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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스(2)

작성자윈드|작성시간23.03.02|조회수388 목록 댓글 12

나는 오늘 이곳 무도장에서 제일 춤을 잘 출 것 같은 제법 나이도 지긋하게 들어 보이고 인상이 좋게 보이는 또

다른 남자에게 오늘의 마지막 춤을 청할 듯한 시그널(signal)을 보냈다. 그도 곧바로 얇은 미소로 답해 주었다.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떡이면서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분명 내가 한번 그와 춤을 추고 싶은 내 심중을 알고 있었다. 홀에서 가까이선 본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피부가 늙어 보였고 나이도 바로 전 떨어져서 어둠침침한 홀에서 바라보았던 그 모습과는 크게 달랐다. 조금 전

내게 비춰 줬던 그런 좋은 인상과는 좀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조금이라도 어떤 내색을 보인다면 그건 춤

세계의 에티켓이 결코 아니다.

 

이 바닥에선 그 어떤 사람이라도 상대로부터 면전에서 거절을 당하는 것보다 더 무안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춤만 즐겁게 추면 되는 거지 뭐...”  내 스스로를 달랬다.누가 먼저 뭐라 할 필요도 없이 우리 둘은 비교적 사람

들이 덜 붐비는 홀의 후미진 코너로 들어갔다. 나는 그 남자가 비교적 능숙하게 그리고 편안하고 리드하는 대로

따라 했다.

 

빠른 템포의 지르박 곡이 끝나고 역시 내가 좋아하는 구슬프고 느린 템포의 부르스 곡이 다시 흘러 나왔다. 이번

곡은 좀 더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X X 부르스” 라는 잘 알려진 60-70년대에 크게 유행했던 우리가요 다. 리듬

타기가 까다로운 곡이었다. 템포가 보통의 댄스곡보다도 느린 데다가 유달리 처절한 음악소리에 젖다 보면 박자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건너편의 ‘라틴춤 존(zone)’ 에서는 50대 초중반의 두 남녀가 부르스 음악에 맞추어 룸바를 맛깔나게 추고

있었다. 아주 능숙하게 돌아가는 자세가 둘 다 틀림없는 춤 선생 같은 스타일이다. 몸은 모두가 마른 편에 글자

그대로 폼나고 멋있게 춤을 추고 있었다. 남녀가 모두 조금은 좀 촌스럽게 보이는 세련되지 않은 댄스복을 입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곳에선 나름 정성들여 차려입은 의상들이었다.

 

우리 둘은 그들처럼 멋있게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나름 못지않게 한동안 흥겹게 춤을 만끽하였다. 우리는 시원한

맥주로 목이라도 추길 겸 바로 홀 옆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마주 보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춤 추신 지가 꽤 오래된 듯 하네요. 아주 잘 추십니다. 그리고는 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이내 화제를

돌렸다. 요즘 물가 오름세가 장난이 아니네요.

 

거꾸로 아파트 가격은 바닥을 모르고 내려가고 있고요. 지금 같아서는 우리같은 서민들이 살아가기에는 정말 죽을

지경이지요. 그래도 가끔 좋아하는 춤이라도 출 수 있으니 큰 다행입니다. 저는 1인 독립가구로 혼자 살고 있어요.

몇 년전 와이프는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지요.”

그 남자는 묻지도 않는 자신의 개인 신상문제를 거리낌없이 쏟아 냈다.

 

“딸, 아들 두 자식은 출가해서 각각 따로 살고 있고 나는 외곽의 변두리의 작은 아파트서 살고 있어요.

예전에는 오늘과 같이 즐겁게 춤을 춘 후에 함께 춘 여자와 인근의 식당으로 같이 가서 제대로 된 저녁도 먹고 2차로

좋아하는 술도 한잔 더하고 그랬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별다른 고정 수입이 없고 경제적으로 여력이 충분치

못하니 뭐 춤을 춘 후 이렇게 가볍게 목이나 추기면서 시원 맥주 몇 병 마시는 게 전부랍니다.

그래도 오래전에 우연찮게 배워놓은 좋아하는 댄스라도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천만다행인지 모릅니다.”

 

나는 무슨 심사인지 물어보지도 않는 자신만의 사적인 얘기를 늘어놓는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좀 전에

나름 부드럽게 이끌었던 이 남자와 함께 춤을 추었던 그 모습만을 다시 그려 볼 뿐이었다.

이제 진짜로 귀가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서울 변두리의 사는 집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서너 번은 갈아타야 하지만

뭐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더구나 나는 벌써 몇 년 전부터 지하철 무임승차 대상자도 되어 있다.


그 남자는 아직도 내게 무슨 작은 미련이 더 남아 있었는지 홀에 들어가서 한 두곡 더 춤을 추자고 제의하면서

“춤춘 후 2차로 인근 생맥주 집에서 치맥이라도 한잔 더하는데 어떨가요?” 하고 제의해 왔다.

“죄송하지만요. 오늘은 무릎이 아플 정도로 춤을 충분히 췄고요. 술도 저는 원래 맥주 한 두 잔이 저의 주량이랍니다.

솔직히 저는 태생적으로 술을 못하는 체질이거든요“

 

그리고 우리 둘은 테이블에서 일어났고 미련없이 헤어졌다. 사실 나는 누군가 치근대는 것은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춤세계 든 그 어디에서든 나는 나 혼자만의 속박받지 않는 자유스런 일상을 추구하고 싶을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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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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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3.05 픽션 맞고요.
    다양하게 춤을 즐기는 여성들 중의 한 분일 수는 있겠죠.
    고맙습니다~
  • 작성자고래불 | 작성시간 23.03.06 멋지심니다
    저도 어제 7천원 짜리 콜라택서
    잘 취 보이는 한쌍 가까이서 시컷 구경하고 왔어요 ㅎ
  • 답댓글 작성자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3.07 이곳 5060 댄방에도 한번 오세요.
    놀 만 합니다. ㅎ~
  • 작성자탄탄대로 | 작성시간 23.03.07 춤방에서 왜? 남자들은 혼자라는것을 강조할까?
    또 한편 건물 상가 몇개 가지고 있고 연금도 두군데서 받는다고 자랑하는 남성네님~~
    알고보면 말짱 도루묵~~
    춤방에서 정식으로 매너있게 춤을 추며는
    여성들의 눈에도 멋진 매너남은 알아 본답니다
    우리남성분들 모두 멋진 매너남으로 거듭 납시다~~
  • 답댓글 작성자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3.07 나이 들 수록 춤 오래 출수록 혼자가 편하지...
    좋은 댄스매너야 기본이고...
    오래 오래 건강하게 즐댄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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