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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의 용정-<3.13운동>

작성자단군신화|작성시간14.06.16|조회수47 목록 댓글 0

중국에서 발생한 보다 큰 사건은 서울에서 야기된 3·1운동의 여파로 발생한 3·13사건이
다.

이에 앞서 일본은 1907년 8월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는 용정에 한국통감부 간도 임시파출소
를 설립하고 조선인을 감시하기 위한 행정수단으로 이른바 '도사장제'를 수립하자, 항일인
사들은 '간민자치회'를 조직해 반일의사를 표시했다. 1909년 일본은 중국과 간도협약을 맺
고 만주진출과 조선인탄압을 노골화해갔다. 이에 러시아 연해주와 만주 일대의 유지인사 3
9명이 모임을 갖고 1918년 11월에 "무오독립선언"을 제정, 항일운동을 일층 강화했다.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고 3월 7일 "대한독립선언문"이 간도지구
독립운동가에 전달되자, 간도 일대의 학생들이 동요하고 유명무실하던 간도간민회 등이 활
기를 띠게 되어 국민회정의단, 한족회, 사우계 등이 합세해 장날인 3월 13일 용정의 명동
학교 교정에서 군중집회를 갖기로 했다. 그 날 연길, 대랍자, 두도구 등 먼 곳에서 새벽부
터 대열을 지어 용정에 있는 명동학교 교정에 3만여 명이 모여들었다. 12시, 회장 부근의
교회에서 종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대회장에서는 애국가 봉창이 있었고 이어 대회장 대표
김명학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으며, 이어 여성대표들이 연단에 올라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호소했다. 한편 학생들이 손에 쥐고 있던 선전삐라를 배포
하고 학생들의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이어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운 시위대가 명동학교를 나와 가두
시위로 돌입했다. 시위대가 일제가 경영하는 간도보통학교 앞을 지나자 200여 명의 이곳
학생까지 시위에 참가해 시위대는 점점 증가했다. 시위대가 시가를 돌고 일본영사관으로
가는 길로 진입하자, 무장군경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시위대는 13명의 사망자와 24명의
부상자를 내고 해산하고 말았다.

3월 17일 용정에서 수난열사들을 위한 추모식을 가졌다. 1만여 명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추모식장에 모여 장례식에 참가했고, 3,000여 명이 영구를 멘 사람들을 따라 묘지로
향했다. 열사들의 묘지는 삼합촌에서 용정에 이르는 합성리에 정해 지나는 사람들이 우러
러보게 했다. 이날의 추모제와 장례는 아무 사고없이 무사히 끝났다.

3·13운동의 여파는 그 후 넓은 지역으로 확산돼 갔다. 연길현에서는 용정, 수산리, 화전
자 등 10여 개 진과 향촌에서 수십 차례의 시위가 있었고, 화룡현에서는 두도구, 3도구, 7
도구, 토산진, 항산리, 평강 등지에서 시위가 있었으며, 왕청현에서는 백초구, 수분대전자
, 석평, 소동구 등 9개 향촌에서 시위가 있었고, 훈춘현에서는 상진과 향촌 등지에서 47차
의 크고 작은 시위가 있었으며, 안도현, 흥경현, 동녕현 등지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3·1운동의 여파로 중국에서 이루어진 가장 큰 성과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1919년 4월 13일 전국 13도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임시
정부를 선포했다. 의정원은 9월 6일 대통령중심제의 헌법을 제정해 초대 대통령에 미국에
서 활약하는 이승만을, 국무총리에는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이동휘를 추대했다. 그후 1927
년 임시정부는 국무위원제로 개편하고 김구를 주석으로 추대한다. 상해임시정부는 서간도
에 서로군정서를 두고 북간도에 북로군정서를 두어 항일전쟁을 실시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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