕실의 정신적 지주로서 궁궐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인정받았다. 왕이 궁궐을 옮겨갈 ??는 반드시 선원전의 어진부터 챙겨 받들어 모시고 갔다.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궁궐을 잡아먹은 일제로서는 그런 선원전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1927년 총독부에서는 창덕궁 후원 서북편에 있던 대보단 자리에 새로 선원전을 짓고 어진들을 옮겼다. 이른바 신선원전이요 원래의 선원전은 빈 건물만 남아 구 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그 구선원전은 저렇게 신주없는 사당의 썰렁함에 젖어있다.

현재는 선원전만이 남아 있으나 건물의 네모퉁이에는 “진설청”과 “내재당”의 부속채가 있었고 동남쪽에는 국왕의 재실인 10칸의 양지당이 있었다. 남쪽 행각에는 연경문이 있고 서쪽에는 승안문과 지난날의 일을 되새긴다는 의미의 건물명인 억석루가 연속되어 있다. 행각 남쪽엔 영의당 선원전 담장 밖 북서쪽에는 숙경재가 있고 동쪽문은 만안문 서쪽문은 만녕문 북쪽에는 경숙문과 영휘문이라 하여 조상을 공경함으로써 영원히 안녕을 누리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이익공 양식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위에 네모 기둥을 빠짐없이 세우고 내부는 전체를 통칸으로 하여 우물마루로 깔았다. 기단의 앞면과 뒷면엔 3, 5, 7칸 부분에 단순한 장대석으로 계단을 설치하였다. 실제의 출입구는 정면 가운데 1개소임에도 불구하고 앞뒷면으로 6개소에 설치한 계단은 조상의 혼백과 교통하려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

궐내각사
 

동궐도에서 보듯이 그 당시에는 선원전 앞 넓은 마당에 이십여 채의 건물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한다. 선원전 바로 앞에는 제물을 준비하여 놓은 진설청과 제관이 머무는 재실이 있었고 그 동쪽으로 와서 선원전에 갈 때 머무는 “양지당”이라는 건물과 그 부속 건물들이 있었다. 그 남쪽에는 내의원, 내의원 남쪽으로 홍문관이, 홍문관 동편에는 정청이 있었다. 약방으로 불리기도 하는 “내의원”은 왕과 왕실의 진료를 담당하는 기구이므로 당연히 궁궐 안에 있어야 했다. “홍문관”은 궁궐에 보관하고 있는 서적을 관리하면서 학문과 글짓는 일을 연마하여 왕에게 자문을 하는 일을 담당하는 관서였으며, 정청이란 인사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홍문관원들은 자동적으로 왕과 함께 경전과 역사책을 읽고 토론하는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또 왕의 명의로 글을 짓는 지제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인사를 담당하던 관서는 이조와 병조로서 역시 본청은 궁궐 밖에 있었지만 인사업무는 담당관원들이 궁궐안! 정 뼁들어와 처리하였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인사권은 왕에게 있었고 따라서 왕의 의사를 묻고 이를 반영하는 인사업무를 원활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정청을 왕이 계신 곳 가까이에 마련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왕을 가까이서 모실 필요때문에 궁궐 안에 들어와 활동하는 관원들의 관서를 통틀어 “궐내각사”라 한다. 일제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창덕궁 역시 철저히 파괴하였다. 신선원전은 창덕궁의 내의원과 홍문관등을 흔적도 없이 뭉개버리고 들어선 건물이다.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 발췌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을 들어서면 건너편 동쪽에는 “숙장문” 북쪽에는 “인정문” 남쪽에는 긴 행랑이 둘러싸고 있는 넒은 마당이 있 다. 진선문 좌우의 행랑과 남쪽 행랑은 병조에서 궁궐을 지키기 위 해 파견된 분실이라 할 “내병조”, 왕의 의복과 궁궐에서 쓰는 보물 과 인장등을 관리하는 “상의원”, 왕이 참여하는 큰 행사에 장막을 치는 일을 담당하는 “전설사” 등이 들어있는 궐내각사의 연장이다. 그중 진선문과 숙장문은 일제에 의해 사라졌으나, 1996년 복원공사를 해 지금은 재건되었다. 진선문을 들어서서 만나는 네모난 넓은 마당은 즉위식이나 각종 큰 잔치 혹은 중대한 재판을 진행하던 곳으로, 곧 궁궐 안의 광장인 셈이다. 왕들은 이 마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인정문을 들어가 인정전 용상에 앉음으로써 왕이 되었다.

인정문은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문이 셋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큰문은 왕의 출입문인 어문이다. 동쪽은 문인, 서쪽은 무인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태종 5년에 인정전과 같이 창건되고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중수하였고 영조 20년(1744)에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재건된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21년에 건립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지금의 모습은 1912년경에 인정전의 행각을 전시장으로 만들면서 전시장 출입문의 기능으로 바꾸기 위해 벽체와 바닥의 구성을 인정문을 들어서서 바로 회랑의 전시장으로진입할 수 있도록 일제가 변형시켜 놓은 것이다. 인정문의 편액은 검정 바탕에 흰글씨로 양각하였고 선조때의 명필인 “북악 이해룡”의 글씨라 한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이다.
태종 5년의 창덕궁 창건 때에 건립된 것을 태종 18년(1418)에 고쳐 짓도록 하여 7월 착수되고 같은 해인 세종 즉위년 9월에 준공된다그 뒤 36년이 지난 단종 때에 해체보수공사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광해군 ??에 중건된다. 1623년 인조반정 때에는 인정전만은 화재를 당하지 않았다. 정조 6년(1782)에는 이전에 없던 품계석을 인정전 앞뜰에 설치하였고 이 품계석은 다른 궁에도 설치하게 되었다.
그 뒤 순조 3년(1803)에는 다시 소실되고 이듬해에 중건된다. 50여년 뒤인 철종 7년(1856)에는 건물이 퇴락하였다는 이유로 또 한차례 완전히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시행하였으나 건물의 형태에는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현존하는 건물의 골격은 순조 때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창덕궁에 서양식 가구와 실내장식이 도입되는 1908년 무렵 인정전의 내부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회흑색의 전돌로 깔린 실내바닥을 서양식 쪽널마루로 만들고 전등이 설치되었다. 출입구를 제외한 창문 아랫부분의 외벽에 전벽돌로 쌓았던 화방벽이 철거되고 대신에 목재의 큼직한 머름대와 궁판으로 바뀌었다. 또 창문 내측에 별도의 오르내리창이 설치되며 휘장을 설치하기 위한 커튼 박스도 만들어지고 지붕의 용마루에는 이왕가를 상징하는 배꽃문장으로 장식하여 왕궁이 아닌 가문의 건물로 격하시켰다.
 
