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6일 (토) 촬영
소수서원 주차장에 있는 안내소입니다. 이곳에서 국가유산 방문 코스 탐방 인증 도장을 찍을 수 있습니다.
(46) 서원의 길. 이 땅에 가장 먼저 세워진 영주 소수서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며,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 기관이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을 배향하는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년)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고, 정부로부터 사액을 받아 이후 소수서원으로 개칭되었다.
대표적인 건물로는 학문을 강론하던 강학당과 경내에 있는 사당인 문성공 묘가 있다.
소수 박물관에는 안향 초상이 있으며, 서원이 건립되기 전에는 숙수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어서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도 남아 있다.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 기능 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다.
강학당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있다.
문성공 묘는 소수서원의 경내에 있는 제향 기능의 사당으로 고려 중기 문신인 회헌 안향이 주향(主享)이다.
매년 3월,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주세붕이 직접 쓴 제향 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홀기문서(笏記文書)가 전하고 있다.
안향은 1260년(원종 1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라고 할 수 있다. - 출처, 국가유산 방문 코스 여권 큐알
영주 소수서원(榮州 紹修書院) / 사적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소수서원은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 출신의 고려 시대 유학자인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집인 사묘(祠廟)를 세웠고, 다음 해에 백운동서원을 건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서원 자리는 원래 통일 신라시대의 사찰인 숙수사가 있었던 자리로 안향이 젊은 시절 공부하던 곳이다.
이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명종 4년(1549)에 왕에게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과 함께 서적을 하사받는 등 국가의 공인과 지원을 받음으로써 서원 제도 정착에 이바지하였다.
'소수'라는 서원 이름은 학문을 이어 닦게 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소수서원은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 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 그리고 자연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는 유식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강학 공간에는 원생들이 모여 강의를 들었던 강학당을 중심으로
원생들이 생활하며 공부하는 지락재와 학구재, 일신재와 직방재 등의 건물이 있다.
제향 공간에는 안향, 안축, 안보, 주세붕의 위패를 모신 문성공 묘, 제향 시 사용하는 물품을 보관하는 전사청,
안향 등 6명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 등이 있다. 유식 공간에는 소나무 숲과 죽계, 경렴정, 탁청지, 취한대 등이 있다.
일반적인 서원은 강학 공간을 앞에, 제향 공간을 뒤에 두고 중심축을 설정하여 여러 건물을 대칭되게 배치하였으나,
소수서원은 동쪽에 강학 공간, 서쪽에 제향 공간을 두었고 개개 건물의 배치도 자유롭다.
이러한 배치는 서원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에 소수서원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추정된다.
소수서원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소수서원과 소수 박물관에는 (국보) 안향 초상,
(보물) 대성문 선왕 전자도, (보물) 주세붕 초상, (보물) 소수서원 문성공 묘, (보물) 소수서원 강학당,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명종 어필 소수서원 현판, 소수서원 소장 판목, 소수서원 고문서 일괄 등 많은 국가유산이 있다.
지금도 매년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소수서원은 중종 38년(1543)에 3명의 원생을 시작으로 고종 25년(1888)까지 모두 4,000여 명 이상의 학자를 배출한 인재의 요람이다.
또한 우리나라 서원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 현지 설명문 -
소수서원 배치도.
인증 도장을 찍고 매표소를 통해 입장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선비촌 주차장에서도 입장할 수도 있습니다.
매표소를 통과하면 좌측에 소나무 숲이 있고, 우측에는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소수서원 소나무 숲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은 가지가 길게 축축 늘어지고 키가 커서 낙락장송으로도 불리는 소나무 군락으로 수백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운치 있게 뻗은 소나무 가지들은 서원에 가까운 것일수록 서원 쪽으로 숙이고 있어서 마치 서원에 공경을 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소나무 숲은 소수서원의 경관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죽계와 닿은 평지에 있는 소수서원이 풍수적으로 뒤쪽이 허하다는 단점이 있어 소나무 숲을 만들어 보완했다는 견해가 있다.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 소나무들은 겉과 속이 모두 붉은 적송으로 수령이 수백 년에 달하는 것이 많다.
