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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인물

황진이(黃眞伊,1506 ~ 1567)

작성자구정리|작성시간24.11.29|조회수28 목록 댓글 0
황진이(黃眞伊, 1506 ~ 1567)는 조선 중기의 시인, 기녀, 작가, 서예가, 음악가, 무희이다. 
중종·명종 때(16세기 초, 중순경) 활동했던 기생으로,
다른 이름은 진랑(眞娘)이고 기생 이름인 명월(明月)로도 알려져 있다.

중종 때 개성의 황씨 성을 가진 진사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며, 생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시와 그림, 춤 외에도 성리학적 지식과 사서육경에도 해박하여 사대부, 은일사들과도 어울렸다.

성리학적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였으며 시를 잘 지었고, 그림에도 능하였다.

많은 선비들과 이런 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대부분 실전되었고 남은 작품들도
그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도 않아 대부분 인멸되었다.




👙황진이 팬티 누가 찢었나?

조선의 중종시대 황해도 개성땅에
​미모의 기생 황진이가 있었다.

​그는 기생이지만 양반과 사대부를 깔고 뭉겠으며
​남자에게 노리개 감이 아니라
​반대로 유명한 남자를 노리개 감으로 만든
​기개 높은 멋진 여인이였다

​기생으로 살면서 ​항상 남자를 가지고 노는​ 시인이며,
기개가 곧은 여인 이였다
그는 아버지 황진사와 종 어머니 천민의 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황진사가 길을 가다,
​빨래하는 여인을 자빠뜨려 건드려 생긴게 황진이다.
황진이는 실록에 기록 된것은 없고 야사로 전해지는 것이다

​어릴적에 천자문을 떼고 열살 때 부터 漢詩를 썼다.
​황진사가 경제적으로 도와 준 것
​옆집 총각이 상사병으로 죽자
​상여가 황진이 집 앞에서 움직이지 않아서
황진이가 소복 차림으로 슬피울고
속치마를 관에 덮어주자
비로서 상여가 떠나갔다
​이후로 황진이는 기생이 된다


세종의 증손자 벽계수가
​황진이를 무시하고 앞 만 보고 가는데,

​황진이가 시기하여 詩 한수를 읆는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즉 ,청산에 흐르는 물은 
자연스럽게 흐르는데
​한번 바다에 닿으면 다시는 못 온다.

​명월은 황진이를 말함.
​'나와 함께 놀다 가면 어떠하리!' 라는 詩를 노래한다

​이에 벽계수가 황진이를 쳐다 보다가
말에서 떨어 졌다고 한다

​이에 황진이는 별 볼일 없는 남자라
생각하고 돌아섰다고 함

​삼십년간 道를 닦은 지족선사를 찾아가
​유혹하여 파계승을 만들고,
​천하의 학자 서경덕을 유혹 하였으나
실패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고,

​그래서 개경의 삼절은
​황진이, 서경덕, 박연폭포라 한다


그는
기생 이였기에 유명한 사내들이 꼬였다
허나 그의 기개를 ​어떤 사대부도 꺽지 못했다.
황진이가 가지고 놀았을 뿐이다.

아랫 도리와 
모든 것을 주고, 안주는건

황진이 마음 이였다.
사대부 집안 선전관 이었던 이사종과 ​6년간 계약 결혼을 한다

​황진이 집에서 삼년을 살고,
삼년은 심산유곡을 찾아 멋진 유람생활을 한다.
그리고 깨끗이 헤어 지면서 詩 한수를 남긴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둘로 내어
    춘풍 이불속에 서리 서리 넣었다가
    그리운 님
    오시는 날 밤에 굽이 굽이 펴리라!🍒

​그후사대부 앙반만을 갖고 놀다가
말년에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이
내가 황진이를 딱 한 달만 데리고 놀다 헤어 진다며,
​그러지 못하면 내 인간이 아니다 라고 친구들에게 맹세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소세양은 황진이 ​한 달간 동거한 후 헤어 지는데,

​황진이가 詩 한수를 읆는다

🍒 달빛아래 오동잎 모두지고

​찬서리 들국화는 노랗게 피여 있구나!
다락은 높고높아 하늘 만큼 닿았는데,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흐르는 물 소리는 차기가 비파소리
피리에 감겨드는 그윽한 매화 향기
​내일 아침 눈물지며 이별하고 나면
님 그린 연모의 정 물거품이 되네!🍒


이 詩를 들은 소세양은 
며칠을 더 머무르는데

친구들은 소세양을 사람이 아니라고 놀려댔다고 함


이후 황진이는
사십대 초반에 짧은 인생을 마감한다

​유언에 깊은 산중에 묻으면 외로우니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가에 묻어 달라 한다,
그래서 길가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

​훗날
한양의 한량 임백호가
평양감사가 되어 부임하던 길에 황진이 묘를 지나다,
묘에 술잔을 재배하며 황진이를 그리며 詩 한수를 읆는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난다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은 어디두고
(너의 미모는 어델가고) 백골만 묻혔느냐
잔 잡아 권할이 없으니
(너와 한잔 술을 못하니)
이를 설워 (슬퍼) 하노라!

​이 詩를 문제삼아 임백호는 파직 당한다

​훗날 암행어사 이덕형이 '송도기 '라는 책에
''황진이는 아리따운 외모를 지닌 선녀였고
천재 시인이였고 절창 이였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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