여기서 잠깐 오얏무늬 모양의 휘장에 대해 살펴보자. 대한제국부터 오얏꽃은 황실의 문장처럼 쓰였다. 대한제국의 두 번째로 격이 높은 훈장 이름도 “이화대훈장”이었고 문서나 복식에도 이화문양이 자주 보인다.  하지만 우리 건물 어디에도 이런 식으로 용마루에 장식을 한 예는 없다. 따라서 인정전의 구리로 된 오얏무늬라든지 지붕 용마루의 오얏무늬라든지 이런 것은 아마 일본인들이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순종을 “이왕” 고종을 “이태왕”이라 불렀고 망한 나라의 왕실을 이왕가, 이왕실이라 불렀고 또한 조선을 일개 “이씨의 나라”(일본은 옛부터 여러개 성씨가 군주인 나라로 나눠져 있었다.)로 생각하고 이씨조선 “이조<李朝>”, 즉 천황이 다스리는 여러 왕들 중 하나 정도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이조란 말은 절대 좋은 말은 아닐! ! 터이다.

인정전의 건물구조를 보면 정면 5칸 측면 4칸해서 20칸 건물로 창덕궁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놓고 추녀마루 끝에는 잡상을 아홉개씩 놓았다. 내부 역시 이에 걸맞는 차림을 하고 있다. 겉에서 보기에 지붕이 2층이지만 속은 한층으로 터져 있어 넓고도 높은 공간이다.
월대에는 전면과 좌우 측면에 계단이 있으며 전면부의 어계의 앞면에는 당초문을 조각하였고 그 중앙부의 답도에는 봉황을 새겨 놓았다. 봉황은 인정전 내부의 중앙 천장에도, 보좌 위의 닫집에도 새겨져 있으며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뒤에 경운궁(덕수궁)의 중화전에 새겨진 용과 비교된다. 인정전의 편액은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양각되었고 액자는 칠보문을 그렸다. 액자의 네 귀는 구름모양으로 조각되었고 현판의 글씨체는 “서영보”의 솜씨라 한다.

인정전에서 동쪽으로 위치한 건물이 선정전이다. (현재 새로 복원
된 선정전은 당시와는 차이가 있다.)
이곳은 왕이 신하들을 만나 국사를 논의하고 학자관료들과 유교경 전과 역사책을 공부하기도 하고 유생들을 불러모아 실험을 보기도 하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는 공식 집무실-편전이다. 법전인 인정전의 동쪽에 뒤로 약간 물러나 앉아 규범을 지키되 주변환경에 적합하도록 적응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 용도가 중요해서 그런지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궁궐 건물 중 유일하게 청색 기와의 건물이다.

세조 7년에 궁궐 건물들의 이름을 바꿀 때 “조계청”이라 하던 것을 선정전이라 하였다. 선정전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이 광해군 때 재건되고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당하여 인조 25년(1647)에 중건되었다. 이 때에는 광해군이 창건한 인경궁의 전각을 철거하여 그 재목을 이용함으로써 700여 칸의 전각 중건을 5개월만인 짧은 기간에 완공한다. 그 뒤의 선정전 변천에 관해서는 현종 15년(1674) 7월에 건물이 손상된 것을 고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봄부터 앓아 온 질병으로 8월 현종이 승하하였으므로 시행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리고는 선정전의 수리에 관한 기록이 없으므로 이 건물은 인조 때에 중건된 건물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선정전이 왕과 신하들을 공식적으로 만나 이런 저런 일을 처리하는 집무실이라면 희정당은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장소이다. 1917년 11 월 10일 오후 다섯시 순종이 기거하던 대조전에서 불이 났다. 이 불은 그 주변의 건물로 크게 번져 대조전 희정당을 비롯하여 내전 일대의 주요 건물로 번져나갔다. 불이 난지 4일뒤 화재 처리 방도를 마련했는데, 우선 낙선재를 순종의 처소로 삼고 불타 없어진 내전 건물들은 다시 짓기로 하였다. 다시 짓기는 짓되 “조선식을 위주로 하고 나머지는 양식을 참고로 하기로” 정하였다.

또 얼마 뒤 총독부와의 협의 하에 경복궁의 내전인 교태전과 강녕전을 비롯하여, 그 주변 건물들 여남은 채와 그 부속건물의 구재를 창덕궁 전각을 중건하는 데 이건하기로 결정했다. 중건공사는 일본인이 감독을 맡아 진행했다. 그 중건공사는 원래 1년 안에 마칠 계획이었으나 중간에 고종이 승하하고 3.1운동이 크게 일어나는 등 이런 저런 사정으로 3년이 걸려 1920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이렇게 총독부와 일본인이 맡아서 공사를 추진하고 더구나 “조선식을 위주로 하고 그 나머지는 양식을 참고하기로” 하면서 당연히 왜곡과 변질이 따르게 되었다. 창덕궁은 산자락을 끼고 있어 상대적으로 건물들의 크기가 경복궁에 비해 작다. 그런데도 좁은 희정당 터에 덩치가 큰 경복궁의 강녕전 건물을 억지로 들어앉혔다.

