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맥아더를 비롯한 전쟁영웅에게 5성장군을 부여했는데 우리나라에도 5성장군으로 불리었던 분이 계셨다
주인공은 김홍일장군으로 북한군의 기습남침시 당시 군수뇌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강방어선을 구축하여 미군이
참전할때까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출한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당시 한국군 지휘관 대부분은 대대이상 지휘경험이 없는 만주군이나 일본군 학병출신들의 20대 중후반 젊은이들이었다.
장창국예비역대장이 쓴 육사졸업생이란 책을 보면 이러한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장창국은 1924년생으로 일본육사 4학년때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당시 미군정에선 경찰예비대 창설준비를 위해 군사영어학교라는 속성장교 임관과정을 두었는데
이곳이 한국군의 모태가되었다. 장창국을 비롯한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은 1946년 20대초중반에 소위에 임관하여 대부분
20대 중후반에 장군이 되었다. 6.25당시 한국군 수뇌부인 정일권 백선엽 이형근 등도 만주군이나 일본군 출신으로
30대 전후였다. 해방후 일본군 고급장교출신들은 친일에 반성하는 의미로 한국군입대를 늦추었고 광복군 출신들은
미제의 용병이라 하여 뒤늦게 개별자격으로 입대하였기 때문이다.
김홍일장군은 1898년생으로 어린시절 고향 평북 용천에서 러일전쟁을 경험하였고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에게 배웠고 1918년 황해도에 교사로 부임했다. 민족의식을 앞세워 후진 양성에 힘썼지만 일경(日警)의 탄압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귀주성 육군강무학교에 입학했고, 1919년 군사학교 졸업 후 포병장교로 임관했다.
1921년엔 만주로 이동해 독립군 활동을 하다가 자유시참변(소련 적군의 한인 독립군 진압)의 시련을 겪고,
대한의용군 중대장 등으로 항일 투쟁을 하다 1925년 중국 국민당 정부가 세운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했다.
이후 국민혁명군(국민당군) 소속으로 장제스의 북벌(국민당의 통일 전쟁)에 참여해 승진을 거듭했다.
상하이 병기창에서 근무하던 김홍일은 김구 등 한인 독립운동가를 지원했는데, 이봉창 의사의 일왕 폭탄 투척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 폭탄을 제공하기도 했다. 약산 김원봉이 군관학교를 세웠을 때도 후원자로 나섰다.
백범일지에 등장하는 중국인 왕웅이 그였다. 1937년 시작된 중일 전쟁에서는 102사단 참모장, 집단군 참모처장,
사단장 등 고위 직책을 역임하며 일본군 격퇴에 공을 세웠다. 1945년엔 한반도 진공작전을 준비 중이던 한국광복군에
참여해 참모장을 맡았는데, 당시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장제스가 김홍일을 불러 “임시정부 형편을
듣고 어쩔 수 없이 귀관을 보내는 것”이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다시 중국군으로 돌아가 중장(2성 장군)까지 진급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조국에 돌아와 육군 준장으로 임관했다. 후에 육사교장과 육군참모학교장으로
후진양성을 하던중 6.25가 발발하고 한강교가 폭파당하자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부임하여 무질서하게 퇴각하던
국군을 추스려 3개사단으로 구축하여 북한군을 7일간이나 막아내어 UN군이 반격할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렇기에 국방부전사편찬연구소는 김홍일 장군에 대해서 "탁월한 지휘능력"을 격찬하고 있다.
개전 당시 채병덕참모총장의 전략적 과오로 인한 군사적 위기를 대부분 수습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이후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1군단이 된다. 김 장군은 당연히 초대 1군단장에 임명되었고 이때 임명장의 내용을
보면 국군 내에서 유일하게 사단급 부대운영 경험이 있는 김홍일 장군을 임명한다고 되어있다고 한다.
그는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지연작전으로 북한군을 적절히 저지시키고, 김석원과 같은 예편된 사람을 곧바로 기용하여
수도사단으로 임명하는 등, 적절하게 인재를 배치하였다. 이 분이 있었기에 낙동강전선이라는 것이라도 만들어질 수
있었고, 그 결과 인천상륙작전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6.25에서 미군과 김종오장군이 지휘한 6사단의 업적도 대단하지만
6사단이 만들어준 기회를 활용하여 미군의 지원이 가능하게 만든 것은 김홍일 장군의 능력이었다. 특히 지연작전의 개념이
없던 국군에게 지연작전의 개념을 만들고 시행했다. 만약 김홍일의 공헌이 없었다면 서울함락 이후의 방어와 백선엽의
다부동전투를 비롯한 낙동강 일대에서의 방어전,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등의 반격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비록 이후의 반격,
북진에 가려졌지만, 그 기반을 이룩해낸 김홍일의 업적은 '구국의 영웅'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결코 지나치지 않다.
그후 김홍일은 미군수뇌부와의 갈등으로 1951년 중장으로 예편했는데 중국군 소장 한국군 중장을 합하여 5성장군으로
불리운다. 그는 1980년 82세로 영면하였고 항일무장투쟁과 6.25전쟁 영웅이자 유신독재에 저항한 트리플 영웅으로도
존경받고 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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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그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07.11 감사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대통령이 직접 중국에 있는 김홍일장군을 국내로 오라고 했답니다
이시기 이미 주요보직들을 일군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어 육사교장으로 보직했다가
전쟁이 터지자 한강지구 방어를 맡긴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김장군으로 인해 인민군을 7일간이나 방어하여 대반격에 나설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끝까지 군대에 남아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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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바퀴장 작성시간 25.07.11 김홍일 장군의 일대기를 잘 읽었습니다.
내 조국을 위해 평생을 바친 분, 존경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그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07.11 넵 그분이 북한군을 한강지구에서 7일간이나
방어했기에 국군과 UN군이 반격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역사와 함께 오래 기억되야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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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자연이다2 작성시간 25.07.11 네 좋은 내용. 책 보면서
많은 생각 하게 됩니다. -
답댓글 작성자그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07.11 네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