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중국에서 특이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료녕성 개주시 진둥향 박가촌(朴家村)
의 주민 277명, 료녕성 본계현 산성자향 박보촌의 구재곡, 회피 등의 주민 1,234명, 하북
성 청룡현의 팔도자향 탑구촌과 대장향 맹가움집촌의 박씨 성을 가진 350여 명이 자기들의
선조가 350년 전 한국에서 이주해 온 한국인이고, 자기들은 한국인의 후예이기에 조선 적
으로 옮겨달라는 청원을 한 것이다. 원래 중국에는 박씨 성이 없기에 이들 박씨 성을 가진
청원 자들은 1958년 조선 적을 회복했었다. 이에 봉성현 일대에 거주하는 문씨, 김씨, 백
씨들도 한국인을 증명하는 족보를 갖고 있어, 이들 또한 조선 적 회복을 신청했다.
조선 적을 회복한 사람들은 명말청초에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로 당시 이들 수백 명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이주했다. 기록에 의하면 청초만이 아니라 명나라 초기, 원
나라시대, 당나라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했다. 이에 학자들간에
중국조선족 천입사(遷入史)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의 하나가 토착민족설이다. 말하자면 현
재 만주지역은 옛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기에 이곳 주민들은 처음부터 조선이었다는 설이
다. 이에 대해 고영일은 요동반도에 거주하는 1만여 명이 고려인이었다는 것을 기반으로
원말명초설을 주장한다. 한편 박씨촌의 현지조사를 근거로 박창욱은 명말청초설을 주장한
다. 이들은 모두 장구한 세월 중국인으로 동화되어 족보와 같은 문헌 외에는 근거가 없어
이들에 관한 이민사는 별도로 취급해야 할 문제이며, 이곳에서는 현재 조선족이라는 정체
성을 갖는 사람, 따라서 1860년대 이후에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족을 문제시하겠다.
현재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북3성 특히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지역은 양 강으로부터
이북 1천 리를 청나라 태조의 발상지라 하여 강희 7년인 1668년 사람들의 입주를 금하는
봉금령이 내려져 있었다. 따라서 이 곳에 조선족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봉금령이 해제되
는 1875년이지만, 1860년 이후 한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대안에 아침에 들어가 일하고 저
녁에 귀가하는 조경귀가 또는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가서 추수해 오는 춘경추수의 형식
으로 출입을 했다.
조선족이 본격적으로 월경하기 시작한 것은 1869년의 기사년 재해 이후의 일이다. 3년간
계속된 흉년에 평안북도에서 압록강을 월경한 사람이 약 6만 명이고, 함경북도에서 두만강
을 월경한 사람이 약 2만 6,000명이 되었다.
조선족 이주가 급증하자 한족과의 마찰을 우려한 회령부사 홍남주는 두만강 대안지역이 한
국과 중국 사이의 공지라는 의미에서 간도(間島)라 했고, 월강한 조선족들이 농사를 짓는
땅을 간도라 하더니, 이것이 지명이 되었다. 간도란 말하자면 백두산 동북지방으로 원(原)
간도라고도 하며, 백두산의 서북지방을 서간도라 하는데 이것과 구별하기 위해 간도를 북
간도라고도 한다. 한편 압록강 대안에 이주한 조선족을 보호하기 위해 강계군수가 서간도
일대를 28개 면으로 나누고 평안북도의 행정구역을 연장해 7개 면은 강계군에, 9개 면은
자성군에, 8개 면은 초산군에, 4개 면은 후창군에 편입시키고, 이곳에 서변계관리사를 파
견했다.
청나라는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1883년 길림조선상민무역지방규약을 체결하고 화룡욕
, 광제욕, 서보강 등지에 통상국 검사소를 건립해 교역을 장려했다. 한편 청나라는 1885년
두만강 이북의 길이 350km 넓이 25km의 지역을 조선족 개간구역으로 정하고, 통상국 검사
소를 월간국으로 개칭해 조선족 개척민의 사무를 겸하게 했다. 이로써 많은 조선족이 간도
로 이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