그러면서 모양도 바꿔 강녕전은 원래 지붕에 용마루가 없었으나 옮기면서 시멘트로 바른 용마루가 생겼다. 중앙의 세칸은 툇칸이라 하여 마루가 밖으로 드러나 있던 것이 없어져 버렸고, 건물 앞에도 월대가 있어야 제격일텐데 가파른 계단만이 달랑 달려있다. 벽이 없는 앞마당에는 웬 굴뚝까지 서 있다. 희정당으로 들어가는 앞 건물에는 난데없이 일본식 현관까지 두 개가 튀어나와 있다. 자세히 보면 현관의 창방 부분에는 오얏꽃 무늬가 여기저기 달려있기도 하다. 동궐도의 아담한 건물과 비교해보면 너무나 이질적인 모습이다. 지금의 희정당 안을 들여다보면 거실로 사용되는 부분이 정면 9칸 측면 3칸이다. 중앙부의 3칸은 전체를 응접실로 꾸미고 서쪽의 3칸은 회의실이 되고 동쪽의 3칸은 여러칸으로 막아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1920년대에 중건하면서 내부는 서양풍의 가구와 치장이 더해져 커튼박스와 전등이 설치되고 쪽널마루 위에 붉은 카펫으로 설치한 모습이 이색적이다. 특히 응접실에는 해강 김규진이 그린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 만물초승경도”가 각각 동쪽과 서쪽 벽에 걸려있다. 

희정당 뒤편으로 돌아가면 대조전이 있다. 대조전은 왕비의 시어소, 곧 왕비가 기거하면서 공적인 활동을 하는 집이다. 왕비는 내명부라는 체제로 편제되어 있던 후궁과 궁녀 등 궁궐의 여자들을 관리하는 공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공인이다. 그러한 왕비가 활동하는 공적인 건물이 대조전이다. 대조전은 창덕궁에서 가장 내밀한 곳  구중 궁궐 깊은 곳 중궁전이다. 지금의 대조전도 희정당과 함께 1917년에 불이 나서 모두 없어진 뒤 경복궁의 왕비 처소인 교태전을 헐어서 그 자재로 새로이 지은 것이다.
희정당에서 대조전을 잇는 육교식 복도나 정문인 선평문으로 들어가는 가파른 계단에서부터 그 주위의 부속건물들 모두 본래 제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앞마당에는 영락없이 잔디가 깔려있고 소나무가 서너 그루 서 있다. 정면 9칸 측명 5칸 해서 45칸이나 되는 큰집이 좌우에 부속건물과 행각을 거느리고 버티고 있는 모습은 너무 크고 위압적이다.
중앙의 세칸은 툇마루로 되어 있는데 그 앞에는 넓은 월대가 있다. 월대는 왕비를 위한 연회 등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월대를 지나 툇마루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넓은 대청마루이고 그 마루 좌우로는 9칸짜리 온돌방이다. 그 가운데 동쪽 온돌방이 주로 왕과 왕비가 동침하는 방이다. 지금은 형태가 변해 있지만 그 방은 내부가 다시 우물 정자로 칸막이가 되어 아홉 개의 작은 방으로 나뉘는데 왕과 왕비는 가운데 방을 쓰고 그 주위의 여덟개 방에는 궁녀들이 두명씩 들어가 시중을 들었다고 한다. 대청은 서양식의 쪽널마루로 깔고 응접실로 꾸며 중국풍의 의자를 갖추고 왕비의 침실에는 침대가 놓인다. 창호의 종류도 다양하여 대청 전후면은 세살분합문을 설치하고 외부로는 머름중방 위에 亞자 분합문과 고창을 두었고 대청과 방 사이에는 8짝의 불발기문을 설치하고 그 윗 ! 대청 동쪽 벽에는 “봉황도”로 서쪽 벽에는 “군학도”로 장식하였다.
 
대조전은 여느 건물들과는 달리 용마루가 없다. 용마루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경복궁의 교태전에서 설명한 바 있으나, 다시 간단히 설명을 한다. 왕은 용으로 상징되는데 용이 깃드는 집에 또 용(용마루)이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함으로 용마루를 만들지 않았다 한다. 이를 부연하자면, 대조전의 대조란 크게 만든다 혹은 무언가 큰 것을 만든다는 것일텐테 이때 큰 것이란 다시 말하자면 왕자, 즉 다음 대의 왕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곧 왕과 왕비가 동침하여 아기를 생산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집은 그러한 천지음양의 조화, 남녀가 화합을 이루는 곳이므로 이를 가로막는 듯한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은 듯하다. 비단 이 대조전만이 아니라 경복궁의 교태전과 강녕전 창경궁의 통명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용마루가 없는 대조전은 1926년 순종이 이곳에서 승하하신 ! 에늚 무엇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주인 없는 삭막함만이 느껴진다
 

대조전 서쪽으로는 내부 벽면이 타일로 마감되어 있는 건물이 있는데, 왕실의 부엌인 수라간이다. 하지만 서양식으로 만들어져 보기 좋지 않다. 1917년 대조전에 불이 날 때 그 서쪽 일대까지 번졌고, 그것을 일본인들이 다시 지으면서 서양식-일본식으로 개조하기도하였고 또 순종이 1926년까지 이 일대에 살면서 개조하기도 하였다. 타일로 처리된 건물은 그렇게 양식 부엌으로 개조된 결과로 남은 것이다.
대조전 뒤쪽에 있는 건물이 경훈각이다. 지금은 일층 건물이지만 원래는 이층 건물로서, 이층 건물일 경우 일층은 “각” 이층은 “누”로 이름을 별도로 붙이는 관례에 따라 일층이 “경훈각,” 이층은 “징광루”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것을 1917년 화재 이후 다시 지으면서 일층으로 만들어 버렸다. 본래 경훈각은 정면 5칸의 2층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칸 측면 4칸의 단층 건물로 되어버렸다. 대청의 동쪽 벽에는 “조일선관도”가 서쪽 벽에는 “삼선관파도”가 그려져 있는데 대조전과 희정당의 그림과 같이 1920년에 제작된 것이다.

