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하나인 지구촌에 살면서 계속 깔끔하고 평탄한 삶은 없다.
원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불행이 연속해서 우리 삶을 덮쳐오곤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꺼번에 몰려온다. 이런 혼란과 불행이 시작되면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고 무의식 중에 살아갈 의욕마저 잃게 된다.
연속 꼬이는 일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
필자도 어렸을 때 수많은 갈등을 경험하면서 중, 고교를 어렵게 마치고
주간에 학업을, 야간에 사원 1천명 규모의 회사에서 근무 중 진로변경했다.
육군3사관학교 생도 때 투철한 국가관을 정립하면서 보병 소위로 임관했고
심지어 특전사 공수 기본교육 기간에 사고났던 마른 피가 범벅된 낙하산을
대신 짊어지고 공중낙하 시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수직으로 고속낙하 중
예비낙하산을 겨우 펴면서 기적같이 한강 미사리 모래밭에 떨어졌다.
그 후 2004년경 암에 걸려 2년간 투병하다 회복되자마자 파산 직전의 위기,
교통사고 피해자로 몇번이나 사선을 넘는 등 그때마다 천우신조를 경험하면서
맷집을 불린 결과, 위기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힘든 상황에서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오늘날 필자가 살아가는 큰 힘이 되곤 한다.
그러한 연유로 인생의 축소판인 장기 바둑을 두면서 장고에 빠지기도 하고
사시사철 축구나 탁구, 배드민턴을 치곤했는데 어느날 삐딱선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스포츠 맨쉽에 땀을 흘리는 것보다 까치발 들고 살살이처럼 까칠한 접대에
목을 걸고 영업성 골프를 치는데 골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그저 신기한 일은
모두가 저마다 ‘강사’고 ‘프로’라는 점이다. 친구의 형 ㅡ 국가대표 선수 ㅡ 에게
골프 기본을 익히기 위해 필자도 한때 푸른 필드에서 골프 채를 몇번 흔들었지만
배우는 과정에 도토리 키재기식으로 자신과 실력이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이나
기껏 몇 달 먼저 입문해 보이는 사람들도 배움보다 남들을 가르치고 싶어 안달이다.
그냥 호기어린 정도로 보기는 어려운 교만이요 만용이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런 함정에 빠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배움은 적으나 평소의 신념이 고집스러울
정도로 강한 탓이다. 그런 사람은 가식과 권모술수에 능하다. 스펙 꾸미기와
치장에 천재적이다. 이제는 AI까지 등장해서 간단한 머리와 최소한의 지능만
있으면 컴퓨터라는 하드웨어를 통해 모든 것을 간단없이 손안에 넣는다.
범죄에 가까운 페이크의 경계도 넘나든다. 과거처럼 확인하는 일이 힘들지 않아도
상대의 귀찮고 섞이고 싶지 않은 나약함에도 그 이유는 있다. 그러다 보니 이솝우화에
나오는 까마귀가 공작새의 깃털로 자신의 몸통을 화려하게 꾸미는 일들이 넘치고 있다.
유행 그 무엇을 유튜브로 알아차린 후 본인이 유튜버로 신장개업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마치 골프 입문자가 느끼는 저마다의 능력자들이 위조하는 그래서 지금의 병든 사회로
이르게 하는 고질병을 말한다. 작은 조직이나 거대한 사회도 마찬가지다. 대개의 이러한
사람들이 주변까지 병들게 하고 자신도 기대 하기조차 어려운 나락으로 빠져들게 된다.
진보나 보수를 떠나 신념만 가득 찬 만용으로 만들어진 결과가 지금의 경제나 사회를
그르친 것만도 봐도 확연해진다.'무식하면 용감해진다'는 말이 아니라도 자기만 옳고
"왜 난 너희들과 다를 게 뭐가 있냐"는 불만어린 응어리가 만들어 낸 애매함의 사고다.
대개의 그런 특징은 '모 아니면 도'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시작한다. 배움이 충분하지
못한 탓에 틀에 박힌 사고로 일관하면서 보이는 것 모두가 '모 아니면 도' 흑백논리다.
세상이 모순되거나 삐딱한 어려운 현실에 자신만의 신념으로만 나아갈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입 놀림이 현란한 꾼들부터 바닥에서 기는 경제에 이르기까지
유사한 부류의 사람들이 늘 그 앞에 서 있다는 게 진짜 문제다. 과유불급(過猶不及)과는
격을 달리해도 아는 것이 적을수록 확신이 커지는 탓이 크다. 또 지고지순하게 보이고
심지어 약자와 함께 하는 척, 자기를 과대 포장하는 성향 탓에 느닷없는 성희롱 같은
말초적 1차원적 사고를 쳐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드러난 것만 혼자가 아닌 더불어 터진 비서를 두었던 서울, 부산, 충남이 그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