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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공짜로 이발을 하다.

작성자곡즉전|작성시간24.09.27|조회수291 목록 댓글 21

추석 전에 이발을 하러 갔습니다. 명절 땐 조상님도 뵈어야 하고 형제간도 만나야하고 자식들도 오는즉 후즐그레한 모습보다는 단정한 모습이 바람직합니다.

정작 이발소에 들렸더니 요즘 명절 이발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군요. 재삼 제가 구닥다리임을 실감했습니다.

동네 블루클럽은 제가 25년을 한결같이 드나든 내 집같은 업소입니다. 업장이나 손님인 저는 오랜세월 변함이 없지만 주인과 종업원은 수시로 바뀝니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뉴페이스 아줌마가 머릴 어떻게 해드릴까요? 하고 묻더군요.

저는 뭘 보태거나 빼지않고 정확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은 이 요청은 25년을 똑같이 일관되게 해온 것입니다.
" 바리깡 아니 바리칸으로 바짝 밀어올려 짧게 해주세요."
" 예, 알겠습니다."

전 오더를 넣고 잠시 눈을 감았죠. 머리 위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하수상했습니다만 그러려니 했습지요,
갑자기 아주머니가 " 어머! 이를 어째!" 하고 외마디 소릴 질렀습니다.

내가 눈을 뜨고 본즉 긴 윗머리 한 복판을 바리칸이 쭉 밀고 지나가고 난 후 였습니다. 멀쩡한 윗머리를 가차없이 밀어버린 것입니다. 밀밭 한 고랑을 트랙터가 베고 지나간 형국입니다.
만사휴의! 원상복구는 대통령이 와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놀라기전에 아주머니가 먼저 황당해 했습니다.
이발사로서는 도저히 저지를 수없는 치명적인 실수를 해버린겁니다.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떡하죠."
" 아니 이게 웬 날벼락이죠?"
저도 어이가 없었지만 얼른 마음을 다잡고 선선하게 황송해 하는 이발사를 위로했습니다.

" 어떡하긴 어떡합니까? 전부 똑같이 밀어야죠. 아무 걱정마시고 시원하게 빡빡 깎아주세요. "
" 열번 백번 죄송합니다. 제 시아버님께서 이렇게 민머리 이발을 즐겨하셔서 그 생각을 하다 그만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거듭 사죄드립니다. "
" 일 하시다보면 헤프닝이 생기기도 하죠. 걱정마세요. 머린 금방 자랄테니."

난 열번 이발료를 내겠다고 고집을 피웠으나 아주머니가 11번 12번 완강하게 고사하는 바람에 결국 공짜이발을 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발을 하고 돈은 안내고 나온지는 물경 60년도 더 됐습니다. 저는 중학교 다닐 때 까지도 동네 이발소에서 공짜 이발을 했습니다.

저의 선친께서 일제시대 때 일본에서 귀국하시면서 이발 기술을 배워오셔서 동네에 자그만 이발소를 내셨더랬습니다.

그거라도 안 하면 꼼작없이 대를 이어 농사 일을 하셔야 하는데 그건 영 내키지 않으셨던 겁니다. 첨 때는 화이트 칼라들만 이발을 하니까( 저희 고향은 수협, 농협, 우체국, 지서, 학교 등이 있는 상당한 대처였습니다. )견딜만 했는데 점점 사람들이 상투를 자르고 아무나 이발을 하게되니까 이발 직업이 요샛말로 3D로 변해버렸습니다. 손님이 많아 수입은 늘었지만 되나 캐나 다 이발을 하니까 그거에 환멸을 느끼신 나머지 헐값에 제자에게 이발소를 물려줘버린 것입니다.

그 제자가 스승의 자제인 저희 형제들 이발료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죠.
세월이 흘러 3대 제자가 이발소를 인수한 뒤로는 돈을 내야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저의 아버님은 한량이셨습니다. 고흥, 보성, 장흥 일대의 남도 명창들이 아버님을 찾아와 북이나 장구로 장단을 맞춰주길 바랬습니다.
여름철이면 시원한 바닷가에 자리를 펴고 앉아 합죽선을 흔들며 길게 시조를 읊조리곤 하셨습니다.
바둑이나 장기는 인근에 적수가 없었습니다. 마작은 엎어놓고도 훌라짱을 외칠 정도였습니다.
수산물 중매인 등 상업에 잠시 종사하긴 하셨지만 생활능력이 부족하셨던 점이 흠입니다.
선친께서 이발소를 20년만 더 운영하셨으면 저희 식구들 팔자는 물론 제 팔자도 여름철 엿가락처럼 쭉쭉 늘어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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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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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곡즉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9.29 제가 수양이 높은 것이 아니고 사건 모양새가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캄캄한 어둠속에서 아무 것도 안켜고 실내자전거를 30분 들립니다.
    그 운동을 하면서 나름 정신수양을 하려고 노력합니다만 면벽십년의 달마대사에 비하면 조족지혈도 아닙니다.
    제 정신수양의 요체는 멸시를 당하거나 무시를 당해도 화를 내지 말자입니다.
    고매하신 운선님의 댓글을 받자와 조금이나마 그 기를 받는 것 같아 대단히 기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자연이다2 | 작성시간 24.09.28 네 한달 후 면 자랗요
  • 답댓글 작성자곡즉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9.29 그럴까요?
    날마다 거울을 비춰보면 이 머리가 언제 자랄까싶습니다.
    한달 후 본디 모습으로 돌아가면 덩실덩실 춤을 추겠습니다.
  • 작성자조 요한 | 작성시간 24.09.28 바깥에 나가면,
    동네 노는 할배라 하겠습니다 ㅎㅎ
  • 답댓글 작성자곡즉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9.29 어떤 분은 멋지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민머리로 멋지면 안되겠지요.
    날마다 모자를 눌러쓰고 다닙니다.
    노는 할배 그거도 참 좋은데 당분간 이 머리로 껌좀 씹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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