희정당 동쪽 곁에 있는 건물의 이름은 성정각이다. 성정이란 말은 “성의와 정심”의 앞글자에서 따온 것으로 성의란 뜻을 순수하게 집 중하는 것이요, 정심이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건물은 왕이나 왕세자가 이런 자기 훈련을 하던 곳이다. 왕이 학자들 과 책을 공부하며, 정책 토론, 곧 경연을 열거나 왕세자가 선생님들 과 공부를 하는 곳, 곧 서연을 열던 곳으로 자주 쓰였다. 문 이름도 영현문(현인을 맞이하는 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앞에 안내판에는 “내의원”이라 소개되고 있다. 애초에 내의원은 인정전의 서쪽 지금 일본식 창고건물이 있는 부근에 있었는데 이 건물이 왜 내의원이 되었을까? 이곳이 순종이 이 일대에 살던 일제시기에는 내의원으로 쓰였기 ??문에 이렇게 소개하는 게 아닌가 짐작된다. 따라서 궁궐 본연의 모습을 알리지 못하고 일제시대에 어떻게 쓰였나를 설명한다는 것은 그 의식이 아직도 일제시대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나쁜 사례로 볼 수 있다.

성정각은 그나마 사방으로 문을 꼭 걸어닫아 행랑채 너머로 담장 너머로 발돋움을 해야 겨우 중허리까지만 볼 수 있다. 성정각은 본채에 덧붙여 누가 번듯하게 솟아 있다. 남쪽 편에 붙은 편액의 누 이름이 “희우루”인데 동쪽에는 또 “보춘”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가뭄에 단비를 맞기도 하고 또 동쪽에서부터 전해오는 봄기운을 맞기도 하려는 염원인가 헤아려진다. 성정각에 기대어 보면 남쪽에 길게 뻗은 행랑채에 “조화어약”, “보호성궁”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왕의 약을 지어 임금님의 몸을 보호한다는 뜻 일텐데, 원래는 내의원에 붙어 있던 것을 일제시기에 이곳이 내의원으로 쓰이면서 옮겨와 단 것으로 보인다. 마당에는 약재를 빻던 돌절구도 놓여 있다.

성정각 뒷편으로도 꽤 큰 건물이 한 채 있다.
성정각의 북쪽에 있는 관물헌은 동궐도에서는 “유여청헌”이라 하였으며, 정조대에 창덕궁을 수리할 때에 관물헌도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최소한 183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고종 21년(1884)에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편액은 달랑 '집희'두글지만 써 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편액 글씨치고는 서툰 글씨이다. 갑자년에 쓴 어필로 표기되어 있다. 갑자년이라면 1864년 고종원년이고 그해 고종은 열세 살이었다.
열세 살짜리 소년왕이 무언가 기념해서 편액을 쓴 듯하다. "집희"란 "빛남 밝음 인격이 계속하여 오래 빛남이라”는 뜻과 "계승하여 넓힘"이라는 뜻이 있다. 건물 이름 끝자로는 대개 "전, 당, 합, 각, 재, 헌, 루, 정" 가운데 하나가 붙게 마련인데 단지 '집희'라고만 했으니, 집희전은 아닐테고 집희당이라는 것인지 집희각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혹은 건물 이름이 아니라 “이 건물에 사는 사람의 인격이 오래 빛나기를” 바란다거나 아니면 자신이 새로 왕이 되었으니 왕위를 계승하여 밝히겠다는 의지의 표명인지 모르겠다.

이 건물의 본 이름은 '관물헌'이다. 왕이 이런저런 형식으로 신하들을 만나고 또는 경연을 열고하는데 어느 한 건물에서 그런 일을 모두 처리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건물들을 옮겨 다녔다. 그렇게 왕이 주로 활동하는 공간이 내전의 주요 부분을 형성하는 것이 창덕궁의 건물로는 희정당, 성정각, 관물헌이 그에 포함된다.

인정전에서 인정문으로 되돌아 나와 왼쪽으로 꺾으면 숙장문이다. 숙장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으로 '어차고'라고 안내판이 설치된 건물이 있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된 건물안에는 초헌, 연과 여 같은 가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는 프랑스제 마차도 있다. 1997년까지는 1909년산 영국 다임러 자동차와 1903년산 미국 제너럴 모터스 회사의 캐딜락자동차도 있었는데 1997년 말에 현대자동차에서 수리, 복원을 하기 위해 가져갔다고 한다. 그런데 궁궐에 자동차 차고가 있고 유리창이 있고...
이곳이 이렇게 전시용 차고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기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원래 이 건물의 이름은 “비궁청”이라는 이름의 “빈청”이었다. “빈청”이란 비변사 당상들, 다시 말하면 정승 판서급의 고위 신하들이 왕을 만나뵈러 궁궐에 들어왔을 때 또는 만나고 나와서 자신들끼리 현안을 논의하던 건물이다. 궁궐에 드나들던 관원들 가운데서 가장 고위 관원들의 공간이요, 그런 점에서 궐내각사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이었다. 그런 빈청을 “어차고”로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선궁궐과 정치문화를 능멸하고 부정하는 일제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다. 그런 곳을 아직도 어차고라고 설명하고 있는 안내판에는 아직도 일제시대가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어차고에 전시된 것 가운데 주정소라고 하는 물건에는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안내문에는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인 화성의 현륭원에 참배갈 때 도중에 쉬던 시설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꼭 정조가 쓰던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그 모양이나 거기 새겨진 문양 등을 보더라도 어떤 왕이 썼던 간에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쓰던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왕 전용 이동조립식 휴게실인 셈이다.

