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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넘는 박달재가 만들어진 사연

작성자방죽안|작성시간22.11.08|조회수222 목록 댓글 6

광복 직후인 1947년 가을

작사가 반야월(半夜月, 1917~2012)이

남대문악극단을 꾸려서 전국을 떠돌다가

전북 순창에서 공연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충북 제천에서 극장대표가 다급히 전화를 걸어와

모든 일정을 중단하고 바로 와주기를 청했습니다.

제천 시민들의 뜨거운 요청을

초청 명분으로 내걸었지요.

대우조건도 괜찮았던지라 악극단은

낡은 트럭 2대에 장비와 인력을 싣고

흙먼지 자욱한 신작로 길을 달려 제천으로

당시 제천을 가려면 반드시 충주를 지나

박달재라는 높은 산 고개를 넘어야만 했습니다.

트럭이 고개 정상을 오르기 직전 시동이 꺼져서

일행은 자동차를 뒤에서 밀어 겨우 올랐습니다.

반야월 단장은 박달재에 올라 우선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허름한 두어채의 주막이 있는

적막한 박달재 옆 산모롱이 길로

농촌의 젊은 부부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먼 길을 떠나는 행색의 낭군 뒤를 따라

아내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걸었는데

그 광경이 가슴에 선명한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그날 저녁 제천극장에서

공연을 마친 반야월은 여관방에 엎드려

박달재에서 보았던 젊은 부부의 이별 장면을 떠올리며

노랫말을 써 내려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울고 넘는 박달재’

(반야월 작사·김교성 작곡·박재홍 노래)입니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 ‘울고 넘는 박달재’ 1절

 
박달재의 원래 이름은 다릿재이고

천등산은 실제로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곳의 지명이라고 하네요.
가사에 등장하는 ‘금봉’이라는 여인 이름은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 소설

‘그 여자의 일생’에서 주인공 이름을 빌려온 것입니다.

어떻든 이 노래는 대중의 폭발적 인기를 한몸에 받아

가수 박재홍(朴載弘, 1924~1989)의 출세작이 되었고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제천시의 향토가요가 돼 박달재 노래비도 세워졌고

해마다 박달가요제까지 열리고 있네요.

과거 박달재휴게소에선 온종일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만 울려 퍼졌습니다.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이별이야기를 마치 실화인 듯

스토리텔링으로 엮어서 이 지역 구비전설로

자리 잡게 한 노래로도 유명하지요.

 이동순<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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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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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방죽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1.08 고향에서 처녀가 서울로 올라 와
    공장에 다니면서 친구 한명씩 델고 오면
    보너스를 주던 때가 있었다요.
    공장의 보조원들이 모자라서
  • 작성자세세연년 | 작성시간 22.11.08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제천 박달재 휴계소에서 울려퍼지던 노래
    한때 노래방 18번 이었는데~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방죽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11.08 이 노래를 나이든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것 같습니다.
    국민애창곡처럼 많은 사람들이 불러서 ㅎ
  • 작성자소 리 | 작성시간 22.11.08 울었소
    소리 첬소


    가슴이 터지도록~..

    우리의 삶이
    이런
    가사내용이 아니길요~....
  • 작성자김선아 | 작성시간 22.11.10 가요는 그 시대를 잘표현되고 있지요 일단 노래가 따라부르기 쉬어서 더 대중적이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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