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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관련

거짓족보(김삿갓)이야기

작성자구정리|작성시간24.08.25|조회수10 목록 댓글 0

1.강원도 정선의 한 산골이다.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물었다.
김삿갓은 어디 잠자리를 찾던 중, 서당이 눈에 띄었다.
들어가니 10여 명의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있었고 늙은 훈장이 아랫목에 앉아 위엄을 떨고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오?" "금강산 구경 가는 길입니다."

"글은 좀 읽었소?"

"네, 사서삼경 정도 읽었습니다."

"네? 사서삼경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이 하나가 선생님 이게 무슨 글입니까 하고 묻는다.
훈장은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하다가 말했다.
"내가 돋보기가 없어서 글자가 보이지 않는구나. 내일 가르쳐 줄게."

김삿갓이 보니 별로 어려운 글자도 아니었다.
훈장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날 저녁은 거기서 하루 신세지기로 하고 자리에 누웠는데 아까 글 읽던 아이 하나가 찾아 왔다.
"무얼 좀 물어보러 왔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보니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글자풀이를 좀 해주십사 하고요."

"너의 선생님한테 물어 보면 될게 아니냐."

"우리 선생님은 글이 짧으셔서 물어봐도 모릅니다.
아까 선생님하고 하는 이야기 다 들었습니다."
"난들 아느냐. 보기나 하자." 
하고 보니 하얀 한지에 '籍'자 한자만 적혀있다.

"아무리 보아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소년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 쉰다.
"이 편지에 제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운명이? 그게 무슨 소리냐?"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소년은 산 너머 마을에 현 진사 댁 고명딸인 보옥이라는 처녀를 혼자 사모해 왔는데 얼굴도 아름답거니와 학식도 대단하였다.
몇 달 전부터 그 집 계집종을 매수하여 그 처녀에게 구애의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닷새에 한 번씩 열 번이나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이'籍'자 한자뿐이라 한다.

그 말을 들은 김삿갓은 ‘籍’자를 한참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빙그레 웃는다.
"이 부근에 혹시 대나무 밭이 있느냐?"
"네, 있습니다.

현 진사 댁 뒷동산에 무성한 대나무 밭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무 하룻날 대나무 밭에서 만나자는 말이다."

"어떻게 아세요?"

"籍자를 파자하면 竹 來 十十 一 日 이 된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스무 하룻날 대나무 밭으로 오라>는 뜻임이 분명하다."

그 다음날 아침에 김삿갓이 자고 있는데 소년의 아버지인 조 풍헌이라는 영감이 찾아 왔다.
"선생께서 우리 집 아이가 현 진사 댁 규수를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으니 세상에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풍헌 영감은 현 진사 댁 규수를 며느리로 맞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양반과 상사람의 한계를 극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의 집에 간단한 조반상을 준비했으니 가십시다."
김삿갓은 풍헌 영감과 같이 집에 가보니 산해진미가 가득하였다.
"아무것도 차린 것이 없습니다만 많이 잡수십시요."

"차린 것도 없으면서 무엇을 먹으라는 말씀입니까.
차린 것도 없다고 하셨으니 내게는 술이나 한 잔 주면 고맙겠습니다."

풍헌 영감은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하인들을 꾸짖는다.
"여봐라, 술은 안 내오고 무엇하고 있느냐?"

며칠 후.

"선생님 덕분에 현 낭자를 기쁘게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뜻대로 되었느냐?"
"네, 자기는 글자 한자만 써 주었는데 글자풀이를 누가 해 주었느냐고 물어봐서 
내가 3일 동안 끙끙 앓으면서 사연을 알아냈다 하니 낭자는 기뻐했습니다."

"그래, 본인한테 직접 구혼이라도 해 보았느냐?"

"그 비슷한 말을 해 보았습니다만 양가 부모님의 승낙을 받기 전에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올해가 현 진사의 환갑이어서 준비도 있고 하니 앞으로는 만날 수가 없고 부모님을 통해서 청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풍헌 영감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기 아깝고 안타까워서 몸이 바짝 달았다.
대책 없이 김삿갓만 붙잡고 늘어진다.
"삿갓선생, 기왕에 도와주시는 길에 끝까지 도와주십시오." 
하며 옷소매를 힘차게 잡아당긴다.

김삿갓은 조용히 생각하며 작전을 짠다.


2. 현 진사는 명문가의 후예지만 몰락한 양반이다.
제 아무리 조상이 훌륭해도 돈이 없으면 행세를 못하는 세상이다.

풍헌 영감은 양반은 못되어도 돈은 많지 않은가.
"저쪽이 우참찬의 후예라고 했으니 이쪽은 영의정의 후예라고 합시다."
"삿갓선생은 누구를 감옥으로 보내려고 그런 엄청난 거짓말을 하십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내일 송아지 한 마리 몰고 갑시다."
현 진사 댁 대문 앞에 가서 "이리 오너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시골에는 없는 풍습이었다.
서울 양반의 위엄을 보여 줌으로서 현 진사의 기를 꺾어 놓으려고 일부러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
"저는 서울서 내려온 안동 김씨 김삿갓입니다. 
저의 집안과는 한 집안이어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안동 김씨라면 서울에서도 명문대가인데 생면부지의 나그네가 한 집안이라니.......