대조전 뒤뜰 화계 위의 담에는 전돌로 축조된 추양문과 천장문이 있고 그 북쪽의 넓적한 뜰에 “가정당”이 있다. 이 건물은 “동궐도”와 (궁궐지) 그리고 “동궐도형”에도 표현되지 않은 건물이며 조선시대 건물을 일제시대 초에 옮겨 세운 것으로 보고 있으나 경운궁(덕수궁)에 있던 가정당을 이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덕수궁의 가정당은 중화전 북쪽에 있는 즉조당과 석어당의 북쪽에 있던 건물로서 고종  광무 8년(1904)의 화재 때에도 무사하였고 1919년
1월 21일에 함녕전에서 고종이 승하할 때까지는 덕수궁이 궁궐로서 사용되었다.

건물의 주위는 수목과 경관이 수려하고 궁궐 내전 뒤쪽에 높직한 대지에 자리하면서도 밖으로 노출되지 않아 한적하고 밝은 분위기가 별당지로서는 일품이다.

함원


대조전의 뒤쪽에 동쪽으로 접속된 건물인 함원전은 경복궁의 교태전에 접속되었던 “건순각”과 같은 모습이지만 건물의 칸 수와 기둥 간격은 약간 변형되어 있다. 대조전을 중건하면서 경복궁의 건물과는 다르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본래는 함원전 대신에 그 동쪽으로 별도의 건물인 “집상전”이 있었는데 인조 25년(1647)에 집상당을 건립하였고 그 뒤 현종 8년(1667)에 모후인 인선대비를 위하여 경희궁의 집희전을 옮겨 짓고 집상전이라 하였다. 궁궐에서는 대비전을 중궁전의 동북쪽에 세우는 규범에 따른 것이다. 동궐도에서는 집상전도 대조전과 같이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건물로 그려져 있으나 동궐도형에서는 빈터만 표현된 것과 궁궐지의 기록을 참조하면 순조 33년의 화재로 소실된 뒤로는 중건되지 않았으며 1920년의 중건 때에는 집상전 대신에 함원전을 세운 것이다.
 

“궁궐지”에서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고 있으나 근래에는 창덕궁에서 들어가도록 되어있는 건물로 창덕궁의 동남쪽에 창경궁과 이웃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승정원 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에 헌종 13년(1847)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된 건물로서 국상을 당한 왕 후와 후궁들이 거처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를 뒷 받침하는 예로 낙선재 바깥 뜰에 사각정이 있다. 4면에 亞자분합문 과 고창을 둔 것으로서 관을 발인할 때까지 두던 빈전이다. 일반의정자와는 그 용도가 크게 다른 건물이라 하겠다.
1926년에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자 계후인 윤비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고 이방자여사도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1989년에 타계한 뒤로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1820년대 제작된 동궐도에서는 낙선재의 모습은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서쪽에 낙선재가 있고 행각으로 둘러싸니 동쪽에 “석복헌”이 있고 다시 그 동쪽으로 “수강재”가 있는데 이 건물들을 통틀어 낙선재라 한다. 원래는 석복헌과 수강재 남행각 밖으로 중행각이 둘러 있고 다시 그 바깥쪽으로 외행각이 길게 늘어서 있었으나 중행각 외행각은 철거되었다.

순조 28년(1828)에 건립한 연경당보다 20년 뒤에 세워진 낙선재는 궁궐에 조영되는 주거 건축술로서 그 구성의 법식과 보존 상태가 훌륭하며 특히 연경당보다는 낙선재가 지형과 환경에 따라 자유분방하며, 다양한 건축물을 보여 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12칸의 낙선재 남행각에 있는 “장락문”이 정문이 되며, 장락문의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이다.

취운정


수강재의 뒤뜰 화계 위에 자리잡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평면에 굴도리를 사용한 팔작지붕의 건물로서 서까래가 일반적인 것과는 달리 각재인 점이 특징이다. 이 건물은 숙종 12년(1686)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동궐도에도 표현되어 있는 건물이다. 평면상으로 4면의 바깥기둥 사이에는 亞자 난간을 두르고 안쪽 기둥에만 문짝을 달아 4면의 툇칸이 개방되어 있어 좁은 대지를 여유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서쪽의 담장에 일각문이 있어 석복헌 뒤쪽의 한정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에 각기둥과 굴도리를 사용한 건물이며, “동궐도형”과 “조선고적도보”의 배치도에서는 이 자리가 빈터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서는 1917년 이후에 옮겨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 가운데에 2칸만 앞퇴를 두고 동쪽 칸은 누 마루로 구성하였고 전면을 제외한 3면에는 쪽마루를 두고 그 위로 亞자 난간을 둘렀다. 기단은 정면의 2칸 부분만 두벌대의 장대석으 로 두르고 앞마당에는 석분과 괴석의 운치를 더하였다. 툇마루의 서쪽벽에도 창문을 설치하여 필요에 따라 여닫도록 된 것과 변형된 亞자분합문이 한가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낙선재 화계 뒤쪽의 후원인 높직한 터 위에 자리한 육각정의 누각건물이다. “궁궐지” 나 “동궐도형”에서는 육우정, 곧 “평원루”라 기록 하고 있다. 한 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안쪽으로 다시 한 단을 돌려 쌓고 그 위에 육각형의 돌기둥으로 하층을 세운 뒤 그 위에 계자 난간의 툇마루를 구성하였고 난간의 궁판에는 투각하여 치장하고 난간 하부로도 낙양을 두어 장식하였다. 위층의 벽에는 육각형의 기둥사이로 사분합문의 창살 구성이 독특하고 공포는 일출목의 다포형식이며, 겹처마의 육각지붕 정상에는 절병통을 설치하였다. 내부의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되었으나 중도리 안쪽 육각형의 부분은 마름모꼴의 소란반자로 구성하고 봉황과 용과 박쥐문양으로 화려한 단청을 베풀었다. 궁궐에 있는 소규모의 정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치장된 건물이다.