기록에 따르면 선조 19년(1586)에 풍기의 유생 황응규, 광해군 6년(1614)에 창석 이준이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또한 효종 5년(1654)에 영귀봉 아래에서 남쪽 냇가에 이르기까지 소나무 1천여 그루를 심었는데 산 것이 겨우 5백 그루였다고 한다.
그 후 소를 방목하거나 화재가 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소나무를 더 심어 소나무 숲을 무성하게 하였다.
소나무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항상 푸름을 간직하는 것이 선비의 기개와 닮았기 때문에 학자수(學者樹)로도 불린다. - 현지 설명문 -
소나무 숲 앞 길 건너편에 있는 당간지주입니다.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榮州 宿水寺址 幢竿支柱) / 보물
당간지주는 절의 위치를 알리는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절에서는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당(幢)이라는 깃발을 높이 달았다.
당간지주는 당을 매달던 깃대, 즉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돌기둥(石柱)이다.
유교의 성지인 소수서원에서 불교유적이 만나는 것이 이채로운데,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다.
출토된 유물이나 유적을 보면 인근 부석사 못지않게 큰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 역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절터에 서원이 세워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 현지 설명문 -
당간지주 옆에는
죽계천이 흐르고 있는데, 죽계천에는 죽계천을 건너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있습니다.
징검다리를 건너갔다 되돌아오기로 했습니다. 취한대와' 경(敬) 자'가 새겨진 바위를 보기 위해서요.
취한대입니다. '경(敬)'자가 새겨진 바위는 죽계천 변에 있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건너편에 있는 소수서원과 500년을 살고 있는 보호수 은행나무는 잘 보였습니다.
취한대와 죽계천
취한대쪽에서 본 소수서원입니다.
사용이 금지된 나무다리인 제월교입니다.
박물관 입구에 있는 광풍정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왔습니다.
광풍정, 광풍대(光風亭, 光風臺)
이 정자 인근에 광풍대가 있고, 광풍대는 퇴계 이황 선생이 명명(命名) 하였다.
광풍정은 4각 정자로 2002년에 세웠으며,
앞에는 죽계(竹溪)가 감아 돌고 뒤로는 연화산이 에워싸고 있어 주변의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광풍대는 송사(宋史) 주돈이(周敦頣) 전에 나오는 제월광풍(霽月光風)에서 따온 말로 인근에는 제월교가 있다. - 현지 설명문 -
소수서원의 진입 영역입니다.
(1) 영귀봉 (2) 학자수 (3) 소혼대 (4) 지도문 (5) 성생단 (6) 경렴정
영귀봉에 올라서 본 소수서원입니다.
서원 왼편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둔덕은 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처럼 보여 영귀봉(靈龜峰)이라 한다.
영귀봉 주변으로 수백 년 된 적송이 장관인데, 소나무에게서 선비의 충절을 배운다는 뜻으로 학자수라 불리기도 한다.
보기에도 멋진 소나무 숲은 서원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영귀봉 위에는 작별의 정을 나누던 소혼대(消魂臺)가 있다.
영귀봉에서 본 소수서원의 제향 공간인 문성공 묘(文成公廟). 보물
소수서원의 담장
영귀봉에서 본 소수서원의 정문인 지도문과 경렴정
소수서원의 정문인 지도문 앞에 있는 잔디 제단은 성생단(省牲壇)이다.
매년 봄, 가을에 안향 선생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가축의 흠결을 살피고 잡던 제단 터이다.
소수서원 은행나무(銀杏) / 보호수, 수령 500년, 지정일자 1982년
수령이 약 500년 정도로 알려진 소수서원 은행나무는 소수서원이 세워질 무렵에 심어졌다고 추정된다.
이 은행나무는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리는데, 은행 열매처럼 많은 인재를 배출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서원과 향교에는 예외 없이 은행나무가 있다.
서원의 은행나무는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던 정신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그러나 살구나무(杏) 대신 은행나무를 심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살구나무의 '행'과 은행의 '행'이 같은 글자여서 오래 살지 못하는 살구나무보다
천 년 이상 사는 은행나무를 선택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서원과 향교에 있는 은행나무는 유교와 관련된 우리나라의 정신문화를 간직한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 현지 설명문 -
경렴정
지도문 오른쪽 경렴정은 죽계수를 따라 펼쳐지는 멋진 경관을 바라보며 학문을 이야기하던 곳으로 1543년 주세붕이 세웠다.
