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한국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많은 우국지사들이 만주로
이주해 갔다. 이들은 무엇보다 민족교육을 통한 애국정신 함양이 급선무라 생각해 만주 일
대에 많은 학교를 건립했다. 제일 먼저 세워진 학교가 이상설, 이동녕, 여준 등이 용정에
건립한 서전의숙(瑞甸義塾)이다. 이 학교는 신학문을 통해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함양해 후
일 독립운동을 도모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이다. 당시 이 학교에는 초등과 중등을 합해 70
명의 학생이 있었다. 학교를 설립한 다음에 이상설은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헤이그 만국평
화회의에 파견됐다. 이로 인해 일본은 서전의숙을 폐쇄시킨다.
서전의숙이 폐교당한 후 오히려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조선족을 위한 학교가 건립된다. 1
908년 와룡동에 창동학교가 세워지고, 소영자에 광성학교, 명동촌에 명동학교, 화룡현 광
대사에 정동학교, 연길에 연길여학교, 연길현 구수하에 봉명학교가 건립된다. 한편 한족으
로 귀화한 이동춘은 중국어학교인 양정서숙을 세우고,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이동휘는
용정, 연길, 화룡 등에 초등학교와 중학 등을 세운다. 종교를 배경으로 하는 학교도 건립
되었으니, 기독교계의 은진서숙과 해동서숙, 대종교 계통의 대성학교, 천도교 계통의 청일
학교, 불교 계통의 동흥학교 등이 세워진다.
간도에 이어 압록강 대안인 서간도에도 1914년에서 1919년 사이에 많은 학교가 건립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흥경현과 삼원보 등에 세워진 신성학교, 삼광학교, 삼성학교, 사양학교,
삼성여학교 등이다. 이들 학교에서 특이한 것은 이상용, 이시영, 이회영, 이동녕 등이 유
하현에 세운 경학사(耕學社)이다. 이것은 교육과 산업, 그리고 무력을 동시에 함양하려는
목적에서 건립한 회사의 일종이며, 경학사 부설로 건립한 것이 신흥강습소이다. 신흥강습
소가 1919년 신흥무관학교가 된다. 당시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은 이천민, 교감은 윤기섭이
었는데, 교관인 이청천, 이범석, 성준용, 원병상, 이장섭, 김성로, 계용보 등이 후일 항일
운동에 공헌을 하게 된다. 간도에서 교육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 이곳에서 활약
하는 교육자들이 간민교육회를 결성한다.
이 시기 신흥무관학교와 유사한 무관학교가 왕청현 나자구에 건립되고, 한편 이동휘는 밀
산에 무관학교를 건립해 1,500여 명의 젊은이를 훈련시켰다. 이들 학교를 종합하면 1910년
대 간도 일대에 설립된 학교가 72개교였으며, 이것이 1926년에는 191개교로 증가했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합방당하자 많은 우국지사들이 중국의 간도와 러시아의 연해주로 대
거 이주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의 민족운동은 교육운동에서 독립군운동으로의 성격전환
을 가져온다. 독립군 활동의 단위가 되는 독립군 부대는 대부분 1911년에서 1914년 사이에
조직된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면 1911년 서일이 왕청현에 중광단을 조직한 것을 필두로,
1912년 이동휘가 화룡현 명동에서 간도국민회를 조직하고, 1913년 국자가에 간민회가 설
립되며, 1914년 연변, 국자가, 용정에 청년친목회와 대동협신회 등이 조직된다. 이외에도
이범윤이 조직한 대한광복단, 방우룡의 의민단, 안도현의 대한정의군정서, 훈춘지방의 신
대한청년회, 연길시 팔도구의 대한청년단, 훈춘지방 공교회원들이 조직한 복황당 등이 있
었다.
1910년 한일합방 당시 독립운동의 중심지는 러시아의 연해주에 있는 신한촌(新韓村)이었다
. 중국에서는 손문의 신해혁명에 자극받아 전에 조직되었던 독립군 단체들이 통합해 새로
운 독립군 군단을 조직한다. 특히 3·1운동을 맞이해 간도의 독립운동은 활발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