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을은 원래 용동(龍洞)이라 고 불리다가 조선시대 이르러 마을에 잦은 참상이 발생하여 마을 사람들이
원님에게 고하니 원님이 갇혀 있던 천리 길을 달리는 말처럼 승천하라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마동( 馬洞)이라 고쳐 지어 주었다고 한다
마동 삼층석탑 (보물 제912호).
석탑이 있는 이곳은『삼국유사』권5, 대성효이세부모(大成孝二世父母)조에 기록된 장수사(長壽寺)의 옛터라고
전한다. 모량리의 가난한 여인 경조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한 것이 마치 성과 같아서
이름을 대성이라 했다. 집이 가난해 생활할 수가 없어서 부자인 복안의 집에 품팔이를 했는데 그 집에서 나눠 준
약간의 밭으로 옷과 먹을 것을 마련했다. 이때 덕망 있는 승려 점개가 흥륜사에서 육륜회를 베풀고자 복안의
집에 와서 시주를 권하니 복안이 베 50필을 시주했다. 점개가 주문으로 축원하기를 “신도께서 보시를
좋아하시니 천신이 항상 보호하고 지키시라. 하나를 보시하면 만배를 얻으리라
.편안함과 즐거움을 누리고 오래도록 사시라”고 말했다. 대성이 이 소리를 듣고 급히 뛰어들어가
그의 어머니에게 “제가 문간에서 스님이 외우는 소리를 들으니 한번 보시하면 만배를 얻는다고 말씀하더이다.
생각해보니 저는 전생에 좋은 일을 하지 않아서 지금 이렇게 곤궁한데 오늘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에는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해서 후일의 과보를 도모함이 어떻겠습니까”고
묻자 그의 어머니가 좋다고 했고 대성은 점개에게 밭을 보시했다. 얼마 안 되어 대성이 죽었다. 이날 밤 나라의
재상 김문량의 집에서 “모량리의 대성이란 아이를 네 집에 맡기겠다”는 하늘의 소리가 들렸다. 집안 사람들이
깜짝 놀라 사람을 모량리에 보내 알아보니 대성이 과연 죽었는데 죽은 그날이 하늘에서 외치던 날과
같은 때였다. 그때부터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왼손을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야 폈는데
대성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금간자가 있어서 이름을 또 대성이라 짓고 그의 예전 어머니를 이 집에
모셔와 함께 봉양했다. 대성은 자라서 사냥을 좋아했다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아 산 아래 마을에서 유숙했다.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시비를
걸며 “너는 어찌하여 나를 죽였느냐? 내가 도리어 너를 잡아먹으리라”고 했다.대성이 두려워 떨면서 용서를
빌었다 귀신이 “나를 위하여 절을 지어 줄 수 있느냐”고 묻자 대성이 그러하겠다고 맹세했다. . 이로부터
사냥을 하지 않고 곰을 잡았던 이곳에 절을 짓고 <몽성사>라 하였다가 뒤에 <장수사>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를 지었다
불국사를 지척에 두고 있는 탑이다. 이곳 외에도 진현동 일대에 다수의 절터가 확인되고 있으나
불국사와의 거리가 불과 600m 정도이고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장수사로 추정하고 있다
이중 기단 면석 4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각각 2개씩 새겨져 있고 기단 받침돌에는 활모양과 각진 모양의
2단 몸돌 굄이 있다 옥개석 층급 받침은 5단이며 네 귀퉁이와 아래 면에는 풍경을 매단 구멍이 각각 7개씩 1조로
뚫려 있다 장식이나 조각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의 석탑으로
이 석탑은 8세기 후반 불국사 석가탑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10년 6월에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통일신라 건물지 3동 담장지 2기 고려시대 건물지 1동 등의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석탑 주위의 넓은 밭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상당히 규모가 큰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불국사 고금역대기>에 조선 선조 1593년 5월 왜구 수십 명이 불국사의 웅대한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둘러보다가 지장전에 무기가 감추어진 것을 보고 승려 8명을 죽이고 불을 질렀다 당시 장수사에
머물고 있는 담화대사가 달려 왔을 때 이미 불국사는 2000칸의 건물을 화마가 삼킨 뒤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불국사에 있던
왜병을 대적하려면 상당수의 스님들이 동원되었을 터이니 장수사가 작은 사찰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