경렴정에는 스승인 퇴계 이황의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썼다고 전해지는 초서의 대가 고산(孤山) 황기로(黃嗜老)의 현판이 남아있다.
경렴정과 지도문.
경렴정에서 본 죽계천 건너편의 바위에 경(敬)이라고 새겨진 글자.
경자 바위(敬字巖)
주세붕(周世鹏)은 '경, 敬'이라는 글자 한자를 바위에 새겨 남겼다.
경자는 선비의 덕목을 나타낸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안향(安珦)을 공경하고 기리는 마음을 후대에 전한다는 뜻도 있다. 경자 위의 백운동은 소수서원의 본래 이름이다.
취한대 (翠寒臺)
취한대는 자연을 벗하며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퇴계 이황이 터를 닦고 취한대라 이름을 붙였다.
이는 옛 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따 온 것으로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이다. - 현지 설명문
소수서원 강학 영역
(1) 강학당 (2) 지락재, 학구재 (3) 일신재, 직방재 (4) 장서각
소수서원의 정문인 지도문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강학공간과 마주하게 됩니다.
강학 영역에는 약도처럼 강학당, 지락재와 학구재, 일신재와 직방재 그리고 장서각 건물들이 있습니다.
서원은 크게 강학영역과 제향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강학 영역은 학문을 닦고 배우던 공간이다.
앞의 제일 큰 건물이 강학당(보물)이고 오른쪽 뒤편으로 돌아가면서 지락재와 학구재, 일신재와 직방재가 위치한다.
강학당 왼쪽으로 장서각이 있다.
건물 배치는 하학상달(下學上達), 즉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한다.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지락재를 시작으로,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재,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 그리고 깨어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
이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이라 불리는 강학당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배출된 인재가 4,000여 명에 달한다.
1543년에 건립된 강학당 내부에는 명종 임금이 내려준 친필 편액이 걸려있으며,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장서각은 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 / 보물
강학당은 중종 38년(1543)에 주세붕이 세운 건물이다.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던 곳이기 때문에 이름을 강학당이라고 하였다.
강학당은 소수서원의 강학 공간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가장 규모가 크다. 향교의 명륜당에 해당하는 곳이다.
강학당은 앞면 3칸, 옆면 4칸 규모의 기와집이다. 일반적인 한옥 건물의 옆면에 해당하는 부분을 앞면으로 설정한 독특한 구조이다.
지도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오면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건물 앞부분 3칸은 대청이고 뒤쪽 1칸에는 방을 둔 이른바 전청후실의 특이한 구조이다.
대청은 원생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고 방은 교수가 거처하는 공간이다.
강학당 내부 대청 북쪽에는 명종이 직접 쓴 '소수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그리고 강학당 앞쪽에는 "백운동"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백운동은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기 이전 이름이다.
강학당은 전체적으로 웅장하고 기품 있는 인상을 주는 건물로, 이황의 문하생을 포함해 4천여 명이 넘는 인재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소수서원의 역사와 역할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건물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조선 시대 건축사 연구에도 좋은 자료이다. - 현지 설명문 -
소수서원 강학당 / 보물, 1543년(중종 38), 정면 4칸, 측면 3칸
강학당은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중종 38) 군학사(郡學舍)를 옮겨온 것이다.
전체적으로 큰 대청을 형성하고 방은 한쪽에만 있다.
대청 북편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2004년 4월 6일 보물 제1403호로 지정되었다.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다듬은 초석을 놓았으며,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 웅장하고 고색창연하다.
사방 둘레에 너비 1m 정도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 가장자리는 높이 6.5cm의 턱을 두었고, 기단 네 모서리에 추녀를 받치는 활주를 설치하였다.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 2개를 설치하였다. 기단 3면(정면, 우측, 좌측)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굴뚝은 마루 밑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처리하였다. 기둥 윗몸에서 앙서 하나를 내어 기둥 위에 놓인 주두와 결구시킨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 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종보 위에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건물은 남북으로 길게 동향하여 있으며, 서원 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정문을 면하여 '백운동(白雲洞)' 현판이 있다.
