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현약우(大賢若愚)
크게 현명한 자는 어리석은 듯 보인다.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한 동서가 있었는데,
그 장모가 외출하는 것을 보고 그 가마 뒤를 따라가
가마의 동쪽을 부축했다가 서쪽을 들었다 하면서
소리를 높여 교군들을 단속하여
장모가 가마에서 내린 뒤에야 그만두었다.
훗날 문익공이 또한 그 장모의 행차를 따르게 되었는데,
가마가 옆으로 기울어도 내버려 두고
적적하게 한 마디 말도 없었다.
가마에서 내린 뒤에 장모가
아무개만 못하다고 꾸짖었으나,
공은 역시 노하는 빛도 없이 다만
'예, 예' 할 뿐이었다.
또 판서 한형윤(韓亨允)과 대사헌
성세순(成世純)과 동문학우였고,
진사 초시에도 같이 합격하였으며
함께 문과 초시에도 합격하였는데,
같이 산골 절에 들어가서 약속하기를,
"대과를 해야지 진사시 같은 것은 하러 갈 것 없다.
만일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다같이 공격하기로 하자" 하였다.
어느날 공이 말하기를,
"내일이 내 생일이니 부모님들을 뵙고 돌아와야겠다" 하므로,
같이 있는 분들이 허락하고,
또한 "전의 약속을 잊지 말라" 하므로,
공이 그런다 하였다.
그리고는 산에서 내려 왔더니,
부모가 권유하기를, "내일이 바로 회시 날이다.
시험지와 붓과 먹도 이미 준비해 놓았으니,
그냥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공이 약속한 일이 있는 것을 말하여도
또한 꾸짖으므로 공이 마침내 억지로 시험장에
들어 갔다 나와서는 바로 절로 올라갔더니,
같이 있는 분들이 크게 떠들면서 약속대로
달려들어 치기를 요즈음의 이른바
거풍(擧風 사지를 잡고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공이 천천히 일어나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하기를,
"약속은 저버린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기에
아무렇게나 써서 꼴찌를 한 것인데,
어찌 꼴찌하고도 이 괴로움을 당할 줄 알았느냐" 하였다.
그 해에 그분들과 공이 모두 대과에 급제하여
마침내 명신(名臣)들의 으뜸이 되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대현(大賢)은
어리석은 것 같고,
대덕(大德)은 어설픈 것 같다. 고 하였는데,
공이 이와 근사하였던 것이다.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