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사
신라 말 최은함이라는 인물은 아들을 얻지 못해 중생사의 관음보살 앞에서 열심히 기도해 아들을 낳았다.
신라 경애왕 927년 후백제군이 쳐들어오자 최은함은 갓난 아기를 강보에 싸서 관음보살상 옆에 감추어
두었다. 적병이 물러간 후 보름이 지나 아이를 찾아보니 살결은 새로 목욕한 것과 같고 모습도 어여쁘고
젖냄새가 아직도 입에 남아있었다. 이 갓난 아기가 훗날 시무28조를 지어 고려의 기틀을 잡는데 큰 공을
세운 최승로다.
<삼국유사> ‘탑상’)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1917년 제작한 ‘조선고적도보’ 속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
위의 불상과 같은 곳에 있다가 박물관에 오게 된 십일면관음보살상
돌에다 새긴 석조 11면관세음보살은 우리나라에서는 3점, 중국에서도 10여점 밖에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불상이다 현존하는 석조 11면관세음보살상 3점은 모두 경주에 있는데
지금 이 불상과 , 석굴암의 11면관세음보살,그리고 굴불사지의 6비 11면 관음보살상(선각)이다
약사불
1917년 <조선고적도보> 사진에 실린 십일면관음보살과 함께 광배 일부가 남겨져 이 불상이 낭산에서
반출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왼손에 약합을 들고 있는 약사불로 광배와 불신 대좌가 한 돌로 조성되였다
약사불이 약합을 들고 있는 도상은 신라 8세기 후반에 조성되었다 광배 불신 대좌가 한 돌에 세긴
제작 방법이나 힘이 빠진 부드러운 조각 수법 등은 8세기 이후에 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경주국립박물관 야외전시관에 있던 중생사 관음보살의 머리 부분
이 관음보살상은 머리와 몸체가 따로 전해와 머리는 일찌감치 경주박물관에 모셨고
이 불상 저 불상과 서로 맞춰 보기를 수 백번,했으나 몸체는 찾지 못하였다
나머지 몸체는 낭산 서쪽 기슭 능지탑 근처에 반쯤 묻혀 있다가 1975년 몸체를 조사하였는데
발굴전 낭산 서쪽 기슭에 쓰러져 있던 몸체 부분
그 마을 노인으로부터"이 불상의 길쭉한 머리를 박물관 사람들이 가져갔다"는 얘기를 듣고
이로써 국립경주박물관 정원에 전시중이던 석조관음보살 불두가 낭산에 있는 석조관음보살의 몸체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어 한 몸으로 복원하게 된다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관
오늘에 와서야 제 모습을 찿은 불상
머리에는 보관을 씌워 꽃무늬의 테를 돌렸으며 영락장식의 천의를 걸친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데 불상의 전체 높이는 220cm이다 적절한 신체비례와 유려한 세부 표현으로 보아
통일신라 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구의 불상이 낭산 서쪽자락에서 발견되었다 일제강점기 약사불과 십일면관음보살이 한 공간에
모셔져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약사불은 서울로 반출되고 십일면관음보살은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 분관으로 이전되었다 따라서 하나의 사찰에 이 세 불상이 모셔졌을 가능성이 크다
관음보살이 머리에 쓴 보관에는 , 화불이 새겨 있었겠지만 세월에 마모돼 지워져 버렸다
산령각
중생사 주변의 석탑부재와 불상 좌대
지금은 전각 안에 모셔져 있지만 얼마전까지 노천에 방치된 상태로 있었다
낭산마애삼존불 (보물 제665호)
화강암 암벽에 새겨진 통일신라시대의 낭산마애삼존불
마애보살 삼존좌상. 좌우에 갑옷을 입고 검을 든 신장상이 본존상을 향해 편안하게 앉아있다.
본존 지장보살(문화재청 사진)
본존불인 피모지장보살(두건 또는 모자를 쓰고 있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양쪽 어깨를 감싸는 법의를 입은 모습이 고려불화의 지장보살과 비슷하여
지장보살로 추정한다. 옷은 통견인데, 왼쪽 어깨 위에서 한겹 뒤집혀 있고, 드러난 가슴에
두 줄의 옷주름선이 비스듬히 표현되었다. 또한 군의를 묶은 띠매듭이 보이며, 옷주름은
두 무릎을 덮어 발이 드러나지 않았다. 두광과 신광은 원형으로 음각되었다
우협시물 신장상(문화재청 사진)) 좌협시불신장상(문화재청 사진)
이 삼존상은 세부표현이 마멸되어 상의 명칭과 제작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얕게 부조된 평판적인
부드러운 신체, 풍만한 얼굴, 넓은 어깨에 비해 무릎 폭은 좁지만 안정된 자세 등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을 따르고 있다.또한 신라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전해지는 능지탑이 이곳과 가까이 있는 점도
조성시기를 결정짓는데 한 몫을 한다 중앙의 지장보살상은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이며 양쪽의 신장상은
고개를 본쫀쪽으로 돌린 채 서로 교차해서 바라보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몸에 갑옷을 입고 있다.