상량정의 서쪽 담장에 있는 문으로서 전돌로 만월형의 출입구를 내고 좌우로 밀어 열게 된 넌출문이 달렸다. 바깥쪽 문 좌우 담벽에는 수복등의 길상무늬와 꽃무늬로 가득하게 채웠다.
궁궐의 협문으로는 유일하게 원형으로 만든 아름다운 문이다.

상량정 서쪽에 있는 승화루를 “창경궁 궁궐지”에서는 창덕궁 후원 이 주합루에 비견하여 소주합루라 하고, 아래층을 “의신각”이라 하였다. 연경당의 정문과 낙선재의 정문이 다 같이 장락문인 점과 주변의 누각을 주합루와 소주합루라 한 것에서 창덕궁의 주합루와 창경궁의 낙선재와 승화루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주합이란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합루의 아래층인 규장각은 서고로 사용되고 위층은 어진 어제 어필 보책들을 보관하기도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선왕의 작품과 동서고금의 책들을 수장하여 시공이 합치되는 건물이라는 이름이 이해가 되나 소주합루가 같은 용도로
쓰였는지는확실하지 않다. 다만 아래층의 이름이 의신각으로 제도의 궁궐이라는 뜻이므로 각종 의궤와 법규책을 보관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볼 따름이다.

순조대에도 “소주합루”라 불리던 건물이 승화루로 바뀐 시점 분명하지 않지만 헌종대에 낙선재를 건립한 뒤로 짐작된다. 건물의 아래층은 현재 전부 개방되어 있으나 동궐도에서는 여기에 방을 꾸민 것으로 표현되어 있고 현재의 돌기둥 아랫부분에 인방이 끼이는 홈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철거된 것으로 판단된다.

건물 이름이 독특하게 삼삼와로 부르는 연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부용정 남쪽에 있던 개유와는 중국서적을 수장하였던 건물이며 그 의미가 모든 것이 있는 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삼삼와는 여섯 모둠집이라는 뜻이며 승화루의 의신각과 함께 귀한 서적을 보관했 을 것으로 추측한다. 육각정인 삼삼와는 한 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기둥 하부로 2단의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초석과 고막이를 돌려 놓고 그 위의 아래층 벽에는 전돌로 귀갑문 장식을 하였다. 바깥쪽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르고 상중하의 삼단으로 구획된 살난간을 두르고 이 난간이 칠분서의 난간과 계단으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육각형의 기둥을 사용한 초익공 겹처마로 지붕의 정상부에는 나지막한 절병통을 설치하고 있다. 현재는 위층의 창호가 세살분합문으로 되어있으나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에는 亞자살 분합문이 설치되었다. 그러므로 이것도 후대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칠분서는 육각정인 삼삼와에서 북쪽으로 연결된 한 칸 폭의 6칸 건물로서, 초익공 구조에 분합문을 설치하고 난간을 두른 복도각인데 건물 이름의 의미는 잘 알 수 없으며, 현재는 없는 건물인 중희당과 삼삼와를 연결하는 건물이다. 
 
 
 

창덕궁 후원이 만들어진 것은 조선시대 초기인 태종 때이다. 왕조실록에 태종 5년 10월 창덕궁이 세워졌다는 기록과 이듬해인 태종 6년 4월 창덕궁 동북쪽에 '해온정'을 지었다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있어 이 창덕궁 동북쪽이 바로 비원으로 알려져 있는 곧 후원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해온정이라는 정자 앞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잔치를 벌이고 등놀이를 하였다.
해온정은 태종 14년에는 "신독정"이라 이름을 고쳤는데 세종때 부터는 별로 이 신독정의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세종이 창덕궁보다 경복궁에 즐겨 머물렀던 까닭이라 생각된다.
또 한편으로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 정자가 사용되지 않아 자연히 없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세조 때에는 후원좌우에 연못을 파게 하였다는 기록이 세조실록 5년 9월26일 기록에 보이고 또 세조 7년 11월에 열무정에 행차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열무정"은 세조 5년에 판 연못주위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예종 때에도 후원에서 습진(적을 뒤쫓아가 공격하는 연습)이 있을 때 이 열무정에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궁궐지에는 "열무정" 북쪽에 사정기를 쓴 비석을 세워둔 비각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 부용지 서쪽에 "마니" "파려" "유리" "옥정"의 4개의 샘에 대하여 기록한 비각 곧 "사정기 비각"이 서 있다.


