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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령님이 양옆에 본마누라와ㅡ 작은마누라도 있지유.

작성자한반도땅|작성시간26.06.20|조회수72 목록 댓글 0

<서산마애삼존불> 

백제의 미소는
천년전 그대로인데
세상사는
예나 제나 변함이 없네. 

 
길은 여기 그대로 있고
옛 사람이나 나나
그 길위에 같이 서 있는데
다만 시간이 서로 다를 뿐이네. 

 
가던길 돌아서면
그 시간 만나볼까?
아니 더 빨리 쫓아가면
옛 사람을 만날까? 

 
길은 하나인데
생각은 천갈래 만갈래라.
길찻는 나그네의 무거운 어깨너머로
어느새 해는 서산에 지고 

 
길하나 겨우 일러주는 희미한 달빛하나
저 빛은 어디서 오는가?
빛은 하나인데 해와 달이되고
생각은 많은데 몸은 하나뿐이라. 

 
생각을 놓으니
몸뚱아리가 없고
시간을 놓으니
생각조차 없구나. 


                                      ㅡ 선우윤영 ㅡ

서산마애삼존불이 등장하기 이전에 백제 불상에 대하여 말한 것은 모두 추론에 불과했다

 

저 유명한 금동미륵반가상이나 일본 고류리의 목조반가유상 ,일본 호류지 백제 관음상 등

 

그것이 백제계 불상일 것이라는 심증속에 있었다면 이런 심증을 확실한 물증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삼국시대 불상들은 보면 6ㅡ7세기 불상들에는 대개 미소가 나타나 있고 이는

 

동시대 중국과 일본의 불상에서도 마찬가지로 당시 동북아시아 불상의 보편적 유행 양식이었다

 

이 시대 불상의 미소란 절대자의 친절성을 극대화시켜 상징한 것으로 상징한 것으로 7세기 이후 

 

불상에서는 이 미소가 사라지고 대신 석굴암 본존불처럼 절대자의 근엄성이 강조된다

1960년대 서산 마애삼존불상 발견당시 촬영된 흑백사진

 

서산마애삼존불이 향하고 있는 방위는 동동남 30도로 동짓날 해뜨는 방향으로 그것은 일년의

 

시작을 의미하며 일조량을 가장 폭넓게 받아들일 수 잇는 방향이다 마애불이 새겨진 벼랑 위로는

 

마치 모자의 차양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바위가 바람이 정면으로 마애불이 때라는 일이 없도록 

 

막아주는 역활을 하며 빗방울이 곧장 마애불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한다  

 

보호각이 있을 때 모습(자료사진) 

마애삼존불은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초엽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은 바위 윗부분이 지붕처럼 앞으로 돌출되어 있어서 자연적인 감실의

 

형태를 띠고 있다 마애삼존불은 하마터면 일제강점기에 세상에서 사라질 뻔한 아픈 상처도 갖고 있다.

 

가운데 여래입상의 광배 위쪽과 발 아래쪽에는 커다란 구멍이 여러 개 뚫려있다. 일본인들이

 

마애삼존불을 바위에서 때내어 일본으로 반출하려 했던 흔적이라고 한다

미륵불이 서있는 자리는 백암사 자리라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이 근방에는 절이 99곳이나 있다가

 

 백암사라는 절이 들어서자 부근의 절들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ㅡ'국보 제84호'

 

서산 마애삼존불상이 발견된 것은 1959년이다. 당시 국립부여박물관장이었던 홍사준 박사의 의뢰로

 

 고 황수영·김재원 박사가 현장 조사를 하여 마애불상을 발견하였는데, 원래 가야산은 100개의

 

부속암자를 거느린 보원사가 있었던 곳으로 불교가 꽃피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당시 발굴팀은

 

 좀처럼 불상은 커녕 탑도 발견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포기하고 철수하는 도중 지나가던 나무꾼에게

 

 혹시 근처 산에서 불상을 본 일이 없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그 나무꾼이 뜻밖의 말을 해 주었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있는디유.

 

양옆에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지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장돌을 쥐어박을라고 벼르고

 

 있구만유. 근데 이 산신령 양반이 가운데 서 계심시러 본마누라가 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있지유”

 

나무꾼이 충청도 사투리로 해 준 ‘산신령과 두 마누라’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계곡에서 발견된 것이

 

바로 서산 마애삼존불상이다

석가모니불

 

마애불이 입체감을 드러내는 양각인데다 자연의 풍화작용으로 인한 훼손을 막기 위해 문화재청은

 

1965년 마애삼존불에 보호각을 설치했다. 그러나 보호각의 설치로 햇빛이 차단되자 백제의 미소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보호각이 삼존불의 통풍과 채광을 막아 내부에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폈었다고도 한다. 이에 2005년 11월에 서산시가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보호각 벽면을

 

 철거하기로 결정, 2006년 3월 벽면을 뜯어냈고 지난해 12월28일을 기해 보호각 전체가 완전

 

철거되면서 백제의 미소를 다시 찾게 되었다

마애여래삼존불은 햇빛이 비치는 시간대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준다. 이른 아침에는 살짝 미소만

 

머금다가 오후의 내리쬐는 햇빛 아래서는 입 꼬리를 올려 활짝 웃으며, 해가 저물고 달이 뜨면 다시

 

 불상 본연의 근엄한 얼굴로 돌아가는데, 햇빛에 따라 불상의 얼굴에 번지는 웃음을 ‘백제의 미소’라고

 

 명명한 사람은 한국 역사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고 김원용 박사다

제화갈라보살

 

백제가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천도를 했다는 것은 중국과의 교섭 창구였던

 

 한강 유역의 기항지를 잃어버리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과의 교역을 위한 새로운 항구를

 

물색하던 백제 사람들에 의해 선택된 곳이 바로 서산이다. 서산은 중국과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며, 항해 지표로 활용되었던 덕적도와 중국 간의 간격은 불과 30㎞밖에 되지 않는다

미륵 반가유상

 

서산이 대중국 교섭의 새로운 창구로 부상되면서, 자연스레 백제로 들어오는 중국 문물이 서산 지역에

 

내려진 후 육로를 통해 도읍이 위치한 충청남도 내륙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반드시 가야산의

 

험준한 산길을 거쳐야 했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바로 그 교역의 사신들이 도읍인 공주, 부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태안 마애불과 예산 사면석불과 함께 서산마애삼존불이 그 길목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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