한쪽 발은 안쪽으로 접고 다른 쪽 발은 약간 편 자세인 유희좌(遊戱坐)를 하고 있다. 이렇게 보살상과
신장상이 함께 조성되는 경우는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오른쪽 신장상(문화재청 사진)
유희좌를 하고 양손은 삼차극(三叉戟)을 잡고 갑옷을 입고 있다.
양쪽의 협시불이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것으로 보아 악귀를 몰아내는 신장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왼쪽 신장상(문화재청 사진)
왼쪽 신장상은 머리는 나발이고 오른손에 검을 들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형상이다
현재 ㅡ오른쪽 신장상
마애삼존불은 시간이 갈수록 마멸되아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비록 전각을 세웠으나 세월 앞에서는 모두가 무용지물이다
우리 뒤에 오는 세대들은 사진으로나마 그 형체를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아 안타깝다
옛부터 능시탑(陵示塔) 또는 상부 옥개부분에 돌아가며 복련의 연꽃 조각한 돌 장식을 둘렀기 때문에
연화탑(蓮華塔)이라 불렀다 하지만 능지탑에 관한 문헌기록은 없다.문무왕의 화장터가 이 곳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점도 문제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사방불을 모신 불전이나 고려때 만든 5단의
방형탑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능지탑(陵只塔)
능지탑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1차 조사가 이루어졌고 1969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삼산오악조사단에 의해 이곳이 문무왕의 장지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한 판단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문무왕의 화장지를 고문외장이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 그후 40여년간 그렇게 굳어져
학설로 받아들여졌다. 문무왕의 시신은 죽고 나서 10일이 지나면 고문(庫門) 바깥 뜰에서 서국(西國)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였다. 이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그러면 '고문외정'은 어디인가?
고문은 제후가 천자를 만날 때 통과하는 다섯 문 가운데 하나로 두번 째 문이다. 이 다섯문을
"천자5문"이라 하는데 바깥족에서부터 고문(皐門), 고문(庫門), 치문(雉門), 응문(應門), 노문(路門)이
그것이다. 그런데 고문(庫門) 양쪽에는 종묘와 사직이 있다. 이때 황제를 중심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왼쪽에 종묘가, 오른쪽에 사직이 자리한다. 또 신라의 왕궁인 월성은 왕경의 남쪽에서 북향하고 있다
삼산오악학술조사단이 1969년부터 1979년까지 11년간 발굴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유구 중심부
지하에서 시커먼 그을음이 넓게 깔려 있는 층이 있었다 이것을 장작을 태운 흔적으로 추정하였던 것이다
황수영박사가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하여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한 이후 거의 정설로 굳어져 왔다
토끼
그리하여 1970년 발굴조사 결과
이때 주위를 둘렀던 12지 신상이 발견되었다 또한 석조 방단의 중심부에서는 찰주를 방불케하는 유구와
소조여래상의 파편들이 사방에서 확인되었다 따라서 창건기에는 사면에 흙으로 만든 큰 불상을 봉안한
감실과 같은 목조건물이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12지 신상은 원래 능지탑 축조와 관련된
것이 아니며 어느 왕릉에서 사용되었던 것인데 왕릉이 훼손된 후 이곳으로 옮겨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원숭이 상
이후 능지탑은 1979년 방형제단처럼 추정 복원되었다 그러나 현장에 상당수에 달하는 연화문 석재들이
남아 있어 원형과 다르게 복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조된 12지 신상은 평복과 무복 그리고 조각 수법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결과적으로 12지 신상 크기에 다소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몇몇 상은 양식도 달리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양식적으로 서로 달라 능지탑 일대에서 혼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갑옷 차림의 양상
그동안 오류로 알려져 왔던 평복차림의 쥐상(호랑이 상)
능지탑의 기단부에는 십이지상이 사방에 세워져 있는데 범, 용, 뱀은 결실되고 9기만
남아 있다 그 중에서 특이한 것은 북쪽면에 있는 쥐상이다
12지 신상 중에서 북면 자상이 얼굴에는 낮은 귀와 함께 이빨을 나타내었고
왼손은 칼을 쥐었으며 오른선은 도포자락 속에 감추어져 있다
본래 능지탑의 쥐상
그동안 쥐상은 다른 십이지신상과 복시과 크기가 다르고 황복사지 앞에 있는 폐왕릉에서 가져온 것으로
설왕설래했으나 1982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쥐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황복사지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또한 쥐상은 본래 쥐가 아니라
호랑이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기단 위의 연화문 석재
현재 세워져있는 2층의 네모난 방형식 석탑은 1979년에 보수할 때 임시로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능지탑은 방형의 2층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되었는데 현장에는 상당수의 연화문 석재들이 따로 남아있어
원형과 다르게 복원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하층 옥신에는 각 면에 3구의 십이지신상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남쪽 뱀상, 동쪽 화랑이상 및 용상은 결실되어 새로운 석재로 보충하였다. 토단 낙수면 중앙에 상층
옥신부를 돌기둥으로 결구하였고 그 위에 초층과 같이 연화석을 놓았다. 상층 상부도 역시 토층으로
낙수면으로 처리하고 그 중앙에 자연석의 보주를 놀려놓았다.
추정 금당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