세조는 후원을 확정하였다. 세조 8년 정월에 동복  담장을 넓게 쌓고자 하여 둘레 4,200자 (약 1,272미터)로 그 안에 있던 백성의 집 73채를 헐었다.또 58채의 집들을 헐어 북쪽담장도 넓게 쌓아 후원의 경계가 지금처럼 성균관에 가깝도록 하였다. 이때가 세조 9년 이였다.
창덕궁 후원이 넓어지면서 왕과 왕의 가족들이 쉬던 곳이 난잡한 놀이터로 변한 것은 연산군 때이다. 연산군 3년 초에 후원의 서쪽담장을 높이 고쳐 쌓게 하여 궁밖 사람들이 궁안의 놀이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였고 또 9년에는 동쪽담장과 서쪽담장 아래쪽의 집들을 모두 헐게 하였다. 더욱이 10년에는 성균관이 후원과 근접하고 있다고 하여 성균관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였다.
연산군은 더 나아가 재위 1년(1505) 5월에는 새로 대를 쌓을 것을 명하였으니 이것이 서총대이다. 돌을 10자 높이로 쌓고 주위에 돌 양쪽 강에 배들을 띄우게 난간을 둘렀으며, 1,0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이로 만들었다. 또 대 앞에는 큰 엿못을 파게 하였는데 감독만 900여명이고 일꾼들은 수 만명 이었다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남으로써 공사는 중단되었고 중종 때 모두 철거되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창덕궁 후원에 일어난 일들은 이들말고도 성종 8년 (1477) 3월 3일 선공감에 명하여 후원에 채상단을 쌓게 한일도 있으니 이는 왕비가 양잠을 장려하던 일과 관계가 있으며 뒷날 1911년 후원의 주합루 서쪽 서향각에 양잠소를 만들게 한 일과 연결된다고 하겠다.

또 임진왜란(선조25년)전인 선조 7년 (1574)8월9일에는 후원에 말이 달리는 길을 만들어 기사를 시험케 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서내에서 없었던 일이니 하지 않을 것을 간하였으나 임금께서 듣지 않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은 모두 불타고 후원도 그 피해가 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이 영건청을 두어 여러 건축공사를 강행하자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영건청을 없앨 것을 간하였던 일이 있다. 이해 광해군은 ""근일 영건청을 없애라는 삼사의 논의가 있었는데 그 말은 옳다...책방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한가롭게 놀 곳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몸과 마음이 불안할 때 쉴 곳이 없어 책방을 만들어 몸과 마음을 고치는 병당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니 영건청을 폐하기는 어렵고...혼경전 영화당같은 것은 영조하지 말도록 하여 공의에 따르겠다"는 기록이 광해군일기 2년 2월 을미조에 보이고 이 기록 밑에 "이 여러 전각의 건축일 들은 모두 먼저 이루어졌다. 또 별전 여러곳도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다. 또 "기이한 화초, 괴석들을 늘어놓고 원유의 꽃과 돌 사이 곳곳에 작은 정자들을 만들어 유람에 대비하! 였는! 데 그 기교하고 사치스러움이 예전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라고 주해 되어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재정에도 불구하고 크게 공사를 하여 후원의 위용을 갖춘 것을 알 수 있다.

후원입구
낙선재에서 다시 중희당 터를 지나 북쪽으로 진행하면 문이 두 개 나오는데 동쪽문은 창경궁으로 통하는 문이고 서쪽문은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다. 그런대 후원으로 들어가자면 한가지 눈에 걸리는 게 있다. 바로 깔끔하게 포장된 포장도로 이다. 이곳은 시민들이 휴식하는 공원이 아닌 말 그대로 역사를 보존하고 있는 보존 공간이다. 이 포장도로는 1960년대 군사정부시절 만든 도로라 했다. 산길을 포장한 덕(?)에 양쪽의 생태계를 갈라놓는 꼴이 되었다.

부용정은 숙종 33년(1707)본래 택수재로 지은 것을 정조 16년에 고쳐 지으면서 부용정이라 부르게 된 정자이다. 정자의 남쪽은 낮은 동산인데 여기는 단이 지게 흙을 파내어 고르고 그 가장자리를 장대석으로 마무리 하였다. 그리고 단마다 꽃을 심거나 석함을 놓아 치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전통정원에서의 화계라 부르는 것이다.
화계는 글자 뜻 그대로 꽃을 심어 만든 계단을 말하는데 궁궐 뿐만 아니라 사대부 집이나 정자, 누대 등이 서 있는 주변에 구릉이 있는 곳이면 화계를 꾸민다. 우리나라는 전국토 2/3가 산지이기 때문에 곳곳에 산과 구릉이 많아서 이런 화계를 (부용정에 새겨진 물고기)두는 것이 일반적인 정원의 모습이다.  그리고 화계는 특히 뒤뜰 뒷동산을 중심으로 두기 때문에 예부터 뒷동산을 잘 가꾸어 왔고 이를  가꾸는 사람을 "동산바치"라 불렀다.
동산바치는 오늘날의 정원사이다.

 
부용정 화계위에는 석함이 있고 석함에는 괴석이 담겨져 있는데 일종의 정원을 꾸미는 석물이다. 괴이하게 생긴 그러나 운치 있는 괴석을 담아 두는 석물이라 하여 석함이라 부르며 때로 괴석을 받쳐주는 대라는 뜻으로 괴석대라고 도 한다. 석함은 일반적으로 정방형이나 장방형이지만 때로 육각형, 팔각형이기도 하다. 그 높이도 다양하여 바닥에 닿는 낮은 것에서부터 높은 대를 세우고 그 위에 다시 괴석을 담은 석함을 올려놓기도 한다. 또 부용정 기둥에는 기둥마다 주련들이 걸려 있는데, 여기에는 한시들이 초서체로 새겨져 있어 이들 시구를 감상하노라면 저절로 시흥에 젖고, 더더욱 부용정의 공간정서에 몰입하게 된다.

