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주머니 속에 숨겨진 지우개 하나.
결혼 초엔 송편보다 컷던 지우개가 지우고 또 지워
와이셔츠 단추만큼 작아졌다.
달콤했던 신혼의 화사한 무지갯 빛 꿈을 지우고
결혼 초에 가졌던 문학의 꿈과 이상을 지우고
기대 했었던 희망도 눈물 닦으며 지워 나갔다.
어느 때 부터인가
타인처럼 서 있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 지웠기에
형체가 없는 지우개.
밀려오는 세월을 통감하며
눈가 주름까지 한 줄 한줄 지워 나갔다.
이 나이 들도록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고
이른 아침부터 술과 친구를 삼는 남편을
안경 낀 눈 밖으로 곱게 흘기며 지우개에 눈물 섞어 지워 나갔다.
이제 사랑이란 말은 남에 이야기가 돼 버렸나
언제부터 였을까.
결혼 전에 주고 받던 달콤했던 시어 들은
읽지도 않고 꼿아둔 소설책이 되어 먼지 안고 누워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지우고.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지우고.
이른 새벽부터 떨어져 나온 수북한 지우개 똥이
아내의 물기 마를 틈 없는 행주 같았 으리라.
이젠 닳아 없어진 지우개 꽃비 내리던 날 그리움 찾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이. 악 물고 가슴 쓸어 내리며 지우고 지우며 또 지웠겠지.
그 많은 세월을 지워내며
눈물 끝에 매달려 달아 없어진 지우개
이젠 정수리에 흰머리 피고
꽃잎같이 예쁘던 손에 지렁이 길 같은 힘줄 보이니
지우개 똥으로 써 내려간 낡은 공책 한 권 손에 쥐고
아내가 비로소 시인이 되어
길을 떠나려 가방을 챙긴다.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시골바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7 잘 지내시죠?
유월인데 7월처럼 더워요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위 글은 보건 복지부 응모 대상 글 이었습니다
감사드려요
편안한 오후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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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운선 작성시간 26.06.17 그런 아내를 위해 쓴 글이 제가 읽기엔 바다님 본인 글 이기도 한 듯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암것도 못하고 살아온 세월 이젠 놔 줘야 되겠지요
생의 편린들은 세상 어는 지우개로도 지을수 없다는 걸 아내분도 아실테지요
바다님 요즘 잘계시죠? 더운 여름 잘 나셔야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시골바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8 잘지내시죠?
올여름 더위를 예견하듯
오늘같은 후덥지근한 날씨는
예고편같아요
이런 계절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나겠지요
건강하게 잘 계시다가 만나요
담주에는 집에 가는 비행기 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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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바퀴장 작성시간 26.06.18 2016년 4월 15일, <제10회 현대시문학상 금상 수상작입니다>
아내의 지우개
------------------------------- 박 민 순
서랍을 여니
구석으로 또르르 굴러가는 지우개
본래 네모였을 텐데
세월의 무게 지우느라
둥글둥글 모서리 닳았다
손바닥에 지우개를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리다가
아차 하는 순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통통 튀어 오른 지우개
지구의 자전 속도보다 더 빠르게
싱크대 앞으로 굴러가더니
설거지하던 아내의 발뒤꿈치를
툭 치고는 이내 멈추어 섰다
아직도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여
지우고 또 지우는 나를
오디처럼 탱글탱글 여문 눈빛으로
곱게 흘기는 아내
내 삶은 연필과 지우개만으로도
자유로운 삶이었지만
아내는 내게서 떨어져 나온
수북한 지우개 똥을 치우느라
물기 마를 새 없는 행주였을 것이다. -
작성자시골바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8 글이 좋으네요
감사드려요
항상 건강하시어 아름다운 계절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