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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의 도문-<봉오동 전투>

작성자단군신화|작성시간14.06.16|조회수8 목록 댓글 0



조선독립군의 항일운동이 치열해지자 일본은 1920년 1월 1일을 기해 여단규모의 병력을 두
만강 대안인 북간도로 파견하니 이것을 '간도출병'이라 한다. 1920년 1월에서 6월까지 6개
월간 우리 독립군과 일본군이 충돌한 것만도 32건이 된다. 당시 활발히 저항한 독립군이 7
개였으며 특히 서일 장군이 이끄는 부대, 안무 부대, 최명록 부대, 홍범도 부대가 유명했
다. 그리고 유명한 전투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였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 장군이 연합군을 편성해 일본군을 무찌른 대전투였다. 홍범도 장군의
부대가 최명록 장군의 부대와 함께 군무도독부를 형성했고, 이곳에 신민단, 군정서, 광복
단, 의군단, 국민회 등 6개 단체가 합세했고, 안무가 이끄는 간도국민회군이 합세해 봉오
동에 집결했다.

1920년 6월 4일 삼툰자에 기지를 둔 아군이 두만강을 건너 조선 종성군 강양동 국경초소를
습격해 일본군 1개 소대를 격파하고 돌아왔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 1개 중대가 강
을 건너 삼툰자로 진격했다. 이곳에 매복하고 있던 항일부대는 일본군을 유인해 기습으로
일본군을 무찌르니 일본군은 수십 구의 시체를 내버려둔 채 삼툰자 남쪽으로 퇴각했다. 이
것을 '삼툰자전투'라 한다.

급보를 접한 일본군은 1개 대대 병력을 증원해 조선독립군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 6월 7일 조선에 가서 의연물품을 구해 오는 신민단 소속 전사 13명을 후안산 5호 동네에
서 목격한 일본군은 이들을 추격해 후안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일본군 1명, 아군 1
명, 민간인 여성 1명이 사망했는데, 이것을 '후안산전투'라고 한다.

도문시 서북쪽으로 15km 떨어진 북 봉오동 동북향으로 약 20리 되는 갈지자 모양의 계곡에
10여 개의 크고 작은 조선족 마을이 있으니 이곳이 봉오동 계곡이다. 홍범도 장군의 작전
지휘를 받는 400여 명의 아군이 사방으로 매복하고 있는 골짜기로 300여 명의 일본군을 유
인해 맹공격을 가했다. 유리한 지형에서 아군은 일본군을 4면에서 포위하고 치열한 격전을
3-4시간 벌였는데 일본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것을 '봉오동전투'라고 한다.

아침에 쾌청하던 날씨가 봉오동전투가 끝날 무렵인 저녁이 되면서 구름이 몰려와 장대 같
은 소나기를 퍼부었다. 이 틈을 타 홍범도 장군은 전군을 철수시켰다. 그날 밤 봉오동에서
철수하던 일본군이 비파골에 이르러 자기들을 후원하러 오는 일본군을 조선군으로 착각하
고 서로 사격을 가해 크게 손실을 보았으니 이것을 '비파골전투'라고 한다.

삼툰자, 후안산, 봉오동, 비파골 등의 전투를 통칭 봉오동전투라고 한다. 이 전투에서 일
본군은 150여 명이 전사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으며 항일연합군은 8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
상당했으니 아군이 승리한 첫 대첩이라 하겠다.

봉오동 전투의 보복으로 일분군 19사단 병력과 경찰 등 도합 2만여 명의 일본군이 동원되
어 10월 9일부터 30일까지 훈춘, 왕청, 용정, 도문 등 4개 지역의 조선족 마을을 습격해
방화하고 살인을 일삼았으니, 이 토벌에 희생된 조선족이 3,469명에 달하고, 2,500여 채의
가옥이 소실되었으며, 4,500여 석의 식량이 소각되어 총 피해액수는 10,878,600원에 달했
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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