강학당 북쪽에 있는 일신재와 직방재는 원장, 교수 및 유사(有司)의 집무실 겸 숙소인데,
동, 서재가 독립되어 있지 않고 양재(兩齋)가 한 동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건물이다. - 백과 어학사전 -
강학당의 마루입니다. 마루 끝에는 방이 두 칸 있습니다.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 편액이 걸린 북쪽 벽
우측이 강학당의 정면입니다. 뒤에 보이는 건물이 지락재와 학구재이고요,
강학당 뒤로 반쯤 보이는 건물은 지락재와 학구재란 편액기 걸려 있는 건물입니다.
지락재, 학구재(至樂齋, 學求齋)
지락재와 학구재는 원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곳이다.
소수서원의 강학공간에 있는 건물로, 2동의 건물이 조금 떨어져 'ㄱ'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지락재는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기와집이다.
북쪽의 1칸은 온돌방이고 남쪽의 2칸은 마루인데, 온돌방과 접하는 면을 제외한 마루의 3면은 모두 개방된 구조이다.
'지락'은 송나라 구양수의 글 중 지락막여독서(至樂莫如讀書)에서 따온 이름으로 '지극한 즐거움은 독서만 한 것이 없다'란 뜻이다.
높은 곳을 우러러보는 공간이라고 하여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한다.
학구재도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기와집이다.
중앙에 앞뒷면이 개방된 마루가 있고 양쪽에 각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학구'는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한다는 뜻이나, 어린 학생이 생활하는 공간이어서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한다.
학구재
지락재
일신재, 직방재(日新齋, 直方齋)
일신재와 직방재는 원생, 교수와 서원의 원임들이 생활하던 숙소로
각각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하나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조인데 편액으로 양자를 구분한다.
앞면 6칸 옆면 1칸 반 크기의 기와집으로, 중앙에 2칸 크기의 마루가 있고 양쪽에 각각 2칸 크기의 방이 있다.
직방재는 건물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있는 방은 직방재이고, 일신재는 왼쪽에 있는 방이다.
일신재는 원래 직방재 옆에 딸린 작은 서재로 신방(新房)이라 불리었다.
순조 5년(1805)에 건물을 다시 지으면서 확장하고 일신재란 이름을 붙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일신재의 '일신'은 <대학>의 '(인격 도야가) 나날이 새로워져라.(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라는 문장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다.
직방재의 '직방'은 <주역>의 '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써 행동을 가지런하게 한다.
는 문장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다.(경이직내 의이방외, 敬以直內 義以方外)' - 현지 설명문 -
장서각(藏書閣)
서원의 장서각은 나라에서 내려준 책과 서원의 책, 서원에서 출판한 목판 들을 보관했던 곳으로,
현대의 도서관과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소수서원 장서각은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책인 '어제내사본(御製內賜本)'을 비롯하여
나라에서 내려준 서책과 각종 책 3,000여 권을 보관했던 건물이다.
장서각은 직방재와 문성공 묘 사이에 있는데, 주세붕이 중종 38년(1543) 무렵에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앞면 2칸, 옆면 1칸의 기와집으로, 앞면에는 칸마다 문을 달았고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려고 마루를 깔았다.
* 목판(木板) - 나무에 글이나 그림 등을 새긴 인쇄용 판
장서각 앞마당에 있는 정료대(불우리, 노주석 등)
정료대와 관세대(庭燎臺, 盥洗臺)
정료대는 밤에 서원을 밝히던 조명시설로 윗부분 석재 위에 관솔을 피워 정원을 밝혔다.
관세대는 사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대야를 올려놓는 받침돌이다.
소수서원의 제향 영역
(1) 문성공 묘 (2) 전사청 (3) 영정각
제향 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문성공 묘(보물)와 전사청, 영정각 등의 건물이 있다.
문성공 묘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문성공 회헌 안향의 위패를 모신 사묘(祠廟)로 1542년 주세붕이 세웠다.
문성공 묘를 사(祠)라 하지 않고 묘(廟)로 격을 높여 부른 것은 흔치않은 일이다. 매년 봄, 가을의 두 번의 제(향사)를 지낸다.
문성공 묘 뒤편에 있는 전사청은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준비하던 곳이다.
일반적으로 전당후묘라 하여 강학공간 뒤에 제향 공간을 두는데
서쪽 방향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 사상에 따라 강학공간 측면 서쪽에 제향 공간을 배치한 독특한 사례이다.
