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뭇잎을 모두 떨군 겨울 숲은 황량해 보이지만, 실은 가장 명징한 공간이다.
이제 나무들은 비로소 제 몸을 드러낸다.
더는 숨길 것도, 과장할 것도 없는 본래의 결,
나무는 잎을 떨굼으로써 오히려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정직한 존재가 된다.
지나가는 바람이 잎 떨군 가지를 흔든다.
빈 가지는 바람에 그저 흔들릴 뿐,
나는 무엇을 덜어내고 빈 가지처럼 흔들릴 수 있는가?
쓸모없이 버려져서 잊힐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도 덜어내어야 할텐데.
2.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이 길은 만해가 걸었던 그 길이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해 걸어갔던 길.
사랑하는 이는 떠났지만, 그 상실은 단순한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
무언가를 잃은 자리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기억으로 채워진다.
떠나 보냄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사랑처럼,
겨울 숲의 빈자리는 부재가 아닌 본질의 확인이다.
3.
나이 듦이란 덜어냄 속에서 드러나는 喪失의 美다.
연말이면 왁자지껄한 송년회에서 사람들은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
누군가는 나이 듦을 문 닫은 공장과 고장 난 기계라는 농담거리로 삼고, 누군가는 아직 괜찮다며 허세를 부린다.
하지만 나이 듦은 쓸모를 잃는 것이 아니라, 쓸모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나이 듦이란
감정을 연출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상실의 아픔이며,
묵묵히 잎을 떨군 겨울 숲의 빈 나뭇가지처럼 이제는 무엇을 더 이상 잃지 않아도 되는
빈 공간을 드러내는 여백의 美다.
4.
바람과 나목과 눈뿐인 숲 깊은 곳에 고요가 찾아온다.
당나귀가 응앙응앙 울 것만 같은 적막 속에서 나는 멈춰 선다.
이 숲의 길은 깊고 넓지만,
내게는 아직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
그러나 그 길은 더 이상 세속의 성공이나 육신의 강건함을 쫓는 길이 아니며
내 안의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길이다.
미당은,
시간이 흘러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는 필연적인 소멸 앞에서, 삶과 죽음이 나뉘어도 그리움은 남는다며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고 노래했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동안 그 사무치는 그리움조차 툭, 털어버리자는 역설적인 다짐.
그러나
뒤돌아보니
숲 속의 앙상한 가지 끝에 휑하니 그리움 하나 걸려있다.
5.
발걸음을 돌린다.
숲을 나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화려한 만찬도, 왁자지껄한 농담도 없는 이 숲에서 나는 고독한 가벼움을 느꼈다.
잎을 떨군 겨울 숲의 그 명료한 상실의 이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바람이 불어온다.
잎을 모두 잃어버린 나무들이 가장 정직한 몸짓으로 바람의 흔들림을 한껏 받아내며
차갑지만 따뜻한 상실을 껴안고 있었다.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단풍들것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11.26 ㅎ 그렇습니다. 유명 시인이 모두 모였어요
여인의 나체 아름답지요.
젊은 사람들의 건강미도 정말 아름답지요 -
작성자강마을 작성시간 25.11.26 저 또한 얼마전부터
진정한 수필에 가볍게
댓글달기 민망해서 주춤합니다
저는 늘 농담따먹기 수준이라서요 ㅎ
요즘의 수필들 모아모아서
언젠가는 수필집 꼭 내시라고
강추 응원합니다
그나저나 열흘동안 식사는
제공이 되는곳이겠죠?
음식에 관한한 똥손이시니
심히 염려스러워서요
웃으시라고.. ㅎㅎ -
답댓글 작성자단풍들것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11.26 조용히 다녀가시면 못볼수도 있는데 다행입니다.
댓글 빠뜨리지 않았어요.
ㅎ 오랜만에 정색하고 올린 글인데 어울리지 않는다는 댓글이 많았어요.
글에 너무 세게 힘을 주었나 봅니다. 반성합니다.
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리식의 야외온수 목욕탕이 여럿 있습니다.
대부분 숲속 인적 드문 지역이며 스키장이나 골프장을 겸하는 곳이지요.
한창 시즌이 아니라 한적 했습니다,
주변에 장단기 숙박할수 있는 호텔들이 많아요. 식사도 제공되지만
주변 식당들이 여럿이라 어렵진 않아요,
아녜스님은 한국 가셨나요? 이태리 간다고 했었는데 ~
요즈음 미국 할매가 통 안보이니 삐졌는지 한번 알아봐 주세요~우헤헤 -
작성자윤슬하여 작성시간 25.11.26 떠나보냄으로 비로소 완성 되는 사랑처럼ᆢ
저는
이 걸 시어머님 돌아가실 때
영구차안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어서. 그 때 깨달았어요
하나님께서. 사랑은 영구차
국화송이 위에 매달아 놓으셨구나
싶었지요
이 글을 읽으려
서너차례 클릭했는데
끝까지 다 읽지 못하는
저의 일상이어서
답글을
기어코 달고야 말아야지하는 오기가 생겨서
이제야. ㅎㅎㅎ
여러번 뇌새김질 해 볼
글이라서
참 좋습니다ㆍ
-
답댓글 작성자단풍들것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5.11.27 서럽게 서럽도록 울었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지요
삶의 방은 어쩌다 들리니
글과 댓글로 유추할수있는 삶방의 분위기나
그리고 관심있는 분들의 근황을 전혀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뜬금없는 말을 실없이 하기도 하지요.
어떤 분이 바쁜 사정이 있는지, 건강이 좋지 못한지, 어느 분의 영감이 바람이 났는지 ~~
아무튼 이제 적지 않은 나이들이니 무탈하시기 바랍니다.
이글은 조용한 곳애서 아픈 아내를 돌보며, 산다는게 참 그렇구나, 라고 느낀 단상인데
공연히 과포장해서 올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