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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 한밤에쓰는 수상록) 참회록.

작성자호뱐청솔|작성시간24.06.21|조회수146 목록 댓글 0


사람들이 한평생 살다 떠나는것을 바라보면 참으로 다양하고 천차만별이다.
이제 나이를 먹고 내 살아온 발자취를 생각하니 부끄럽고 고개를 들지못할 정도로 내 자신이 옹졸한 인간이라고 느낀다
왜 좀더 너그럽게 포용력을 베플지 못했을까?
왜 그 마음을 몰라주었나?
역지사지라고 했던가?

나에게는 나보다 2살 아래인 처제가있다.
거의 한평생 그러니까 40여년을 시집도 안가고 아니 못가고 우리집에서 더불이 삶을 살아온 처제다.
가엾고 불쌍한 처제다.
처제라고 그렇게 살고 싶었겠는가?
좀더 처가집에서 적극적으로 혼사를 시키려 마음먹었다던가 아니면 본인이 적극적으로 이성교제던 아니면 결혼에 적극적으로 발벗고 나섰다라면 이렇게 언니집에서 눈치보며 삶을 살지는 않았을것이다.
차라리 절에가서 스님으로 살았다던가 아니면 천주교의 수녀생활을 했다던가 참으로 아쉬움이 많았던 삶을 살아왔다.
거기에는 장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신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될듯 싶다.
장모님이나 장인어른이 적극적으로 나서지않으니까 전부들 손을 놓고있었다.

타고난 바탕이 어질고 착하다보니 뭣하나 딱뿌러지게 행동도 못하고 그저 느그적 느그적거리다 한평생 허비한 생을 마치게됐다.
이제와서 시집을갈것도 아니고.
결혼 이야기가 마지막 오간것은 15년전 내가 당시63세던가? 상처당한 독거남을 소개한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도 처음에는 거절하며 어디 사람이냐고 묻길레 안동이 고향이라고 했더니 "안동사람은 여자만 밝인다고"거절하더니 일년이지나 지금도 결혼안했냐고 묻길레 지금은 연락이안된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주위의 여러사람이 다 책임이있다,
우선은 본인이 그리 모질지못하니까 오빠나 언니나 동생들이 발벗고 나서질않았다.
모두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왜 시집을 못보냈겠나?
전부들 남의일처럼 생각하니 이런 결과가됐다.
거기에다 언니라고하는 집사람은 밥하나못하고 살림하는데는 지금이나 그 때나 여자로서는 0점이니까 보다못해 하루,이틀 묵은것이 일년이돼고 십년이돼고 오늘날까지 이어져온것이다.
마누라라는것은 그저 책이나보라면 굶으면서도 식구야 굶던말던 관심도없고 살림은 재주가 메주다.

요즘도 밤1시반까지 한자 국가고시 3급을 공부한다며 낯에는 도서관에서 이책,저책빌려오며 공부하다 몸이 아프면 서울대병원을 제집드나들듯 몇십년을 그렇게 보냈다.
병원과 약을 밥먹듯 하면서 살아온 삶이다..
그러니 고통스러운것은 나나 처제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요즘같은 한여름에는 명색이 형부인데 훌라당 벗고있을수도없고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라 집사람한데 뭐라고 화를냈더니 6,7년전에 변두리 어디에 방한칸을 마련해주었고 그후로는 몇달에 한번씩와서 마눌이나 내가 먹을 반찬을 해주고 그렇게 왔다갔다한다,
그러니 그런 인생이 어디 행복한 인생이었겠나?
젊었을때 그러니까 내 나이 32세 전후던가 마눌이 된장을 담으라고 돈을주고 학교에 출근했는데 콩을사와서 물에 담가놓고 세월아,네월라 한없이 느그적 느그적거리다 다 썩어서 버린적이있었다.
나는 그때 뭐라고 심하게 마눌을 나무랬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그때가 한없이 후회스럽고 미안하더라..
자기살림도 아니고 언니네 살림인데 무슨 재미나 흥이나겠는가?
언니네 살림을 생각하며 본인 앞날을 생각하면 무슨낙이나 재미가 있었겠나? 왜 그때 나는 처제의 마음을 헤아리지못하고 처제의 아픔도 모르고 야단치며 내 입장만 생각했나?
너무도 가엾고 딱하고 가슴아프다.

이모든것이 세월이 흐르고보니 모든것이 아프고 후회스럽다,
좀더 이해하고 너그럽게 봐주고 모른척하고 지나갔더라면 지금처럼 후회스러웁지는 않았을것이다,
내 나이먹은것이 부끄럽다.
참회하고 마음저미며 아프더라 ,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모든것이 아픔으로 다가온다.
이 세상에 이런 인생이 또 있을까?
밥하나못하고 국하나 끓이지못하는 지질이도 못난 언니때문에도 하루이틀 돌보다보니 거기서 헤어나지못하고 세월만 보낸것이다..
처제의 삶에는  조금은 우리집 모두의 책임이있는것이다
이것은 나에 책임이있다.
마음만 편하게해달라며 눌러 지낸것도 본인과 언니나 내 책임이다.
지금돌이켜보면 가엾고 불쌍한 마음뿐이다
만약 처제가 먼저 세상을뜬다면 나는 한없이 울며 가엾은 처제의 넋을 위로하며 처제의 인생을 생각하고 기도할것이다.
이러한 내마음을 마눌에게 이야기했더니 묵묵무답으로 듣기만한다.
이따금 용돈으로 몇푼주는것 이외는 내 할수있는것이 없어서 바라만보고 지냈다
지금 생각하면 오빠나 언니가 좀더 적극적으로 중매를 섰더라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듯싶다.
본인 콧대도 문제였다
50년전 내가 중매선 공무원하고만 결혼했어도 이렇지는 않았을것이라고 아쉬움만 남는다.

※ 댓글은 사양하며 이글을 내 홈페이지인줄 착각하고 먼저 몇줄 낙서하다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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