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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말 잇기 아름방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 이

작성자좋아요|작성시간24.04.05|조회수1,914 목록 댓글 4

* 아래 잡설들은  '카더라 이야기' 를  끝마실로 주어 모은 것이외다 ㅎ~

 

梨花月白三更天 (이화월백삼경천)

배꽃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 은한(銀漢)은 하늘 전체에 띠 모양을 하고 은하면과 은하계 중심에 빽빽하게 모여 있는 행성의 무리

~은하(銀河),   天川(아마노 가와), the Galaxy , the Milky Way 이다.

 

다정가로 유명한 이조년(李兆年)은 소승의 고향  옛 시인인 탓~,

어려서 부터 들은 얘기도 좀 있는데다

그의 시로 인하여  밝은 달 아래  배꽃보다  이화를  더 순백하게 그리었더라 ....ㅎ

 

배꽃 계집아이 큰 배움터

소승은 애초 들어갈 자격 자체가 아니어서 제대로 관심을 가져 보지 못하던 터에 오늘에서야  한번...

 

1909년 10월 9일 대한매일신보는 잡보란에 ‘미국 부인 별세’라는 제목으로...

 

“이십여년 전에 한국으로 와서 이화학당을 처음 설시하고 옂자 교육에 열심하던 미국인 시크란돈씨의 대부인(메리 F.스크랜턴, Mary F.Scraton)이 수개월을 신음하다가 작일 상오 8시경에 별세하였는데 명일 하오 1시에 장례식을 상동회당 안에서 거행하고 2시에 양화진으로 발인하여 안장한다더라‘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클랜턴 여사

1885년 미국인 감리회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부인은 북감리회의 선교 정책에 따라 조선에 발령받았고 긴 항해 끝에 조선 땅을 밟았다. 그녀는 52세의 과부였으며, 자신의 아들인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조선에 왔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자 교육자였던 그녀는 조선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육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다.

梨花學堂

서울 정동 이화학당

 

조선인들은 낯선 서양인을 몹시 경계했고 여자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며 공부한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대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단 1명의 여학생으로 학교를 시작했을 정도로 여학생을 모으는 일은 어려웠으며 학교는 몇 년간 재정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후 길에 버려진 여자아이, 기를 형편이 되지 않아 부모가 맡기고 간 여자아이, 학교 일꾼의 딸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등이 스크랜튼 부인의 학생이 되었다...

梨花女子大學校

서울 대현동 이화여자대학교

 

1886년 5월 31일  미국인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여사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세운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 [梨花學堂] 이 모체이다.

 

* 梨花學堂은  오늘날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이다.

 

1885년 52세의 나이로 한국 땅을 밟은 스크랜튼 부인은, 구한말 한국 여성의 지위가 너무나도 낮은 것을 보고, 여성들을 위한 학교를 세운다. 단 1명의 학생으로 시작해 어렵게 학생들을 모아 학교를 키워 나갔고,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내외는  이화(梨花, 배꽃)라는 교명(校名)을 지어주며 격려했다

 

서울 대현동 이화여자대학교

 

이화학당/이화여전/이화여대의 교가는 1906년, 1914년, 1918년 등 여러 차례 제작되었으나

현재 이화여대에서 사용하는 교가는

1930년 국학자 정인보가 작사하고 안기영 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와 메리 영이 함께 작곡한 곡이다.

 

 

 

이화여자대학교 교가.Ewha Anthem

 

E

 

 

1. 한가람 봄바람에 피어난 우리
성인이 이를 불러 이화라 셨다.
거룩한 노래 곱게 도나니
황화방 안에 천국이 예라

2. 지조의 높은 의기 길고 긴 내력
아령비 머다할가 지은이 우리
육부에 삼베 짜던 것 배워
덕행의 수로 온대한 싸세

3. 서거라 단단 커라 절조와 지개
한사람 외오셔도 내일로 알자
하나님 느리 임하심같이
두리는 속에 광명이 쐬네

(후렴) 이화 이화 우리 이화
진선미의 우리 이화
네 향기 널리 퍼져라
아 우리 이화

 

그리운 강남 -  왕수복 원창(장란희 노래)

1928

 

* 김석송 작사. 안기영 작곡

8

화면의 할머니는 1940년대 최고의 배우 문예봉(함흥출신). 

1930년대 인기 여배우로 활동하다 해방후  월북, 북한 영화계를 움직인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북한 최초의 공훈배우다 .

 

文藝峰
林丁元 はやし でいげん  하야시 데이겐

일제강점기 때부터 활동, 해방후 월북한 배우.

 

 

*********

일제 식민지 시대 때부터 서양으로 유학을 다녀온 조선의 작곡가들 중에서  홍난파보다 세살 어리고 현제명보다 두 살 많은 안기영이 있었다. 

 

당대 조선 최초의 테너,  최고의 테너 가수  안기영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안기영이 만든 노래 중에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으로 불리는 노래는 아마도 '이화여대 교가'밖에 없을 것이다.

