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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솔로방

오빠 생각

작성자쎄라이|작성시간26.04.10|조회수188 목록 댓글 18

♡오빠 생각’의 소녀와 ‘고향의 봄’ 소년의 러브스토리♡ -줄포촌놈 요약

한국 사람이라면 동요 '오빠 생각'과 '고향의 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앞의 동시는 11살 소녀가, 뒤의 동시는 14살 소년이 각각 지었는데, 나중에 이 두 사람이 어른이 되어 결혼해서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이 흥미로운 '동요판 러브 스토리'를 한번 따라가보기로 하자.
'오빠 생각'은 수원에 사는 최순애라는 11살 소녀가 1925년 11월 소파 방정환이 발행하는 <어린이> 잡지에 투고하여 입선한 동시다. 수원에서 서울로 간 오빠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동시로 표현한 내용이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마산에 살던 15살 소년 이원수는 <어린이> 지에서 최순애의 '오빠 생각'을 읽고 이듬해인 1926년 이 잡지 4월호에 '고향의 봄'을 투고하여 입선했다.
짬밥으로는 최순애가 이원수보다 6개월 문단 선배인 셈이다. '고향의 봄'은 이원수가 어린 시절을 보낸 창원의 당시 풍경을 그린 것이라 한다.
나중에 '오빠 생각'에는 당시 대구 계성중학교 음악 교사인 박태준이, '고향의 봄'에는 홍난파가 각각 곡을 붙여 둘 다 국민동요가 되었다. 특히 '고향의 봄'은 남북한 사람들이 다 같이 좋아하는 몇 안 되는 동요라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오빠 생각'의 시인 최순애와 '오빠' 최영주
'오빠 생각'에 나오는 '오빠'는 최순애의 8살 위 오빠인 최신복(시인. 필명 영주, 1906~1945)으로서, 동경으로 유학 갔다가 관동대지진 직후 일어난 조선인 학살 사태를 피해 가까스로 돌아온 후, 수원에서 소년운동을 하다가 서울로 옮겨 방정환 선생 밑에서 소년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오빠는 집에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오질 않았다. 오빠가 집에 올 때면 늘 선물을 사왔는데, 한번은 “다음에 올 땐 우리 순애 고운 비단 댕기 사다 줄 게”라고 말하고는 서울로 떠났다.
그런데 오빠는 뜸북새, 뻐꾹새 등 여름새가 울 때 떠나서 기러기와 귀뚜라미가 우는 가을이 와도 돌아오지 않았다.
최순애가 과수원 밭둑에서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오빠를 그리워하다가 울면서 쓴 시가 바로 ‘오빠 생각’이다.

이원수는 '오빠 생각'이란 동시를 읽는 순간,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최순애의 영원한 오빠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같은 잡지에 글이 실렸다는 구실로 최순애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얼마 후 수원에서 기다리던 답장이 왔다. 이렇게 8년여 동안 두 사람은 편지와 사진을 주고받으며 애틋한 사랑을 키워나갔다. 펜팔의 선구자들인 셈이다.
노년의 최순애(1914~1998)와 이원수(1912~1981) 부부.
그러나 동시가 맺어준 이원수와 최순애의 인연은 결혼에 이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35년 3월, 8년 동안 펜팔로만 사귀던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고 만남의 장소를 수원역으로 정했다.
이원수를 처음 만나기로 한 날 21살의 처녀 최순애는 윗옷에 꽃을 달고 숄을 두른 모습으로 수원역 대합실 벤치에 앉아서 기다렸다. 서로 금방 알아보기 위한 표시였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원수가 나타나지 않는 게 아닌가.

이원수는 최순애와 만나기로 한 수원역으로 가기 위해 기차표를 끊었지만, 하필이면 그날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던 것이다. 반일 성향의 독서회 사건에 관련된 때문이었다.
함안금융조합 서기로 일하던 이원수가 ‘함안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됐다는 소식이 최순애 집에 알려지자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최순애 집안에서는 이원수가 편모에다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다른 혼처를 권해도 보았지만 최순애는 완강히 거부했다. 또한 오빠 최영주는 이원수의 문학적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집안의 반대를 설득했다.

이원수가 수감된 후 최순애는 10개월 동안 그의 옥바라지를 했다. 이원수는 1935년 4월부터 1936년 1월까지 10개월의 수감생활(집행유예 5년)을 치르고 난 뒤에야 최순애를 만날 수 있었다
이원수가 출옥한 후 두 사람은 1936년 6월 결혼하여, 한국 최초의 문인 부부가 되었다. 부부는 금실이 좋아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이원수는 1981년, 최순애는 1998년에 각각 작고했으니 백년해로한 셈이다.

요즘 수원에서는 지역 문인들을 중심으로 최순애의 '오빠 생각' 노래비를 건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노래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시인이 다녔던 매향여중이나 과수원이 있었던 장안문 부근 북수동 등지가 노래비 건립 후보지로 거론된다.

남편 이원수가 짓고 홍난파가 곡을 만든 '고향의 봄' 노래비는 현재 수원 팔달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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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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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쎄라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4.12 댓글에 감사하며
    편안한 오후가 되세요
  • 작성자천년홍 | 작성시간 26.04.15 저도 덕분에 오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슬펐어요
  • 답댓글 작성자쎄라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4.16 댓글에 감사하며
    편안한 하루가 되세요
  • 작성자복사꽃 | 작성시간 26.04.19 오빠생각 고향의봄 좋아하는노래의 사연을 알게해주셔서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쎄라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4.19 댓글에 감사하며
    편안한 저녁시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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