시는 다음과 같다
 
천 떨기 고운 자태 아름다운 놀 흐르고
십리에 퍼진 맑은 향기 사향을 터트린 듯
낭원의 신선들 푸른 일산 펄친듯
대라천 일천 부처 향성에 싸여 있듯.
붉은색 푸른색 어리 비쳐 맑은 물에 드리웠고
꽃도 잎도 향기로워 발속에 스며드네
활짝 핀 꽃봉오리 삼천궁녀 취한 볼이요
연잎의 빗방울은 오백 나한 염주알이라.
거북이 놀고 고기 헤엄치는 맑디 맑은 가을 물속이요
이슬 짙고 바람 좋은 서늘한 초가을일레.


부용정 북쪽으로는 넓다란 장방형 연못이 있다.
이 방지의 크기는 세로 34,5m 가로 29.4m나 되는데 가장자리는 장대석들을 바른층 쌓기로 하여 마감하였다. 또 못 가운데에는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한 둥근 섬이 하나 있다. 연못이 네모나고 섬이 둥근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하는 천원지방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연못은 대개 네모나고 또 가운데에는 둥근 섬이 하나씩 있다.
이런 모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이루어져 왔다.

 
[삼국사기]의 백제 무왕때 기록을 보면 "궁궐남쪽에 못을 파고,20여리 밖으로부터 물을 끌어드리고 네 가장 자리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 방장 선산을 모방하여 섬을 만들었다"고 쓰여져 있다 여기서 네 가장자리라는 것을 바로 못이 네모난 방지임을 말해 주고 방장 선산은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들이 산다는 방장, 봉래, 영주의 세 선산 가운데 하나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 도교사상이 일찍부터 정원 조영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게 해준다.
곧 부용지의 조영에는 음양론, 도가사상 등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오래된 조형 원리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부용지의 물은 지하에서 솟아오르고 또 서쪽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은 연못 서쪽에 있는 용머리의 석루조로 들어오는데 1800년대에 그린 "동궐도"에는 석루조가 없고 가운데의 섬도 지금보다 훨씬 작으며 배가 2척 떠 있다. 연못의 가득찬 물은 동쪽 연못 가장자리에 뚫어 놓은 수구로 간다. 그리고 부용정 쪽은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하였는데 한 돌에 물고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부용정 큰 못 서쪽물가에 서 있는 이 비각은 숙종 때 세운 것이다 본래 세종 6년 영순 군과 조산군으로 하여금 지금의 주합루 근처에서 우물을 찾도록 하였는데 마침 두짝 씩 찾아내어 이것들을 마니, 파려, 유리(琉璃), 옥정이라 이름을 지었다. 뒷날 숙종 16년(1690)에 이를 기념하여 옛 술정각 자리에다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사정기 비각이다.

주합루는 부용정 북쪽 맞은편 부용정 연목의 북쪽 놓은 언덕 위에 이층 다락집으로 우뚝 서 있다. 이 주합루를 처음 세운 것은 정조 원년인 1777년으로 아래층에는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정각이 있고 그 위층은 열람실로서 사방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누대가 있다. 정문인 어수문을 들어서서 여러 단의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노라면 먼저 주합루 팔작 지붕이 그리고 다음으로는 누의 공포 창방 기둥들이 눈앞에 다가 오다가 1층 규장각 제일 중앙 어간을 마주하게 된다. 누의 건축은 장대석 바른층 쌓기를 한 높은 기단위에 다듬은 돌초석을 놓고 밖으로는 방주를 세우고 안쪽으로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윗몸에 익공 2개를 놓아 이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부연을 둔 겹처마로 팔작 기와지붕을 덮었는데, 용마루는 양쪽에 회를 발라 양성을 하였고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얹고 추녀마루에 잡상들을 얹어 한껏 치장을 하였다.
어수문 낮은 터부터 주합루가 자리잡은 위 터까지는 중앙에 놓은 돌계단 좌우로 장대석 바른층 쌓기 한 석단들을 여러층 놓아 마무리 하였다. 이 석단에는 꽃도 심고 나무도 심었고 "동궐도"에서 살펴보면 어수문 좌우의 작은 협문으로 넝쿨을 말아 올리는 시설을 하여 여기에 푸른 식물들이 뒤덮여 있어 마치 푸른 병풍을 둘러놓은 듯하다. 이런 시설물 곧 취병은 "동궐도"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대부분 이곳 어수문 양쪽에서와는 달리 그 길이가 짧고 전각의 안뜰에 설치되었다. 어수문 양쪽으로 둘러친 긴취병은 어수문 위쪽 주합루의 공간과 부용정 ! 용지읍틔 공간을 커다란 2개의 공간으로 갈라 놓는 역할을 한다. 주합루 앞쪽 동쪽석단 위에는 운두가 놓은 장방형 기단석을 놓고 이 위에 상중하 세 부분으로 나눈 한 덩어리의 커다란 직육면체의 돌을 얹어 놓았다. 아래위는 중앙부보다 돌출되고 사면에 아름다운 꽃무늬를 새기고 중앙에 들어<구름모양의 계단: 구름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체이며 왕과 백성을 연결하는 의미를 나타낸다.>간 부분은 안상을 새겨 치장하였다. 석물은 한?? 이런 석물 자체만으로서 정원의 한 장식품이 되는 수석으로 알려졌으나 과학사 분야의 연구로 낮과 밤의 시간을 알게 해주는 시계를 얹어 두던 하나의 받침돌 곧 대석임이 밝혀 졌다. 이것의 올바른 이름은 "일성정시의대"이다. 동궐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후원 곳곳에 해시계가 그려져 있는데 그만큼 당시에 궐밖의 종루와 자격루에만 의존하지 않고 생활하는 가까이에서 시각을 알게 하였던 것을 말해준다.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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