 

안기영도 윤심덕의 여동생 윤성덕과 같이 이화여전 교수였는데, 나중에 월북을 하는 바람에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지워져버렸다.

 

**********

안기영 (安基永 1900~1980) 성악가, 작곡가.

 

1900년 충남 청양읍에서 태어나 공주에서 자랐다. 공주 영명학교와 배재학당을 다녔고, 배재학당에서 악보 읽는 법과 풍금과 코르넷 연주법을 배우면서 음악에 입문하였다. 191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중 선교사로부터 음악적 재질을 인정받아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미국유학의 행운을 얻었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조교를 잠시 지냈으며,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오레곤주에 있는 엘리슨-화이트 음악학교(Ellison-White Conservatory)에서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하였고, 1928년 귀국해 1932년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때 이화여전 합창단 지도를 맡아 교내 발표와 전국순회연주활동을 했으며, 이화여전 교가를 작곡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는 이 노래를 현재에도 교가로 사용 중.

 

식민지 시대 조선  최고의 히트곡은  안기영이  1928년 데뷔 작으로  작곡한 <그리운 강남>이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 중에 <그리운 강남>을 모르는 분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안기영’의 사생활에서는  조강지처와 딸을 버리고 제자와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인 흑역사가 있다.

 

이화여전 재직중  제자인 김현순과 바람이 나서, 1932년 임신 중인 본처 이성규와 어린 두 딸을 버리고 김현순과 상하이, 도쿄로 도피했다가 1936년 4년 만에 딸과 함께 돌아왔다.  당연히 세간에 큰 이슈가 되었고, 안기영의 공주영명학교 동창인 소설가 방인근은 이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방랑의 가인》이라는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8.15 광복 직후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음악건설본부 작곡부장,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해방전사의 노래> 외 수 편의 노래를 썼다. "그리운 강남"  "마의태자" 등 예술가곡과 한국 최초의 오페라로 평가받는 "견우직녀"를 작곡하는 등 해방을 전후하여  가곡과 전통민요 연구에 힘쓰다1947년 5월 5일자 주간지 "예술신문" 에  "어린이날 노래" 발표.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자 추도곡을 작곡해 지휘했다는 이유로 음악 활동을 중지당했다.

 

1950년  6ㆍ25전쟁 중에  월북하여 국립예술극장 작곡가, 평양음악무용대학 성악 교수로 있으면서 후진양성 사업과 창작활동을 했다. 1957년 예술가 급수 1급을 받았다. 1980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안기영과 김현순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안남식은, 북한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는 등 이름난 피아니스트라고 한다.

* 서울에 버려둔 이성규와 두 딸, 아들 하나...

 소프라노 가수인  김영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안기영의  외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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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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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바람이여 | 작성시간 24.04.05 고등학교 대학교를 이화에서 공부한

    제 이름과 같은 사람을 알게 됐죠.

    성까지 같아서 이 분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됐죠.

    기악과 (피아노 ) 를 졸업했는데

    큰 교회에서 반주를 담당하고 있다고

    하네요. 그 분에게 이화에 대해

    얘기를 좀 들었죠. 배꽃을 뺏지로

    된 사연과 역사를 대충 들은 적이

    있는데 오늘은 좋아요님께서

    개교한 싯점부터 글을 올려 주셨네요.

    교가도 잘 듣고 그 학교가 여성계에서

    돋보이는 위치까지 올라감을 느끼게

    하는 시간 이네요 감사합니다 !

  • 답댓글 작성자좋아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05 성명이 데칼코마니라면
    바람온냐 판박이 진품인가봐요 ㅎ~

    게다가 음악을 좋아하시는 것도 빼닮고...
    참 귀한 인연 귀한 분이시군요.

    어디에 사시는지 좋은 벗, 좋은 인연 배꽃처럼 순백하게...

    저는 배꽃과 이화를 어려서부터
    이조년 전설로 들어온 터인데...

    요즘 배꽃 여자 학교가 뉴스에 나오기에
    들여다 보니 사연중 재미난 사실을 발견해서 가져 왔답니다.

    이화 교가와 안기영 작곡가
    그리운 강남과 애정행각 ...ㅎ

    그런데
    순백의 배꽃밭에서
    그게 뭐꼬요 ㅋ~

    2~3일 안에ㅎ
    몰로키야 새순이 돋아났어요ㅋ~
  • 작성자벼 리 | 작성시간 24.04.06 이화학당?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이지요
    근데
    왜? 정신빠진 정치인이 이화여자대학생들을 폄혜하는 발언을 하여...시끄럽네요
    뭐??
    이런자가 정치를 한다고??
    한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좋아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06
    정신 제대로 나간 품종들
    쌔빌랐더요. ㅎ

    정신도 적당히 나가야지...

    적당히가 그리도 어려운 기준이나 봅니다.

    국민이 개도야지로 보이는면
    맛이 확 !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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