현 진사는 의아했다.

"저의 5대조 고모님이 현씨 가문에 출가를 하셨습니다. 
서울서는 두 가문이 한 집안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서울 이야기만 나오면 심리적으로 기가 죽어버린다.
"진사 어른, 이분은 산 너머 마을에 사는 조 풍헌 영감님인데 제게는 외숙뻘 됩니다."
안동 김씨라는 양반이 상사람인 조 풍헌을 외숙이라고 부르는 데는 현 진사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세조 대왕 때 영의정 벼슬을 지낸 조영무 대감의 후손입니다."

현 진사는 그 말에 또 한번 놀랐다.
"풍헌 영감님의 5대조께서 이곳 정선으로 낙향하여 사셨는데
집이 몹시 가난하여 쌀 천 석에 양반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때부터 풍헌 영감님 댁은 평민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사 어른의 회갑 날이 멀지 않다는 소문을 듣고 
잔치에 쓰시도록 송아지를 한 마리 몰고 왔습니다."

현 진사는 너무도 놀랐다. 기쁨에 넘친 놀라움이었다.
"풍헌 영감님이 그토록 훌륭하신 분임을 모르고 우리가 오늘날까지 너무 소원하게 지냈습니다."
이제는 현 진사의 말투가 매우 정중해졌다. 
이윽고 술자리의 취흥이 도도해 오자 풍헌 영감을 눈짓으로 자리를 뜨게 한다.

"풍헌 영감님은 돈도 많고 아드님도 명민하여 매우 다복한 분입니다. 
그런데 남모르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슨 걱정인가요?"

현 진사는 자기도 모르게 김삿갓이 던진 낚싯밥에 걸려들었다.
"진작부터 장가를 보내려고 하지만 마땅한 혼처가 나타나지 않아 무척 고민 중인 모양입니다."

현 진사는 그런 말을 듣자 자기 딸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내 집에도 시집보내야 할 딸이 있는데 시골에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짐짓 놀라 보였다.
"옛? 댁에도 혼기의 규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중신 애비로 나서 보면 어떻겠습니까?"

현 진사는 그렇잖아도 딸의 혼사 문제로 은근히 골머리를 앓아오던 터에 
신랑만 똑똑하다면 굳이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석양 무렵에 풍헌 영감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김삿갓의 수완에 탄복해마지 않는다.

"내가 영의정의 후손이라니. 세상에 이런 고마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로부터 닷새 후에 김삿갓이 혼자 집을 나서자 풍헌 영감은 황급히 묻는다.

"선생은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오늘은 현 진사를 찾아가서 매듭을 짓고 오겠습니다."
김삿갓은 굶기를 밥 먹 듯하다가 연일 술과 고기만 먹어온 덕분인지 산길을 걷자니 다리가 뿌듯하다.
"풍헌 영감님은 생각이 많으신 모양이지만 제가 가까스로 설득하여 확답을 받아 놓았습니다. 
이제 현 진사 어른의 승낙만 있을 뿐입니다."

"글쎄올시다.

가문도 분명치 않고.......
우리 집 딸아이는 <사서삼경>까지 통독했는데 
풍헌 영감님 자제는 이제 겨우 <사략>을 읽은 정도던데요."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간 김삿갓은 여기서 승부수를 던진다.
"댁의 따님과 풍헌 영감님의 아드님은 오래 전부터 밀회를 해오고 있는 사이랍니다. 
만약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아무도 며느리로 데려갈 사람 없습니다.

진사 어른께서 반대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나는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하고 일어서려는데

현 진사는 크게 당황한 빛을 보이며 김삿갓의 소매를 창황히 붙잡는다.

"잠깐만......."

딸아이를 불러 물어보니 사실이란다. 
김삿갓의 폭탄선언이 현 진사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실상인즉 현 진사도 이 혼사에 대해 노상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조 풍헌이 정선 고을에서는 소문난 부자라는 것이다.

"삿갓 선생, 본인들끼리 그렇게 되었다면 천생연분입니다. 
삿갓 선생이 원만하게 결합될 수 있도록 노력을 좀 해 주십시오."

이날 저물녘에 김삿갓은 개선장군과 같은 기분으로 돌아오니 풍헌 영감은 
눈알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다가 다급하게 물어본다.

"삿갓선생,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이제 사주단자만 보내면 됩니다."

"삿갓선생, 우리 가문에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생의 은공을 일생을 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그 말씀은 그만하고 술이나 한잔 주시죠." 
김삿갓은 술이나 한 잔 얻어먹으면 그만이었다.

보수를 바라고 중신 애비로 나선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혼례식이 끝날 때까지 아무데도 가시지 마시고 우리 집 대사를 끝까지 돌봐 주셔야겠습니다."
이날 밤 김삿갓은 풍헌 영감과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시고 새벽에 옷을 추려 입기 무섭게 
죽장망혜로 정처 없는 행운유수의 방랑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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