서원에 영정각이 있는 것도 특이한 일로 안향 초상(국보)과 주세붕 초상(보물) 등 보물급 영정을 많이 소장하고 있어
1975년에 특별히 지어진 건물이다. 현재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현지 설명문 -
문성공 묘의 측면입니다. 내부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 묘 / 보물
문성공 묘는 중종 37년(1542)에 주세붕이 안향을 기리기 위해 안향의 고향인 순흥에 세운 사당으로 소수서원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사당에는 '사(祠)'자를 사용하고 왕이나 나라의 큰 인물을 모신 곳에만 '묘(廟)' 호를 쓰게 하였다.
이를 보면 문성공 묘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주자학을 도입한 문성공 안향을 기리고자 격을 높였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기와집이다.
안향을 모신 이후 중종 39년(1544)에 안축과 안보, 인조 11년(1633)에 주세붕을 추가로 모셨으며,
매년 3월과 9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주세붕과 이황이 직접 제향 의식 절차를 기록한 <홀기(笏記>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제향을 올릴 때 주세붕이 직접 지은 <도동곡(道東曲)>이라는 경기체가를 부르는데,
이는 안향이 중국 공자의 도(道)를 우리나라로 옮긴 것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서원에서 도동곡을 부르는 곳은 소수서원이 유일하며, 이는 소수서원이 우리나라 도학의 연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1) 초정일 - 음력으로 표시된 날짜 가운데 매달 처음 '정(丁)'자가 들어 있는 날로 음양오행을 기준으로 할 때 붉은색 날에 해당한다.
2) 경기체가 - 고려 중기에 발생하여 조선 초기까지 유행하였던 시가 장르
보수 중인 전사청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향사 시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물을 마련하던 곳이다.
제물을 장만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 편리하도록 문성공 묘 바로 옆에 배치하였다.
주세붕이 중종 37년(1542)에 문성공 묘를 지으면서 함께 만들었다고 전한다.
앞면 3칸, 옆면 1칸의 기와집으로 1칸은 방이고 2칸은 마루를 두었다. - 현지 설명문 -
영정각(影幀閣)
영정각은 소수서원에서 보관하는 영정을 모시기 위해 1975년에 지은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의 기와집이다.
조선 시대에는 도동각(道東閣) 또는 영정실(影幀室)이라고 하였으며, 안향의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서원에 영정각을 두는 것이 드문 일이기는 하나 소수서원에는 보물급 영정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영정각을 건립하였다.
영정각 내부의 중앙 좌측에는 주자학의 시조인 주자의 영정, 우측에는 우리나라 주자학의 선구자인 안향의 영정
왼쪽에는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의 영정, 능력과 덕망을 겸비한 문신인 한음 이덕형의 영정,
오른쪽에는 청백리의 표상인 오리 이원익의 영정과 조선 후기 사상계를 이끌었던 미수 허목의 영정이 있다.
이 가운데 안향의 영정은 국보, 주세붕의 영정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있으며 전시된 영정은 복제본이다.
일영대(日影臺)
일영대는 해시계로 알려져 있다.
맑은 날, 윗부분 돌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한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다.
영정각 중앙에 모셔 있는 주자와 안향의 영정입니다.
안향의 영정은 국보입니다.
영정각 왼편에는 허목과 이원익의 영정을 모셨습니다.
영정각 오른편에는 주세붕과 이덕형의 영정을 모셨습니다.
주세붕의 영정은 보물입니다.
주자와 안향의 영정
주세붕과 이덕형의 영정.
허목과 이원익의 영정. 영정각에는 여섯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국보 매헌 영정
영정각 뒤에 있는 문으로 나가면,
소수서원 사료관이 나옵니다.
사료관 앞 뜰에 숙수사지에서 출토된 석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숙수사지 출토유물
숙수사는 통일신라시대 초기 창건된 사찰로,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들로 보아 매우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안축(安軸)의 <죽계별곡,竹溪別曲>에도 실려 있다.
세조 3년(1457)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로 순흥 지방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 영향으로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서원 입구에는 당간지주(보물)가 있고 석등, 주춧돌, 광배 등의 석재 유물들과 25구의 금동 불상이 출토되었다. - 현지 설명문 -
죽계천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본,
죽계천.
죽계천
선비촌
영주 선비상.
작성자 : 칠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